한국의 사찰(불국사,쌍계사,수덕사,법주사,표충사,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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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찰(불국사,쌍계사,수덕사,법주사,표충사,대흥사)

무진스님 0 2589

토함산 불국사

 

1.  인류공통의 최고 지향목표가 무엇인가를 자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급문화의 향유를 쉽게 답할 수 잇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그러한 인류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하여 얼마만큼의 노력을 경주했던가 반문할 필요가 있음을 느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인류는 한 시대의 선각자나 우수한 소수민족이 이루어 놓은 고급문화의 단순모방이 현실 삶의 토대가 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만 있어도 자신들의 목표를 향해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겠다. 멀리 돌아 볼 것 없이 우리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흔히 5천여 역사의 문화를 긍지로 삼는다고 쉽게 자랑삼아 말해버리고 스스로 흐뭇해한다. 물론 흐뭇해 할 일이다. 하지만 아무런 공감대의 형성없이 조술(祖述)되어진 문화는 무가치하고 허무함만을 느끼게 할 뿐이다. 천여년의 세월을 소급해 가서 그 시대의 문화를 진정으로 공감하여 향유할 노력을 해 본 사람이 몇이나 되며, 좀 더 고급한 정신문화의 창조를 위하여 노력한 이가 얼마이겠는가?

만일 그러한 발심을 내어 본 이가 있다면 그는 역사의 줄기에서 이루어 놓은 고급문화의 현장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시간의 차원이 달리하듯 느껴지고, 대지와 초목의 숨결마저도 자신의 생활 테두리와 다른 무엇인가를 토해내는 그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려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류가 곳곳에 재건해 놓은 그러한 매개체를 향해 사람들은 길을 떠나고 때로 고뇌하며, 정신적 교감을 위한 촉각을 세우기도 한다. 경주로의 무수한 발길 또한 이러한 이끌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  BC 57년에 이미 여섯 촌락을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하였던 고대 문명지, 서라벌, 사라, 금성, 계림 등의 이름이 아직까지도 낯설지 않다. 경주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신라가 고려시대에 합병되던 935년의 일이다. 불국사를 위시한 석굴암, 분황사, 안압지, 포석정, 첨성대 등의 유적지는 오랜기간 동안 역사의 주요활동 무대였던 경주의 내력을 들려주고 있고, 기나긴 세월 차곡차곡 쌓여온 도시의 무게와 관광명소로서의 정갈함은 불국사에 다다르도록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이어져 있었다.

경주시의 동남쪽에 동해를 면하고 높이 7백45m로 솟아있는 토함산(吐含山)은 남쪽 기슭에 불국사(佛國寺)를, 그리고 산정(山頂) 가까이에 석굴암을 품고 있어 한층 유명하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세워진 불국사. 관광명소로 순례지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곳이어서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참배를 하기 위해 불국사를 찾는 사람은 이런 무심한 발길이 혹시 못마땅할지도 모르겠다.

외국인까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국사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이들 모두가 불교인이 아닐 터인데, 불국사를 배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담기에 열중인 것은 무엇인가의 이끌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흐뭇했다. 역사가 다르고 종교, 사상, 나이까지도 다른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감대가 불국사에는 흐르고 있는 것이다.

신라땅이 불교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근거의 제시로 불국토 인연설을 내세우고 그러한 뒷받침으로 세워진 불국사 창건은 법흥왕 14년, 이차돈(李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다음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불국사 고금창기를 살펴보면, ‘법흥대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왕비 기윤부인(己尹夫人)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는데, 영제부인은 그 법명을 법류(法流)라고 했고 계율을 잘 지켰으므로, 그가 창건한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는 또 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라고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5백20년대의 신라인에게 과연 화엄이라는 사상이 널리 알려져 있을까 하는 의아심 속에 그 신빙성을 절감하고 있다.

한편 불국사 창건 당시의 기록을 말해주는 고금창기(古今創記)는 삼국유사의 사중기(寺中記)와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기록을 보여주고 있는데 진흥왕 즉위 35년에 중창했다는 기록과 왕의 부인이 법운자(法雲子)라는 비구니가 되어 위난타(瑋難陀)라는 스님을 오게 하였고,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의 두 불상을 주조하여 불국사에 봉안하였다고 적고 있지만 크게 믿을 만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채 신라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세인에게 가장 주목 받은 이야기로 남겨져 있다.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는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한 것이 꼭 성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대성(大城)이란 아이가 있었다.

대성이 끼니를 잇기 위하여 복안이란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던중 점개(漸開)라는 스님이 “신도가 보시하기를 좋아하면 천신이 항상 보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배를 얻게하고 안락과 장수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에게 우리가 이리 곤궁하게 사는 것은 과거에 좋은 일을 해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이니 지금 보시하지 않으면 더욱 가난해질 것이라며 자신이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를 위해 시주하였다.

그런지 얼마 후 대성은 죽음을 맞이했고, 그가 죽던 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가 너의 집에 탄생하리라”하였다.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니 과연 대성이란 자가 죽은 것이 사실이었고, 동시에 김문량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기에 이르렀다.

아이가 왼손을 꼭 쥐고 펴지 않다가 7일만에야 폈는데 그 손바닥 안에 대성(大城)이란 두 글자를 새긴 쇠붙이가 있었다. 이러한 일로 그 아이를 대성이라 이름하고 전생의 어머니를 아울러 봉양하였던 것이다.

대성이 자라면서 사냥을 좋아하여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을 잡아가지고 산 밑 마을에 유숙하였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 먹으리라”하자 대성은 용서를 빌었고, 곰을 위하여 절을 세워 주겠노라 맹세했다. 이 일로 하여 장수사(長壽寺)를 창건하였고, 이러한 비원은 계속하여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石佛寺)를 세웠으니, 석불사는 지금의 석굴암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전생과 이생의 두 부모를 위하여 절을 지었다는 기이한 인연은 자연스레 불교의 인과법과 불살생 등의 계율을 전파했던 것이다.


3.  우리의 오랜 전통과 정신문화에서 불교가 끼친 영향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으며, 그런 속에서 불국사가 담당한 역할은 단연 선두로 나서고 있다. 흔히 한국의 문화를 상징하는 표지에 불국사의 전경이 실리고 있는 것은 이런 일로 하여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국사의 오늘 모습이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재상 김대성이 그 옛날 발원하였던 원력이 지금까지 소중히 길러져 꽃피운 정성이 지중할 뿐이다. 선조26년 5월 왜구의 침입에 의해 불국사는 대웅전․극락전․자하문 등 기타 2천여 간이 불타는 화를 입었다. 그후 4~50년이 지난 후 조금씩 복구되다가 1970년 2월 불국사의 대복원 공사가 착수되어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마치고 다시금 불국토의 정신을 이어가게 되었다.

불국사에는 주목할 만한 큰스님과의 별다를 인연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에게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불국사도량에 이르러 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염화미소다. 신령한 토함산의 정기를 함초롬이 이어서 모아놓은 기운과 도
량이 운신하는 구조적 아름다움.

거기에 심미안을 가진 신라인의 예술감각이 총집결하여 이루어 놓은 정성이 한 눈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따지고 드는 일은 지각으로 성숙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리 표출되어질 수 있지만 인간 본연의 감성에 회부되어지는 것은 그 성숙 정도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순간적으로 튀어 나오는 감탄과 환희가 별반 다르지 않음이 이 같은 사실을 말해주며, 이것은 또한 같은 인간의 몸을 받은 공감대인 것이다.


4.  불국사 도량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중심의 일곽(一廓)과,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극락전 일곽, 비로자나 부처님의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구성 속에서 각각 불국토의 염원을 담아 놓았다 한다.

청운교와 백운교의 아름다움은 이미 필설로의 설명을 불허하고 대웅전 앞 석가탑과 다보탑에 얽힌 전설의 애틋함이 그러한 감성의 초점을 한층 더 또렷이 집중시킨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석가탑과 다보탑의 조성이 법화경의 다보여래(多寶如來)부처님과 석가여래부처님의 두분 몸을 표현하여 각각 법신불과 보신불을 상징한다고 말하고 있다.

탑조성이 불교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별도로 두 탑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남다르다. 이것은 두 탑이 각각 추구할 수 있는 멋을 한껏 부렸음에도 조화로울 수 있음에 대한 애정이고, 또 하나 탑조성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통일신라의 융성이 극에 달하여 신라문화가 가히 전성시기를 맞이한 때, 경덕왕 10년 재상 김대성은 두 탑의 건립을 추진하지만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명을 다했다. 그럼에도 그의 염원은 신라란 나라를 불국토라 믿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온 국민의 성원 속에 끝끝내 완성해 내었던 것이다.

차가운 돌덩어리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신라인의 종교적 신심과 함께 전해지는 무영탑(無影塔)의 애틋한 사연. 무영탑은 석가탑의 다른 이름이며 이는 아사녀(阿斯女)의 전설
에서 기인한다.

백제에서부터 석가탑 조성을 위해 불려온 남편 아사달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아사녀는 신성한 불사의 현장에 금난방(禁亂榜)을 어길 수 없어 탑 공사가 끝나기만을 고대한다. 탑조성이 끝나면 근처 연못에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는 문지기의 말에 많은 세월 그곳을 지켰지만 끝내 석가탑의 모습은 비치질 않았고 아사녀는 그 못에 투신하고 말았다. 아내의 사랑에 남편 아사달 또한 불사를 마치고 아내가 빠진 연못에 함께 투신하는 것은 어쩌면 짜여진 각본 같지만 이러한 예술의 극치에 따르는 당연스런 희생일는지 모른다.

 

그런 사랑이 탑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고 이런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오고 있음이니, 부처님의 정토사상과 극한의 예술세계가 혼일하여 영원토록 전해질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여건을 떠나서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 그것을 통해 신심을 불러 일으키고 자신을 정화해 나갈 힘을 불국사는 현재도 지니고 있고 이후로도 계속 그 힘을 지켜 나갈 것이다.


삼신산 쌍계사


1.  쌍계사 봄의 서막은 세찬 빗줄기가 겨울의 텁텁한 기운을 말끔히 씻겨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면하던 개구리가 실제로 깜짝 놀라 깨어날 정도의 세찬 빗줄기는 하동 부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회색빛만을 머금고 휴식에 들어갔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의 정상은 지상과 달리 하얗게 눈을 머리에 이어 격을 달리했고, 산 중턱에서부터 몽실몽실 일어나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산허리를 감싸고 돌아 오른다.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풍요로운 땅 평사리를 지나고 나면, 십리 벚꽃길로 유명한 쌍계사의 들목으로 접어든다.

일제치하에서 민족정신의 말살로 대변되던 벚꽃길이 유명세를 얻어 이렇듯 관광명소로 알려진 것은 격세지감. 아직은 이른 봄이어서 그 절경을 감상할 수 없지만 키작은 벚꽃나무 터널이 만든 숲길이 제법 아늑하고, 비가 내린 후의 깨끗하고 신선한 공기가 벚꽃터널에 대한 아쉬움을 보상하고 있었다.

찾을 때마다 그 느낌을 달리하여 몇 번의 경험으로 인한 앎을 불허한다 하여 이름 지어진 지리산. 진실로 그윽한 산세다. 그래서 1950년 6․25를 전후로 해서는 공산당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
던 곳.

소백산맥의 4대 명산의 하나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3도에 걸쳐진 장관은 지리산 10경을 품고서 구례의 화엄사와 하동 쌍계사 등 천년고찰의 터를 제공해 주었다. 남한 제2의 고산(高山)으로 그 둘레가 7백리에 이르는 지리산은 자리매김만큼이니 이름도 많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 삼신산(三神山)의 이칭 속에 쌍계사(雙磎寺)의 일주문 편액은 ‘삼신산(三神山) 쌍계사’로 인연을 맺어 놓았다.


2.  시간이란 무한대의 대상을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해 놓고 있지만, 그 또한 쓸데 없는 분별심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은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와 미래 어는 한 곳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듯이 정신과 육체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고, 시간과 공간이라고 함이 다른 이름의 한 몸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미래에 대한 환상을 부여잡고 사는 것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 낙천주의자라는 단어에 묶여 버릴 수많은 없다.

인간은 자신의 처지를 항상 좋은 방향으로 이끌 능력이 있음에도 그 능력을 정신이란 한 부면(部面)에 국한시켜 놓고, 또 철저히 실현시킬만한 신심의 부족으로 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남기곤 한다.

하지만 많은 범부들에 비해 초월적 능력을 발휘하고, 그러한 흔적이 남겨진 것들은 모두가 이 미래에 대한 구체적 환상을 신심으로 이끈 결정체인 것이다.

쌍계사의 오늘 또한 아득한 창건 당시 혜소스님의 이러한 희망과 신심이 없었던들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턱없는 환상거리가 되었음직한 원력이다. 지리산의 맑은 두 물줄기가 쌍계사를 사이에 두고 흘러내리는 절경과 기암괴석 사이로 하동지방의 많은 우량으로 해서 곧게 잘 자란 사철 푸르른 대나무 숲과 화사한 벚꽃나무길 등에 의해 오히려 묻혀버린 쌍계사 창건의 신비로움을 그냥 내쳐둘 수 없는 일이다. 

중국 선종의 시조 달마로부터 전수된 의발은 5인조 홍인에 이르러 영남에서 넘어온 나뭇꾼 혜능은 다시 남방으로 건너가 교화를 폈다. 좌선보다는 견성을 중시하였고, 조계산에 들어가 정혜불이(定慧不二)를 설하였으니, 다른 조사들에 의한 것이고 논장(論藏)이지만 혜능에 의한 전적(典籍)을 육조단경(六祖壇經)이라 하여 경으로 받들어지고 있을 만큼 그 족적이 뚜렷한 인물이다.

이러한 혜능과 쌍계사와의 인연은 쌍계사 금당(金堂)에 맺어져 있다. 고대 중국의 문명은 흔히 남방과 북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따뜻하고 살기좋은 남방의 문화는 그만큼 자유분방하고 감상적이라고 한다면 북방에 거주하는 이들은 그들의 지성을 충분히 가동하여 합리적이고 질서롭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여건속에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이러한 향상은 불교에도 반영되어져 북방에는 선종(禪宗)이 그 명맥을 굳건히 하여 발전시켰던 것이니 5조 홍인의 뒤를 남방의 혜능과 북방의 신수(神秀)가 나란히 6조의 맥을 이어 나갔지만 북방의 선종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다만 혜능의 남방 선종이 5가(家) 7종(宗)으로 번성하였다.

남방인이라는 자신을 한정짓는 틀을 벗어나 북방으로 가서 선종의 요체를 얻고 그것을 다시 발전시킨 혜능은 신라 성덕왕 2년 의상스님의 제자 삼법(三法)스님의 꿈에 나타나 “내 정골(頂骨)은 동방 강주(康州)에 가면, 설리갈화처(雪裡葛花處)가 있으니 거기에 묻어라”고 지시했다. 무슨 연유로였을까? 지금의 중국 선종이 아니 중국의 불교가 쇠퇴할 줄을 알기라도 한것일까?

어쨌든 삼법스님은 육조혜능의 정상을 가지고 강주땅에 이르렀다. 그때 삼법스님을 마중하여 길을 안내한 것은 지리산 호랑이였다. 눈으로 온통 하얀 지리산은 더없이 그윽하고 황홀한 아름다움에 휩싸여 있었지만, 혜능스님이 몽수한 ‘설리갈화처’를 찾아야 하는 삼법의 당혹스러움은 지리산 호랑이의 인도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위가 온통 눈으로 천지를 이룬 지리산 기슭에 오직 그곳에만 칡꽃이 만발하여 있었고, 삼법스님은 즉시 혜능 스님의 정골을 안치하고 8년간 그 자리에서 수도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신라 문성왕 2년에 당에서 귀국한 진감국사 혜소(慧昭)는 육조의 명당을 짓고 절을 세웠다. 처음에는 옥천사(玉泉寺)였다. 지금의 쌍계사(雙鷄寺)라 함은 정강왕에 이르러 개칭된 것으로 근방에 옥천사란 이름의 절이 또 하나 있어 개칭한 것이라고 전한다.


3.  과거 화개장터로 많은 이의 발길을 모았던 전라땅의 구례와 경상도의 화개가 만나는 쌍계사의 들목이 지금은 경상도 사람이니 전라도 사람이니를 따지지 않고 만날 수 있는 화합의 상징이 되어 있어 다시 그 유명세를 잇고 있는 곳이 되었다.

왕서초등학교 근처의 세이암(洗耳岩)은 또하나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과거 우리 선비들의 생활에는 세이라는 풍습이 있었으니, 자신의 심안을 흐릴 좋지 못한 얘기나 남의 험담 등을 들으면 맑은 개울가에 자신의 귀를 씻어 심성을 정화한다는 상징으로 삼았다. 이는 중국 요(堯)임금 시절 허유(許由)에게서부터 그 남상의 물줄기가 흘러온 것으로 중국 상고시대 요임금과 순임금이 동이족이라는 학설도 있어 낯설지 않고, 지리산의 풍부한 정서가 가슴으로 와 닿는 소품이다.

사찰을 배경으로 한 곳이면 흔히 소나무와 대나무 숲 사이에 차 밭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보게된다. 쌍계사 주위도 소나무와 대나무는 물론이고 차밭의 품격은 한국제일이다. 신라 제46대 문성왕2년(서기840년) 진감국사가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죽로차(竹露茶) 종자를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어 그 연원을 짐작하게 한다.

차는 여유와 예의, 맑은 정신을 보조하는 선가(禪家)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다도(茶道)나 다례(茶禮)란 이름으로 차 한 잔 마시는 일에 격을 높여 놓은 것은 물론이고, 숙우라는 다기를 통해 기다림의 미덕과 여유를 배우게 한다.

차나무에 핀 매화를 닮은 꽃잎은 수줍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야생으로 자라는 차나무 자체가 소나무나 대나무 숲에 가려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그 꽃은 더욱더 자신의 아름다움을 꼭꼭 숨겨두고 교만하지 않은 미덕을 갖추고 있다.

잎 사이를 살짝 들춰내서 보이는 작고 하얀 꽃잎의 매력 또한 쌍계사를 찾는 재미로움의 하나다. 산기슭의 양쪽으로 흐르는 물줄기 사이에 날렵히 솟아오른 일주문을 통과하면 금강문을 지나게 된다.

양 옆의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두 귀를 감싸고 돌아 이미 세속의 음이 들리지 않을 즈음 천왕문을 통과하고 나면 일직선으로 고정된 시야가 좌우로 넓게 펼쳐지고 단청빛을 더욱 화려하게 하여 모습을 드러낸다.

팔영루를 지나고, 계단을 하나 둘 오르자 대웅전의 맑은 얼굴이 비석 하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다름아닌 진감국사 대공탑비(眞鑑國師 大空塔碑)다.

이 탑은 진성여왕이 즉위하여 왕명으로 신라 최고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에게 글을 짓고 쓰게 한 것인데, 그의 사산비명의 하나로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어 있어 경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물로 남아있다. 쌍계사의 유물로는 이외에도 부도가 보물 380호, 대웅전이 보물 500호로 정해져 있다. 이렇듯 나라가 인정하여 준 문화재 이외에도 쌍계사에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거리를 담고 있는 유물과 유적들이 있다.

금당의 혜능선사의 정상을 모셔 놓은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팔상전이 그러하고 쌍계사의 부속암자 국사암에는 진감국사가 심어 놓았다는 사천왕수(四天王樹)가 거대한 고목으로 하늘을 반쯤 가리우고 있다.

 

가야불교의 전래 설화를 담고 있는 허황후의 일곱 왕자가 성불하였다는 칠불암이 또한 자리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아자방으로 이름 나 있다. 한번 불을 때면 아자형(亞)의 위 아래 온돌들이 60일 동안이나 고루고루 식지 않았던 신비로움을 간직한 것이니 이러한 세계사에 남길만한 건축양식이 소실되어 터만이 그 자리를 지켜 유적지 역할을 해오다 근자에 복원되는 기쁨을 맞았다.


4.  십리 벚꽃길로 유명한 쌍계사 봄의 들목과 시원한 계곡을 품은 쌍계사 여름철의 녹음은 가을날의 붉게 물든 피아골의 단풍과 설화갈리처의 쌍계사 창건의 겨울로 이어져 삼신산 쌍계사의 사계는 어느 하나 부족함 없는 주변환경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쌍계사의 이러한 풍부한 정서가 중생에게 전달하는 환희심은 커다란 공덕이다.

인간에게 올바른 환상이 주어지고 그것을 부여잡고 끝까지 노력할 수 있는 근기의 제공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으로 실유불성(悉有佛性)을 진지하게 받아 들이고, 혼탁한 사회에서 그래도 부처님의 말씀을 소중히 실천해 나간다는 것이 어쩌면 환상과도 같은 어려운 일임을 느껴질 때 그러한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원력이 쌍계사에서 느껴진다.

 

임진왜란 이후 벽암스님의 중창이 그러하고 근자에 도량의 면모를 일신한 고산스님의 원력이 또한 그러하다. 혜능의 정골을 안치하면서 시작된 쌍계사의 역사는 오래토록 그의 사상을 전수해 왔고, 이제쯤이면 육조혜능의 화현을 기대해 봄직한 환상 하나 움켜쥐고 삼신산을 하산 한다.


덕숭산 수덕사


1.   늘상  대하는 현상과 늘 대하는 감성의무거리가 어느 날 문득 새롭게 인식되어질 때가 있다.

  별반 다르지 않은 주위의 사물이나 현상에 새로운 감동을 받고, 자신의 인식 속에 느낌표 하나를 찍을 수 있을 때, 삶은 경이로울 수 있다.

무릎을 치며 그런 것이었다고 뜻이 통할 누구라도 붙잡고 얘기하고 싶은 그런 현상이 얼마나 자신에게 자주 일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즐거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찾아든 이 작은 깨달음이 그저 생긴 것은 아니다. 언젠가라도 자기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을 했었고,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 놓았던 것이 이제야 발현했을 뿐이다.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둘 수 없음은 이러한 인식체계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요, 깨침의 미학인 것이다.

그래서 삶은 느껴지는 것 뿐 아니라 진지하게 고뇌하고 생각하는 삶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날카로운 질문 하나 던질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너무도 화급하고, 머리에 불덩이라도 하나인 듯이 다급한 이들이 택한 길이 출가다.

불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출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발심해봅직하지만 세속의 인연은 그리 쉽게 발목을 놔주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쯤이야 어떠랴. 하루쯤 출가자의 마음이 되어서 사물을 대하고 삶을 이해해 보자.


2.  초봄의 햇살이 들판의 언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새파란 하늘 아래 드러낸 황량한 들판은 오히려 고풍스럽다. 삽교를 지나고 덕산온천을 지나 수덕사까지 이어진 길은 따스한 정감이 느껴진다.

  충청도 특유의 향토색과 끈끈한 정.
  충청남도 예산(禮山)과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가 한 형제처럼 다정다감하게 어울린다.

  충절과 예의의 고장 충청도에 그만한 기개를 지닌 인물 만공(滿空)스님이 주석했던 수덕사가 자리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듯 싶다.

허허로운 들판길을 달리며 출가자의 마음을 지닌 이는 단 하나의 욕심을 가져도 좋다. 그것은 올바르게 수행생활을 이끌어 줄 스승을 만나는 일이다. 원효와 같이 별다른 스승 없이도 홀로 자재로울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너무 외롭다. 서로가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눈빛만으로도 미소를 흘릴 수 있는 스승을 만나서 흐뭇함을 전해줄 제자가 되고 싶다.

덕숭산의 따뜻한 품안에는 그런 스승이 있을 법하다. 멀리는 조주에게 있어 남천이 그러했고, 우리에게는 송담(松潭)에게 있어 전강(田崗)이 그러했다. 그리고 이제 여기 제자 만공과 스승 경허와의 인연의 법맥이 한 없이 자랑스럽고 부럽다.

 

어느덧 다다른 수덕사 입구에는 일주문이 우뚝 서서 1일 출가자를 맞이하고 1일 출가자는 합장으로 답례한다. 계단을 밟고 올라선 수덕사의 경내는 경계를 여의어서 맘껏 운신하는 자유로움이 있고, 그러면서도 방종하지 않은 절제미가 흐른다. 곧이어 다가선 대웅전은 수덕사 예술의 백미로 나라에서도 국보로 정해 보호하고 있다. 단청의 빛깔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대웅전은 그야말로 소박한 우리민족의 얼굴과도 같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로 꼽히는 수덕사 대웅전은 백제 최고의 명장(名匠) 아비지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건립연대를 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수덕사의 깊은 덕은 아주 오래된 훈풍으로 긴 역사를 통해 많은 출가자를 이 곳에 모이게 했고 깨침을 주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맥이 살아 덕숭총림의 커다란 불가를 이루어 놓은 곳이다. 모든 고찰의 창건이 그러하듯이 수덕사의 창건연대 역시 확실하지 않다.

사기(寺記)에 의거해 보면, 백제 말엽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했고, 제 30대 무왕에 이르러 혜현법사(惠顯法師)가 이 곳에서 법화경을 강론했다고 되어있다. 달리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21년(599)에 지명법사가 창건하였고 원효대사가 중수했다고 한다. 이러한 창건의 시비를 따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직 만공선사를 찾아 뵐 산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민공스님의 기개를 이은 후손으로 스님의 일화를 동행자와 함께 자랑스레 나누었을 이 길은 1천 20개나 되는 계단으로 덕숭산을 오를 수 있게 해놓았다.

다행이다. 만공탑이 대웅전의 위치와 비슷한 곳 어디엔가 세워졌다면, 사람들의 발길은 그만큼 뜸했을거고 그래서야 덕숭산의 푸근한 덕을 느끼기 힘들었으리라. 이런 길을 오르며 수덕사의 재건에 얽힌 설화 하나 떠올리는 것도 재미롭다.

한 때 사찰이 퇴락했음에도 흉년이어서 재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졌을 때가 있었다. 그 때 남루한 복색이었지만 아리따운 한 여인이 사찰의 고양주를 자청해왔다. 그 여인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지방장관이 우연히 이 곳을 들렀다가 이 여인을 보고 반하여 수덕사 재건을 약속했다.

재건불사는 드디어 회향을 하고 장관은 약속대로 여인에게 함께 내려갈 것을 얘기하자 여인은 자기를 따라오라며 숲을 헤치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여인을 따라나선 장관은 한발 앞서 걸어가는 여인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여인의 자취는 사라지고 신발만이 바위 위에 남겨진 채, 신비한 기운이 주위를 감쌌다. 그제서야 장관은 그 여인이 불보살의 화신인 줄 알아차리고 탐색에 눈이 어두웠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 거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름하여 수덕각시인 이 여인은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수덕사를 중창한 후 바위 속에 들어가 버렸다 하는데 이것은 후에 관음바위라 불리웠다.

관음바위를 지나면 거대한 관음석불이 고요한 주위의 산세를 다스리고 서 있고, 그 위에는 드디어 만공스님이 주석했다는 정혜사(定慧寺)와 만공탑이 모습을 나타낸다.


3.  모든 출가자의 마음은 물론 결연하다. 자신의 바탕이고 생명자체인 혈연을 끊고, 인간이면 당연시 취급되는 갖가지 욕망까지도 저버린 채 집을 떠나 왔으니 그야말로 못할 일이 무엇이며 걸릴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행자생활이 며칠 지나고 나면 그들은 세속을 떠나 더욱 번민스러운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해 한다. 그리고는 결국 출가한다는 것은 단순히 집을 떠난다는 의미가 아님을 그때서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더욱더 다잡을 계기로 맞이하게 되는것이다. 수덕사의 출가자는 이러한 위기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정돈하기 위해 만공탑을 찾지 않았을까?

만공탑은 여느 사찰에서 흔히 보아온 그런 모습이 아니다. 모든 격식을 배제했음에도 스님의 정신을 오룻이 닮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스님은 1871년 3월 17일 전북 태인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도암(道岩)이었고, 휘(諱)는 월면(月面), 만공(滿空)은 법호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때, 신룡(神龍)이 구슬을 토하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하고, 두 살이 되던 해 그 아버지의 꿈에 한 노승이 찾아와 “이 애를 데려다 큰 중을 만들겠다”하여 보통인물이 아님을 일찌감치 알려놓았다.

그가 13세 되던 해 과연 계룡산 동학사로 들어가 진암이란 스님에게 머리 깎고 중이 되었다. 그 뒤 만공은 자신의 사상과 생애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한국 선풍의 중흥조 경허선사를 만나게 된다. 그에게서 사미계를 받고 깨침을 얻은 후 1904년 34세때 마침내 경허화상으로부터 전법계를 받고 그의 전법제자가 되었다.

9척장신에 형형한 눈, 그리고 추상같은 도풍으로 승속간 대중들에게 위엄과 법력을 떨쳤던 당대의 기걸승. 그에 대한 일화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청정비구인가 하면,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다리를 베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하여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갈고 자기도 했다. 그래서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란 문자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세상사가 마음의 놀림에 달려있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만공은 한 생애를 걸림 없이 호탕하게 살아 나갔던 것이다. 1937년 그러니까 만공의 나이 67세로 접어들었을 때다. 조선총독 남차랑(南次郞)이 각본산 주지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붙였다. 조선불교 진흥책에 관한 견해를 한 마디씩 피력해보라는 회의였다. 이는 다름아닌 대처승제도를 승인하여 한국불교를 왜색화하려는 그들의 형식적 모임이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에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노승의 입에서 벽력같은 사자후가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당신네들의 사찰령이 시행된 뒤로부터 조선의 중들은 모두 취처육식하는 파계승이 되어 버렸소. 조선의 중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역대 총독들은 모두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생을 할 것이요. 그러니 이분네들을 건져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들 주지부터가 먼저 계를 지키고 힘써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조선불교의 진흥책이요....”

한 차례의 막힘도 없이 일갈해 버린 만공스님의 말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총독은 통역해 줄 것을 명했고, 스님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느낀 다른 주지들에 의해 노장이 망령이 든 것이라는 얼버무림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일제시대 이후 색바래기 시작한 승풍은 승려의 생명선가지 위협하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만공스님의 이러한 우려와 기개가 그래도 명줄이 되어 이어진 것이니 그가 길러낸 수많은 선지식들이 그 역할을 담당해 내었다.

눈푸른 그의 제자들과 스님의 사상은 오늘의 정혜사를 중심으로 승풍진작을 위한 선우도량의 결성에서도 이어져 참으로 반갑다. 출가자는 이렇게 하여 이 곳에서 올곧은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다.

 

뚜렷한 족적의 한암 스님은 물론이고 청춘을 불사를 곳의 김일엽스님이 또한 여승들의 스승이 되고 있는 것이다. 수덕사가 이렇듯 한암스님과 지어놓은 인연으로 현재가지도 선우도량과 같은 승풍확립을 위한 계속된 노력을 해나가니 한국불교가 어둡다고만은 할 수 없겠다. 초발심의 출가자는 만공탑에 쓰인 글귀를 읽고서 귀가를 서두른다.

 

다음번 출가를 준비하기 위하여.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나니 뜻은 나를 찾아 얻는데 있나니라...”


속리산 법주사


1.  우리민족에게 있어 불교란 단순히 종교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다. 서역만리나 떨어진 곳에서부터 전래된 불교가 중국이란 나라를 통해 한 번 여과되어져 우리에게 전래되면서 아무래도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 수는 엇었다.

그 깊이란 것이 받아들이는 우리민족의 역량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한 전래는 다시 우리민족의 기본적 정신 위에 불교라는 색깔 다른 사상이 습합되어져 우리만의 사상으로 발전시켜져 왔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불교란 말을 쓸 수 있는고 민족의식의 흐름 속에서 불교의 역할을 조명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국의 사찰순례는 이런 이유로 단순한 불교와의 만남 이외에 유․불․선의 다양한 사상과 우리고유의 토착신앙가지를 섭렵할 수 있는 무한의 흥미로움을 전해준다. 그 뿐인가. 우리의 먼 조상들이 사찰 하나를 조성하기 위한 심미안의 세계가 가슴으로 전달되는 현장이기도 한 것이다.

사려깊은 애정으로 경내를 들어선 이는 풀 한포기 돌 하나가 그저 놓여진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무모한 일은 것 같은 일도 일관된 원력으로 장엄불사를 이루어 냈는가 하면 무심과 무욕의 평상심이 자연스러운 경내의 정원조성으로 나타내어 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곳에 필연적으로 따랐던 것은 눈푸른 선각자의 출현으로 인해 중생제도와 흩어진 사상의 가닥이 한 곳으로 매듭지어지는 일일 것이다. 또한 이렇게 매듭지어진 것을 가닥가닥 풀어서 그 연원을 살펴보는 일은 오늘의 우리가 할 일이다.


2.  속리산 법주사로의 첫 번째 관문은 이름하여 말티고개라는 해발 800여m의 고지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면서 시작된다.  고려 태조가 속리산에 행어(幸御)할 때 쓰기 위해 닦았다는 이 길은 법주사를 찾기 전에 경건한 마음을 갖고 하심(下心)할 수 있도록 해준다.

구절양장의 말티재를 넘고나면 수령(樹齡) 580년을 자랑하는 정이품 소나무가 행인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세조대왕의 법주사 행차 때 대왕이 탄 연(輦)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이 뻗어 놓은 가지를 번쩍 들었다 하여 받은 벼슬 정이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면 이 정도의 여유와 멋은 지녀야 했다. 정이품의 소나무를 끼고 돌아나가면 속리산의 커다란 체격이 넉넉한 가슴을 펼쳐보인다.

속리산은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의 한 줄기로서 보은, 괴산, 상주 삼군(三郡)만 해도 여덟가지나 된다. 또한 산내에는 여덟 개의 석문이 있고 다시 문장대, 경업대 등 여덟 개의 대(台)와 여덟 봉우리가 길목 마다에서 수많은 얘깃거리를 남겨 재미롭다.

여기 고운(孤雲) 최치원선생이 헌강왕 12년(886년)에 속리산 묘덕암을 찾아와 산의 경치를 구경하고 남긴 시는 속리산을 한층 더 유명하게 해준다.

  道佛遠人 人遠道 (도불원인 인원도)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진리를 멀리하려 하는구나.
  山非鯉俗 俗離山 (산비리속 속리산)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았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잔설이 남아 있던 오리숲에 이젠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전나무 소나무숲 사이를 봄기운이 오가며 훈기를 불어 넣는다. 이쯤 되면 아무리 무딘 감성을 가진 이라도 세조가 문장대에서 백일장의 즉흥을 읊게 했던 선비들과 어울려 그 긴장감을 맛보고 싶을게다.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 연수석기에서는 속리산이란 산명을 얻게된 연유를 이렇게 들려준다.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九峯山)이라 불리워 오다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의 고승인 진표(眞表)율사가 신라 혜공왕 2년(776년)에 미륵 장육상을 주조하여 봉안하고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향하여 가던 중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달구지를 끌고 가던 소들이 율사를 보자 그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 주인은 달구지에서 내려 스님에게 연유를 묻는다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대체 스님은 누구란 말이오?”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중인데 일찍이 변산(邊山)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 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진성(眞性)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서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 어리석게 보일는지 모르나 속으로는 현명하게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끓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하고 답했다.

소 주인은 이 말을 듣고 나서 “짐승에게도 이러한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어찌 신앙심이 없겠는가?”하고 그 자리에서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율사는 그의 머리를 다시 곱게 깎아주고 계(戒)를 일러 주었다.

이제 함께 길을 떠나게 된 그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는 표시를 해두고 다시 명주(지금의 강릉)를 거쳐 금강산에 가서 발여사(鉢淵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표율사로 인하여 소달구지를 여의고 입산한 곳이라 하여 얻은 이름이 속리산인 것이다.


3.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법주사의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청동미륵대불상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정도로 웅대하다. 채1년이 되지 못한 청동미륵대불상이 법주사 경내의 유수한 문화재를 제치고 가장 주목 받는 바가 되어 있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과거에 비해 현재의 법주사 사세가 더욱 신장되었고, 그 원력 또한 지극함을 더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간 반가운 일이다. 남겨진 유물과 전수받은 사상에만 안주하지 않고 불법홍포를 위한 이와같은 노력과 원력이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법주사의 창건주는 의신(義信)조사다.

조사는 천축으로부터 법을 구하고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곳에 처음으로 절을 이룩했다고 동국여지승람은 밝히고 있다.

다시 그 시기를 신라 24대 진흥왕 14년(553년)으로 의신화상이 백나(白騾)에 경을 싣고 와 주한 고로 법주사(法住寺)라 칭했다고 조선불교통사는 말한다. 그후 신라 33대 성덕왕 19c(720년)에 중건을 보았고 고려 태조 원년 무인에 증통국사의 중건이 한 차례 있었다.

다시 조선 세조대왕이 즉위 자신이 지은 업보를 위하여 참회하고 불연에 가피를 입고자 법주사에 행차하던 중 청주의 혜각존자, 신미학조, 학열 등 제사(諸師)로 하여금 산내 암자를 중수케하였고 기도법회를 열었던 복천선원은 더욱 일신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속리산은 의병의 본거지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왜병들은 법주사를 포함한 산내 암자 등을 일시에 전소시켜 버렸다. 그랬던 것이 양종팔도도총 섭의승대장 벽암스님에의 발원으로 현재의 당우를 중창 복원하였다.

 

 해탈의 산 속리산에 부처님의 명호를 간직한 아홉 봉우리를 이고 있는 법주사는 애초에 의신조사로부터 천년미륵신앙의 원천지로 그 부리를 내려왔다. 삼국유사의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과 그에 의해 지어진 길상사(吉祥寺)와 법주사를 동일시할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진 못하지만 본 속리에 있던 법주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길상가람과 합쳐졌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진표율사가 속리산 골자기의 길상초를 보고 이곳이 무심한 곳이 아니었음을 감지, 영심법사에게 여기가 미륵용화대지임을 일러주어 길상사를 짓게 했던 것이니 양자는 법주사에 머문다는 그 법의 밑받침이 곧 미륵신앙이라는 이유가 된다.

미륵불은 법상종의 주존 부처님이시다. 그리하여 법주사는 진표율사가 개창한 금산사(金山寺)와 더불어 영심법사의 제자 심지(心地)가 열었다는 동화사(東華寺)와 함께 신라시대 중요한 법상종의 사찰로 여겨져 왔다.

백락천은 일생을 두고 법상종을 연구했지만 끝내 “뜻이 그윽하여 알기 어렵다”고 토론한 바 있다. 그러나 법상종은 미륵신앙의 구원론적 예언의 성질 덕분에 예부터 글 모르고 의지가 박약한 중생들에게 더 많은 친근감을 주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4.  미륵도량 법주사는 긴 세월 민족의 영락을 지켜보면서 자신에게까지 번져온 역사의 명암까지도 감수해내고 지금껏 건재한 미륵 자비광명으로 많은 중생을 안으로 보듬고 있다. 그래서 생겨난 많은 일화와 그윽한 속리산의 정기를 머금은 암자는 법주사보다 오히려 유명할는지 모른다.

 

법주사가 한창 융성했을 당시에는 승려 수가 삼천을 헤아렸으며 산내 암자 또한 이십여 군데나 되었음을 당시의 절터와 사적기는 알려준다. 그 암자 중 임진란을 거쳐 벽암 각성스님과 법주사와의 인연을 이어 큰절의 법당을 재창하고 그 암자까지 보수 창건하여 지금가지 보존하고 있는 암자는 복천암을 위시하여 다섯 군데가 불보살 현행도량으로 남아있다.

 

산내의 가장 큰 암자는 역시 복천암으로 십육나한님을 모신 나한전이 있고 거기서 오리쯤 구비능
성을 따라 고갯길 너머에는 중사자암이 있다. 아스라한 벼랑 밑에 위치한 이 암자는 인조 때 어명으로 재창하여 나라와 왕실의 호국염원을 담았다.

법주사는 이렇듯 무리 없이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많은 유물과 유적, 아기자기한 설화가 미륵신앙을 요체로 하여 지금까지의 발전을 이루어 왔음이다. 법주사 팔상전의 뜰을 미륵부처님은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다.

 

이제 겨우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예전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낯설지 않다. 청동미륵대불 회향식이 있던 날 하늘이 환하게 열리더니 오색
서광이 하늘을 수놓고 백광이 치솟아 올랐다. 많은 불자들에게 환희심을 불러 일으키고, 신심을 배전시킨 이적이었던 것이다.


재약산 표충사


1.  며칠 사이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 겨우내 나목으로 있으면서 밀생을 지속해나온 나무들이 날이 풀리자마자 파란 잎새를 달고 곁들여서 꽃망을 틔운다. 어느 사이엔가 얼어있던 땅이 풀리고 피어오르는 지애는 만산을 뒤덮는다.

언제라도 꼭 시간을 끊을 수 없는 시점에서 사람들이 느끼기도 전에 새잎이 돋아나고 꽃잎을 연다. 자연의 기운은 사람들의 교감보다 훨씬 앞서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생물이 새로운 삶을 열기 위하여 약동하는 기운이 산천의 변화와 초목의 변모를 통해 빠른 속도로 우리의 의식 속으로 달려온다.

차창을 스치며 지나는 산곡에는 벌서 분홍빛 진달래 꽃잎이 나슬거린다. 밀양역에 내려서 한 이십분 가량 달려갔을 때, 진달래꽃이 불긋불긋 수놓인 산곡이 차창으로 달려 왔다. 산곡에 걸린 청람(淸
嵐)은 어느덧 겨울의 산색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들에는 맑은 양광을 받으며 농부들의 일손이 분주했고, 아스팔트 큰길 가에 늘어서 있는 비닐하우스 속에는 키 큰 고추나무며 오이덩쿨이 여름을 연상케한다.

밀양은 고추재배단지로 이름이 높다. 강변에 나앉아 있는 영남루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그리고 아랑이라고 하는 규수의 모습도 떠오른다. 정절을 생명처럼 귀중하게 생각했던 아랑.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이 지닌 욕망이 제일 무서운 요소이고, 이 무서운 것을 서로서로 느끼고 또 그 무서운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내용으로 피어나 문화를 이루어 나가는 동력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재약산구를 향했다.

 

달리던 자동차는 분홍빛 진달래꽃이 나슬거리던 작은 산기슭을 돌고 고추재배단지가 있는 들을 가로질러 더 이상 달려갈 수 없는 산곡(山谷)에 다달았다.

  그곳이 재약산 입구였다.
  차에서 내리자 길가에 좌판을 놓고 더덕을 파는 한 촌노의 목소리가 길손을 맞았다.
  “손님예, 향내 좋은 이 산더덕 사가이소예.”
  노인의 음성치고는 카랑하다 싶은 목소리가 어깨를 넘어왔다.

  야단스러운 현대문명과 별 교류없이 유현한 산곡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던 관례, 혼례, 상례, 제례 같은 등등의 예를 소중한 가치로 높이 받들며 삶을 이어나온, 조금은 고풍스럽고 다소는 반문명적인 산골 노파의 카랑한 목소리가 이날따라 청량제처럼 길손의 마음을 흔들고 지나갔다.


2.  재약산(載藥山)은 바로 산구 위에 독수리처럼 날개를 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계곡을 건너는 사람을 앞부리로 찍어서 단숨에 넘어뜨릴 듯이 날카로우면서도 장중한 산세(山勢)로 길손을 지켜보
고 있었다. 아름이 넘는 상수리나무가 길 한옆으로 도열해 있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잡목들도 그 수령만은 몇 백년을 상회하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사명선사 호국영지 표충사’라고 쓰인 플랜카드가 입구에 걸려 흔들리고 있었다. 표충사는 몇 해 전에 보았던, 퇴락해가는 사찰의 면모가 아니었다.

서산, 사명 등 영정을 모신 전각과 유물관의 모습이 깨끗하게 새로 단장된 것이었다. 경내지도 말끔하게 조경이 되어 있었다.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구천리에 자리잡고 앉은 표충사는 고려조에만 해도 대단한 사찰이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스님이 표
충사에 주석하며 삼국유사의 완간을 위해 정진할 때만 해도 1천여 대중이 총림을 이루며 살았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되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 이후에도 전국 사찰의 규정을 담당할 정도로 사세가 컸으며, 조선 선조 이후에는 동방제일선찰(東方第一禪刹)로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이 표충사에 주석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표충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던가에 대해서 넉넉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표충사가 세워지기는 신라 태종 무열왕 원년인 654년의 일이다. 진덕여왕이 태종무열왕에게 왕권을 넘긴 해이므로 진덕여왕 8년이 되기도 한다. 이때의 절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였다고 한다. 지금도 죽림사라고 할만큼 청정한 대나무숲이 법당 뒤에 무성하다. 그러다가 흥덕왕(興德王) 4년에는 인도스님 한분이 부처님 진신사리를 가지고 이 죽림사에 들어와서 부처님 사리를 봉안할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후 조선조 숙종 때 탄영(坦永)과 도한(道閑)이 중창했으며, 헌종 10년 사명대사의 충훈을 추모하고자 사당을 이 곳에 건립하고부터 표충사라고 개명했다 한다. 그러나 헌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명대사의 충훈에 대한 우리 국민의 생각도 미미했고 또 그 분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국가의 의지도 미미하여, 표충사에 대한 국민적 의식은 극히 쇄잔한 내용이었다. 이순신 장군에 비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 위업을 남겼지만, 사명대사에 관한 국민적 의식은 아주 미미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명대사의 업적을 한번 상고해 볼 필요를 느낀다. 선조 25년, 그러니까 임진년 4월,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풍신수길의 독전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쳐 왔을 때, 이율곡의 양병설을 무시했던 조정은 마치 풍전등화와 같은 지경에 처했다.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했으며, 왜군은 서울과 평양을 점령, 전 강토는 왜놈들의 말발굽에 유전되었다.

이 때 사명대사는 분연히 몸을 떨치고 일어나 승군을 지휘, 평양을 탈환, 풍전등화와 같은 위난에 처해 있던 나라를 건졌다. 사명대사는 7년 동안 팔도도총섭의 승군대장의 직책을 맡아 수십만석의 군량을 비축하고 산성을 재건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았으며, 정유년에는 선조의 특사로 일본에 건너가 덕천가강과 향후 3백년간 재침이 없도록 강화조약을 맺고 귀국하는 길에 4천여명이 넘는 우리 동포를 송환해 오기도 했다.

선조는 이와 같은 사명대사의 위업을 기리고자 정 2품 자헌대부증추부사 형조판서 의금부사를 재수했으며, 갑진년에 들어서는 영의정의 직책가지 재수했으나 이를 사양한 사명대사는 본분사를 위해 가야산으로 돌아가 수행의 나날을 보냈다. 사명대사는 가야산에서 소요자재하는 삶을 살다가 67세에 입적했다.


3.   잊혀져 가고 묻혀 가던 표충사가 새로운 면모로 단장을 하고, 사명대사의 충혼의 듯을 기리고자 하여 표충사 복원불사를 일으킨 이지은 스님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는 경이를 맞고 있다. 1984년에 표충사 주지로 부임한 이지은스님은 ‘사명선사 호국성지 표충사 복원불사’를 추진, 1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동안 줄기차게 불사를 진행할 계획을 세우고 금년까지 7년 동안 23억원이나 되는 정재를 투입, 21동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복원하여 세인의 눈을 크게 열었다.

이지은스님은 교계에 명망이 널리 알려진 스님도 아니요, 흔한 중앙종회의원이라는 이름 하나 걸고 있는 스님도 아니다.그런데 84년에 이 표충사에 주지로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묵묵히 표충사 복원불사를 단신으로 추진, 14억여원에 달하는 공사비를 마련, 대대적인 성역화작업을 지속해 나왔다.

경내에 산재해 있는 팔상전, 대광전, 원통저, 사천왕문, 삼청각, 강원공야실, 우화루, 수충루, 사당, 유물관, 서래각, 서원, 종루 등 무려 21동에 이르는 건물을 개축하고 보수했다. 그동안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은 9억여원이었고, 나머지 13억여원은 표충사 현 주지인 이지은스님의 원력과 동참재자들의 시은으로 충당되었다.

표충사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뜻은 우선 사명대사의 위업을 오늘에 기리고 동시에 우리국민들이 잊어가고 있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 의지와 민족혼을 일으키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자라나는 이 나라의 새싹들에게 자주적인 의지와 민족혼을 불어넣어 건강한 국민, 올바른 사고와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국민으로 그 정신을 승화시킬 수 있는 도량으로 만들어 보기 위해서이다.

“사림이 자기의 한 생애를 걸고 매진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원효스님처럼 깊은 사상체계를 정립하여 사람들의 정신을 높이는 길도 있을 것이며, 사명스님처럼 용기와 기백을 가지고 당당하게 적과 맞서서 파사현정을 해나감으로써 정의가 살아 숨쉬는 살기 좋은 땅을 이룩하는 길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역시 이 한 몸을 바쳐서라도 이 표충사 성역화를 완결해보고 싶습니다..”

이지은스님의 의지는 대단하다. 무려 8년동안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입장에서 묵묵히 대작불사를 추진시켜 나왔다. 이제 남은 불사는 의중당, 규정소, 예제실, 일주문, 장판각, 표충비각, 효몽대사부도, 산문, 홍살문, 충혼탑, 대웅전, 영각상, 노전, 응진전, 선원, 삼층석탑봇, 금당만일루, 단월당, 사적비 등 20여 동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의 개수이다.

표충사 복원불사가 모두 끝나면 9천7백40평의 대지 위에 51동의 당우와 전각이 들어서 참으로 은성한 대가람이 모습을 갖는다. 지금 현재는 32동에 달하는 전각과 당우를 보수하거나 축소했다. 불사의 마무리를 93년으로 잡고 매일 같이 토목공사를 하고 못질을 하고 기둥을 일으켜 세운다. 전각 한 채, 당우 한 동을 신축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20여동이나 되는 건물을 일으켜 세우는데는 적지 않은 경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머지 불사에 소요될 경비를 대략 39억원으로 잡고 있는데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불사가 끝나면 청소년 수련장을 통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정신승화를 위한 수련이나 교육에 많은 노력을 쏟을 것이라고 한다.

 

재약산을 바로 머리위에 이고 앉아 있는 표충사. 표충사가 사명성사 호국성지 복원사업 10개년 계획을 가시화하여 우리의 눈앞에 완전히 펼쳐 놓은 날, 지금의 표충사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사의 현장에서 일을 주선해 나가는 주역들은 남이 알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전국에 있는 불교도들의 관심이 이런 일에 모
아졌으면 싶다.


두륜산 대흥사


1.  반도의 최남단 해남에서는 마치 봄으로 인한 열병이라도 치루고 있는 듯 보였다. 매서운 바람으로부터 풀려난 해방감에 모든 자연은 긴장을 풀어 마냥 나른하게만 느껴진다. 따스한 햇살이 세포 하나하나의 간격을 벌려서 마음껏 자연을 호흡하게 해주고 간혹 불어오는 싱그런 봄내음은 사람의 감성을 마구 흔들어 놓는 그런 길이 언제가지라도 이어질 듯 대흥사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인적이 많은 것도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어서일까. 좀처럼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남의 봄기운은 이렇듯 침묵이 흐르는 파문 속에서 각자의 성장을 위해 내면을 살펴야만 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속에서는 단지 의식의 흐름만을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의식 외에 또 다른 움직임을 찾는 노력은 인간이 지닌 어쩔 수 없는 그리움. 이러한 그리움의 극복은 곧 바로 자신의 내면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해결되어지는 것이리라.

의식 저편에 일단 묻어두었던 의문점들이 하나 둘 망령처럼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는 자신의 경험과 간접경험을 총동원해 보는 작업이 시작되고, 이것은 곧 자신이 이전에 경험했던 법주를 넘어선 새로운 의식작용을 도출해 내는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지식 아닌 지혜의 탄생이며 일련의 삼매에서 얻어진 즐거움이다. 새봄을 맞으면서 이만한 깨달음 하나 얻지 못한다면 이 봄은 그저 지나쳐가는 무의미한 시간의 편린에 불과할 뿐이다.


2.  목적지 대흥사를 향하여 남으로 계속된 발길이 잠시 머문 곳은 윤고산 유적지다. 고산의 고택인 녹우당이 조상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하는 이들을 맞아들여 아련한 향수를 전해준다. 아담한 뜰과 녹우당을 둘러싼 뒷동산에는 고산 선생부터 대를 이어 심고 가구어온 비자나무숲과 동백보리밥나무, 남오미나, 참식 등의 상록수가 바람과의 유희를 즐기고, 향긋한 춘란이 핀 안뜰에 서면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즉흥의 멋을 즐기는 정철에 반해 작흥의 윤선도는 흔히 두보와 비교해 평가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고, 해남의 두륜산 아랫자락에서 즐겼을 고산의 풍류를 비로소 이 곳에 와서야 가슴으로 전해지는 감상만은 녹우당에 잠시라도 머물러 본이의 차지다.

기어이 떨치고 가야만 하는 대흥사로의 10리 가까운 숲길은 의식과는 무관하게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황홀하기까지하다. 이러한 대흥사의 입구는 쌍계사 입구, 해인사 입구와 더불어 절경을 자랑한 지 오래다.

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는 소백산의 정기를 이은 두륜산(頭輪山) 자락에 오랜 세월 굳건한 지킴을 해온 내력을 차곡차곡 쓸어안고 있는 곳이다. 서쪽으로 진도를, 동쪽으로 강진을 접한 이곳 해남에는 대둔산(大芚山)을 중심으로 대흥사 외에도 석두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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