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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무진스님 부적연구소 | Since 1999 &amp;gt; 불교입문 &amp;gt; 부록</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link>
<description>부적은 인간이 처음 탄생하여 자연의 재앙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면서 부터 사용되어 온 것으로 인간의 태생 이래 수천년을 내려오는 염원을 형상화한 신과 인간의 대화코드이자 방편으로써 1999년에 창설한 이 곳, [무진스님 부적연구소]에서 맺은 수많은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item>
	<title>신심명(神心銘) 강설 (1-10)</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21</link>
	<description><![CDATA[<p><strong>1)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至道無難이요 唯嫌簡擇니</strong></p>
<p>                                                                                         (지도무난)      (유혐간택)</p>
<p>지극한 도(道)란 곧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말합니다. 이 무상대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으므로 오직 간택(簡擇)하지 말아라는 말입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이니,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극한 도는 양변(兩邊), 즉 변견(邊見)에 떨어져 마침내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p>
<p> </p>
<p>세간법(世間法)은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며, 마구니(魔軍)를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취하거나 버릴 것 같으면 실제로 무상대도에 계합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무상대도를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 한 것입니다.</p>
<p> </p>
<p><strong>2)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 但莫憎愛하면 洞然明白이라. </strong></p>
<p><strong>                                                           </strong>(단막증애)      (통연명백)<br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툭 트여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미워하며, 불법을 좋아하고 세간법은 미워하는 증애심(憎愛心)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br /></p>
<p>그러므로 누구든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즉 증애심입니다. 이 증애심만 완전히 버린다면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네 구절이 바로 「신심명」의 근본 골자입니다.<br /></p>
<p>임제정맥으로서 낭야 각(瑯若覺) 선사라는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에게 어느 재상이 편지로 “신심명은 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지극한 보배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 자세한 주해(註解)<br />를 내려주십시오.”하고 부탁했습니다.<br /></p>
<p> </p>
<p>그랬더니 낭야 각선사가 답하기를 ‘ 至道無難이요 唯嫌簡擇이니 但莫憎愛하면 洞然明白이라’라는 첫 구절만 큼지막하게 쓰고 그 나머지 뒤 구절들은 모두 조그맣게 써서 주해로 붙여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뜻이 무엇일까요? 「신심명」의 근본 골수는 크게 쓴 구절 속에 다 있으므로 이 구절의 뜻만 바로 알면 나머지 구절들은  모두 이 구절의 주해일뿐, 같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낭야 각선사가 앞 네 구절의 뜻만 바로 알면 나머지 구절들은 모두 이 구절만 크게 쓰고 뒤 구절은 주해로 써서 답장한 이<br />것은 「신심명」에 대한 천고의 명 주해로서, 참으로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br /></p>
<p>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신심명」을 바로 알려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증애심만 떠나면 중도정각(中道正覺)입니다. 대주스님은 「돈오입도요문」에서 ‘증애심이 없으면 두 성품이 공하여 자연히 해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네 구절이 「신심명」의 핵심이고 뒤 구절들은 더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낭야 각선사의 말씀처럼 뒤 구절들은 주해의 뜻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p>
<p> </p>
<p><strong>3)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사이로 벌어지나니,毫離有差하면 天地懸隔하나니.                                                                       </strong>(호리유차)      (천지현격)<strong> </strong> </p>
<p>‘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과 미워하고<strong> </strong>사랑하는 마음만 버려라.“고 하니, ”아, 그렇구나, 천하에 쉽구나!“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이 뜻을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알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차이가 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아주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p>
<p> </p>
<p><strong>4)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欲得現前이어든 莫存順逆하라.                                                                     </strong>(욕득현전)         (막존순역) </p>
<p>“무상대도를 깨치려면 따름(順)과 거슬림(逆)을 버리라”한 것입니다. “따름”과 “거슬림”은 상대법으로서, 따른다 함은 좋아한다는 것이고, 거슬린다 함은 싫어한다는 것이니 이는 표현<br />은 다르나 “싫어하고 좋아한다”는 것이고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데, 지극한 도를 얻으려면 따름과 거슬림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p>
<p> </p>
<p><strong>5)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違順相爭이 是爲心病이니.</strong></p>
<p>                                                                                       (위순상쟁)   (시위심병)</p>
<p>어긋난다. 맞는다 하며 서로 싸운다면, 이것이 갈등이 되고 모순이 되어 마음의 병이 된다는 말입니다.</p>
<p> </p>
<p><strong>6)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不識玄旨하고 徒勞念靜이로다.                                                                       </strong>(불식현지)      (도로염정)<br />“참으로 양변을 여읜 중도의 지극한 도를 모르고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하고자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대도를 성취하려면 누구든지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생각해야지, 다른 방법은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p>
<p> </p>
<p>이 대도(大道)라는 것은 간택심(簡擇心)ㆍ증애심(憎愛心)ㆍ순역심(順逆心)을 버리면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분주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안 된다라고 하니 그러면 분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혹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움직임과 고요함 이 두 가지가 다 병으로서 움직임이 병이라면 고요함도 병이고 어긋남이 병이라면 맞음도 병입니다.<br /></p>
<p>왜냐하면 이 모두가 상대적인 변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br />를 버려야 대도에 들어가게 됩니다.</p>
<p> </p>
<p><strong>7)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어늘</strong> </p>
<p>                                                                                         (원동태허)       (무흠무여)<br />“지극한 도는 참으로 원융하고 장애가 없어서,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즉 융통자재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음을 큰 허공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음도 없습니다.<br /></p>
<p>지극한 도란 누가 조금이라도 더 보탤 수 없고 덜어낼 수도 없어 모두가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바로 깨칠 뿐 증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극한 도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p>
<p> </p>
<p><strong>8)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良由取捨하야 所以不如라</strong><br />                                                                                         (양유취사)      (소이불여)<br />“지극한 도는 취하려 하고, 변견은 버리려 하는 마음이 큰 병이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변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나도 할 수 없어서 중도를 많이 얘기하지만 그 말을 듣고 중도를 취하려 하고, 변견을 버리려 하면 이것이 큰 병이라는 뜻입니다. </p>
<p> </p>
<p>혹 변견은 취하고 중도를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병은 마찬가지로서 무엇이든지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큰 병입니다. 대도에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라고 남는 것이 없지만, 우리가 근본 진리를 깨치지 못한 것은 취하고 버리는 마음, 즉 취사심(取捨心)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는 것도 취사심이며, 불법을 버리고 세속법을 취하는 것도 취사심으로서 모든 취하고 버리는 것은 다 병입니다. <br /></p>
<p>때문에 “취사심으로 말미암아 여여한 자성을 깨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여한 자성”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취사심을 버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p>
<p> </p>
<p><strong>9)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莫逐有緣하고 勿住空忍하라</strong><br />                                                                                             (막축유연)      (물주공인)<br />‘있음의 인연(有緣)’이란 세간법과 같은 말로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상일이라는 뜻입니다. 공의 지혜(空忍)란 곧 출세간법이라는 뜻입니다. 인연이 있는 세상일도 쫓아가지 말고 출세간법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머물지 말라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있음(有)에 머물면 이것도 병이고, 반대로 공함에 머물면 이것도 역시 병이라는 말입니다.<br /></p>
<p>그러므로 있음을 버리고 공함을 취하거나, 공함을 버리고 있음을 취한다면 이것이 취사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세간의 인연도 버리고 출세간법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p>
<p> </p>
<p><strong>10)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strong><br />                                                                              (일종평회)      (민연자진)<br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억지로 가리킨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양변을 떠나면 바로 중도(中道)가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가리키므로 일체 만법이 여기에서 다해 버렸으며, 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한다’고 했다 해서, 무엇이 영영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다 한다’는 것은 일체 변견이, 일체 허망(妄)이 다 하였다는 것입니다. </p>
<p> </p>
<p>그리고 바로 거기서 항하사(恒河沙) 같은 진여묘용이 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 인연을 쫓지도 않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현전하여 일체 변견이 다하고 항사묘용(恒沙妙用)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p>]]></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1:07:45 +0900</dc:date>
	</item>
	<item>
	<title>신심명(神心銘) 강설 (11-20)</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20</link>
	<description><![CDATA[11) <strong>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止動歸止하면 止更彌動하나니</strong>.                                                                                          (지동귀지)      (지갱미동)<br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돌아가려 하면, 고요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br />  <br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제일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탠 것이 아니겠습니까? <br /><br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고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 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 되는 모양입니다.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된다는 뜻입니다. <br />  <br /><strong>12)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가지임을 알 건가. 唯滯兩邊이라 寧知一種가<br /></strong>                                                                                      (유체양변)      (영지일종)<br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動)이는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br />  <br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br />  <br /><strong>13) 한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一種不通하면 兩處失功이니<br /></strong>                                                                                  (일종불통)      (양처실공)<br />‘일종(一種), 즉 자성청정심ㆍ진여자성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br />  <br /><strong>14)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                                                                             </strong>(견유몰유)   (종공배공)<br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말씀입니다.<br />현상(有)이 싫다고 해서 현상을 버리려 하면 버리려는 생각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현상에 빠지고, 본체(空)가 좋다하여 공을 좇아가면 본체를 더욱 등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br />  <br />공이란 본래 좇아가거나 좇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공을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공과는 더욱 등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현상을 버리고서 공을 따르려고도 하지 말며, 반대로 본체를 버리고서 현상을 따라 갈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두 가지 모두가 양변이며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취사심을 버려야만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br />  <br /><strong>15)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多言多慮하면 轉不相應이요</strong><br />                                                                                   (다언다려)      (전불상응)<br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설명하고 거듭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래 대도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 心行慮滅)‘입니다.  <br />  <br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도(大道)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점점 대도에서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16)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絶言絶慮하면 無處不通이라<br /></strong>                                                                                            (절언절려)       (무처불통)<br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곳에서는 자연히 대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과 생각이 끊어진’ 여기에 집착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곳’이 아니라, 정말로 통하지 않아 아주 모르게 됩니다. 이 ‘말과 생각이 끊긴 것’은 그 자취마저 없는데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br />  <br />이 경지에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면 전체가 막히고 맙니다. 여기서도 근본은 취사심을 버려야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17)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br /></strong>                                                                                                (귀근득지)   (수조실종)<br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ㆍ업식을 망정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18)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 보다 뛰어남이라. 須有返照하면 勝却前空이라<br /></strong>                                                                                             (수유반조)      (승각전공)<br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했으니 공하지 않느니’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br />  <br /><strong>19)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前空이 轉變은 皆由妄見이니<br /></strong>                                                                      (전공)   (전변)   (개유망견)<br />앞에서의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18공(十八空)ㆍ이십공(二十空)등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뜻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 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br />  <br /><strong>20) 참됨을 구하려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라.<br /></strong>                                                                                  (불용구진)      (유수식견)<br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br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br /><br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견이란 무엇일까요?]]></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1:09:02 +0900</dc: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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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심명(神心銘) 강설 (21-30)</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19</link>
	<description><![CDATA[<strong>21)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二見에 不住하야 愼莫追尋하라.<br /></strong>                                                                            (이견)   (부주)     (신막추심)<br />두 가지 견해는, 즉 양변의 변견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변에 머물러 선악ㆍ시비ㆍ증애 등 무엇이든지 변견을 따르면 진여자성은 영원히 <br />모르게 됩니다. <br />  <br /><strong>22)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amp;#32404;有是非하면 紛然失心이니라</strong>                                                                                           (재유시비)      (분연실심)<br />갖 시비가 생기면 자기 자성을 근본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자기의 진여자성을 구하려고 하지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고 했는데, 그 망령된 견해란 곧 양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양변을 대표하는 시비심(是非心), 즉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을 들어 망견이라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br /><br />누구든지 불법이 옳고 세법이 그르다든지, 반대로 세법이 옳고 불법이 그르다든지 하는 시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큰 병입니다. 우리가 실제의 진여자성을 바로 깨쳐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이 시비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견을 쉬고 양변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비심을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법(相對法)의 전체가 다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br />  <br /><strong>23)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二有一有니 一亦莫守하라</strong> <br /><strong>                                                                         </strong>(이유일유)   (일역막수)<br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하나마저도 버려버리라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알았다 해도 중도가 따로 하나 존재한다고 하여 여기에 집착하면 병은 마찬가지입니다. <br />  <br />그러므로 하나 때문에 둘이 있으니, 하나 마저도 지키지 말고 버려라, 곧 중도마저도 버리라 하였습니다. 중도는 무슨 물건이 따로 존재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떠나서 융통자재한 경지를 억지로 표현해서 하는 말입니다. <br />  <br /><strong>24)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 법이 허물없느니라. 一心不省하면 萬法無垢니라</strong> <br />                                                                          (일심불생)       (만법무구)<br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만법이 원융무애하여, 아무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융통자재를 말한 것으로서 사사무애(事事無碍)ㆍ이사무애(理事無碍)의 무장애법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어디서 성립되느냐 하면 바로 양변을 여읜 중도에서 성립됩니다. 즉 시비심의 두 견해를 버리고, 하나마저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br />그래야만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일체만법에 통달무애한 무장애법계가 벌어져 일체에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른바 ‘허물이 없다’고 합니다. <br />  <br /><strong>25)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無垢無法이요 不生不心이라                                                                             </strong>(무구무법)      (불생불심)<br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허물도 없고 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있어서 원융무애한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이 경지는 허물도, 법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허물도 변(邊)이고, 법도 변(邊)이며, 나는 것도 변이며, 마음이라 해도 변입니다. 이 모두가 없으면 중도가 안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br />  <br /><strong>26)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能隨境滅하고 境逐能沈하야<br /></strong>                                                                                             (능수경멸)      (경축능침)<br />능(能)은 주관을, 경(境)은 객관을 말합니다. 주관은 객관에 따라 없어져 버리고 객관은 주관을 쫓아 흔적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니.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이 남아 있으면 모두가 병통이라는 말입니다. <br />  <br /><strong>27)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境由能境이요 能由境能이니                                                                             </strong>(경유능경)    (능유경능)<br />객관은 주관 때문에, 주관은 객관 때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이 없으면 객관이 성립하지 못하고 객관이 없으면 주관이 성립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병이므로 주관ㆍ객관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28) 양단을 알고저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欲知兩段인댄 元是一空이라<br /></strong>                                                                          (욕지양단)     (원시일공)<br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두 가지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원래 전체가 한가지로 공(空)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관도 객관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근본 대도인데, 주관ㆍ객관을 따라<br />간다면 모두가 생멸법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br />  <br />그러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만 대도에 들어오게 되는데 양단이 모두 병이고 허물이므로 이것을 바로 알면 전체가 다 공했더라는 것입니다. ‘공했다’는 것은 양변을 여읜 동시에 진여가 현전한 것을 말합<br />니다. 그러면 공했다고 한 그 하나의 공은 말뚝처럼 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br />  <br /><strong>29)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一空이 同兩하야 齊含萬象하야                                                                      </strong> (일공)  (동양)      (제함만상)<br />앞에서 ‘공했다’고 하여, 아주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줄로 알아서는 크게 어긋나니 이는 단멸의 공(斷空)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아서 두 가지가 다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의 공이란 차(遮)로서 부정을 말하고 양단과 같다는 것은 조(照)로서 긍정을 말합니다. <br />  <br />‘양단을 버리면 하나의 공이 된다’라는 것은 양단을 부정하는 동시(雙遮)에 양단을 긍정한다(雙照)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둘을 버리고 하나가 되면 그 하나가 바로 둘이라는 것입니다.이처럼 하나의 공이 둘과 동일하게 원융무애하므로 완전히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체의 삼라만상이 하나의 공 가운데 건립되어 있다고 하는 뜻이 됩니다.<br /><br />결국 우리가 변견을 떠나 자성을 깨치고 중도를 성취하면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어 삼라만상과 항사묘용이 여기에 원만구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空)이라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일체가 원만구족한 것을 공이라 하며 공이 또 공이 아니어서(不空), 일체 삼라만상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30)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不見靜粗어니 寧有偏黨가</strong><br />                                                                                              (불견정추)       (영유편당)<br />앞 구절에서 “하나의 공”이란 공공적적(空空寂寂)하여, 일체의 명상(名相)이 떨어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으므로 일체 삼라만상 그대로<br />가 중도 아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도 중도 아님이 없으므로 사사무애(事事無碍)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br /><br />그러나 여기서 차별이 벌어진다고 하니 어떤 실제의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차별이 벌어져 드러났다 하여도 거기에 세밀함과 거칠음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br />는 것입니다.<br /><br />공이 곧 공이 아니며, 공 아님이 곧 공이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여전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산이라느니, 물이라는 생각은 산은 높고 물은 푸르다는 등 이러한 견해가 있으면 ‘한가지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1:09:5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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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심명(神心銘) 강설 (31-40)</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18</link>
	<description><![CDATA[<strong>31)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大道體寬하야 無易無難이어늘<br /></strong>                                                                                    (대도체관)      (무이무난)<br />무상대도는 그 본바탕이 넓기로는 진시방무진허공(十方無虛空)을 여러 억천만 개를 합쳐 놓아도 그 속을 다 채우지 못합니다. 이 같은 무변허공(無邊虛空)이라 해도 실제로는 이 자성에다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도의 본체는 바탕이 넓다’고 한 것으로서 무궁 무진하고 무한무변한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br /><br />‘대도의 본체는 넓어서 어려움도 없고 쉬움도 없다’한 것은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으므로 조금도 어렵다거나 쉽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대법이든 무엇이든 지간에 우리가 공부해서 성취할 필요가 없지 않는 거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br /><br />우리가 대도를 성취하려면 참으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므로 쉬운 것도 역시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두 중생이 변견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 대도를 모르고 하는 말이므로 이러한 쓸데없는 지견(知見)은 모두 버려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32)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小見이 狐疑하야 轉急轉遲로다                                                                          </strong>(소견)   (호의)     (전급전지)<br />조그마한 견해로 여우처럼 자꾸 의심하며 급하게 서둘면 반대로 더욱 더디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대도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데, 이를 자꾸 가깝게 하려 하면 더욱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므로 누구든지 대도를 성취하려면 쉽다는 생각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br />  <br />왜냐하면 쉽다ㆍ어렵다ㆍ더디다 하는 등이 모두가 변견으로서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취사심을 버려야만 성취한다는 의미합니다. <br />  <br /><strong>33)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執之면 失度라 必入邪路요<br /></strong>                                                                                        (집지)   (실도)   (필입사로)<br />대도나 중도나 또는 다른 뭐라고 하든지, 이를 집착하면 병이 됩니다. 누구든지 중도를 성취하고 부처를 이루려면 집착하는 병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착이 있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병이 있으면 법도를 잃고 근본 태도와는 어긋나서 반드시 삿된 길, 즉 변견에 떨어지게 됩니다. <br />  <br /><strong>34)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放之면 自然이니 體無去住라.                                                                         </strong>(방지)    (자연)      (체무거주)<br />홀연히 집착을 놓아 버리면 모두가  자연히 현전하며 본래는 본래 가는 것도 머무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머무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으면 머무는 것이 있습니다. <br />  <br />그러나 대도는 본래 원만구족 하여 머무름과 가는 것이 떨어졌기 때문에 집착하는 생각만 완전히 놓아버리면 자연히 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인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35)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하며 번뇌가 끊기고. 任性合道하야 逍遙絶惱하고<br /></strong>                                                                                     (임성합도)      (소요절뇌)<br />모든 집착심을 놓아 버리면 자기의 자성을 따라서 그대로 도에 합합니다. 이는 마치 구슬이 쟁반에서 구르듯이 힘 안들이고 마음대로 활동하여 아무런 장애도 없습니다.소요(逍遙)란 한가롭고 자재한 기상을 말하는데, 일체 번뇌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br />  <br /><strong>36)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혼침함이 좋지 않느니라. 繫念하면 乖眞하야 昏沈이 不好니라.                                                                  </strong>(계념)       (괴진)     (혼침) (불호)<br />우리가 모든 집착심을 놓아버리면 대도가 현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번뇌망상은 그만두고, 대도ㆍ중도ㆍ부처라는 등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생각이 얽매이면 바로 진리와는 어긋나므로, 중도도 깨져 버리고 부처도 죽어 버리게 됩니다. <br />  <br />그러므로 누구든지 부처라는 생각과 중도라는 생각, 참되다는 생각 등 어떤 생각이든지 이런 생각이 추호라도 마음에 남는다면 근본은 모두 깨지고 맙니다. 이처럼 생각에 얽매이지 말라 했다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멍텅구리처럼 앉아만 있으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각에 얽매여도 병이고, 혼침해도 병이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37) 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건가. 不好勞神커든 何用疎親가<br /></strong>                                                                                                (불호노신)      (하용소친)<br />쓸데없이 정신을 쓰지 말아라. 정신을 쓰면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어찌 성김과 친함을 쓸가보냐’하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김이란 멀리한다는 뜻이니 세간법과 악을 버림이고, 친함이란 가까이 한다는 뜻으로서 세간법과 악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려 하지도 말며, 세간법을 버리고 불법을 취하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리하여 양변ㆍ변견을 버리지도 취하지도 않을 때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38)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欲趣一乘이어든 勿惡六塵하라.<br /></strong>                                                                                   (욕취일승)          (물오육진)<br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일승(一乘)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무상대도를 성취하려거든 객관의 대상인 육진을 버리지 말며 미워하지도 말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진 이대로가 전체로 진여대용이기 때문입니다. <br />  <br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육진이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육진이 아니라, 진여대용의 육용(六用)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 집착심을 가지면 육진이 되고 눈 밝은 사람이 바로 쓰면 육용(六用)으로써 진여의 대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진을 버리고서 어찌 무상대도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 말입니다. <br />  <br /><strong>39)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동일함이다. 六塵을 不惡하면 還同正覺이라.<br /></strong>                                                                                   (육진)   (불오)     (환동정각)<br />진여대용인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바로 정각(正覺)이라는 말입니다. 육진을 버리고 정각을 성취하려는 사람은 마치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육진을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40)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智者는 無爲어늘 愚人은 自縛이로다.                                                          </strong>           (지자)   (무위)    (우인)     (자박)<br />지혜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도가 현전하여 버릴래야 버릴 것이 없고, 취할래야 취할 것이 없는데,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잘 모르는 사람은 공연히 취하려고 애쓰며 버리려고 고생을 합니다. <br />  <br />어리석은 사람은 근본 대법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취사심에 묶여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지옥으로 갔다 극락으로 갔다하며 온갖 전도(顚倒)를 거듭합니다.그러면 ‘본래 스스로 함이 없다(本自無爲)’고 하여 손도 꼼짝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이것도 무위법에 떨어진 것이 됩니다. <br />  <br />‘함이 없다(無爲)’고 했지만 실제는 함이 없는 것을 찾아 볼 수도 없고 중도를 깨쳐도 중도도 찾아볼 수 없는 구경에서 하는 말이지, ‘함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br />]]></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1:10:4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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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심명(神心銘) 강설 (41-50)</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17</link>
	<description><![CDATA[<strong>41)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어 스스로 애착하여. 法無異法이어늘 妄自愛着하야.<br /></strong>                                                                                 (법무이법)          (망자애착)<br />법은 다른 법이 없어서 중생이 생각하고 집착할 특별한 법이 없는데 공연히 스스로 애착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세법을 버리고 불교를 해야겠다. 교학을 버리고 참선을 해야겠다. 반대로 참선하면 무슨 소용 있나, 교(敎)나 하자 하는 것 등이 모두 애착입니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선이니, 교니, 중생이니, 부처니. 마구니니 하는 분별들은 모두 망견인 변견으로서 애착심입니다. 그러니 그 모두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42)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라. 將心用身하니 豈非大錯가.<br /></strong>                                                                                         (장심용신)      (기비대착)<br />‘쓸데없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고 있으니 어찌 크게 잘못됨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알고 보면 우리가 성불하려고 애를 쓰고, 참선하려고 애를 쓰고, 경을 배우려고 애를 쓰는 것 전부가 마치 머리 위에 머리 하나를 더 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br />  <br />우리가 추구하는 대도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서 그 진여광명이 일체에 현성(現成)해 있으므로,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고 숨을래야 숨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으로 잡으려 하고 성취하려고 하면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잘못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br /><br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만, 그러나 깨쳤다는 생각도 병입니다. 더구나 깨치지 않았다면 참으로 집착심을 떠날 수 없는 것이므로, 깨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고서는 광명을 볼 수 없듯이 깨치지 못하면 밤낮으로 현전한 이 진여광명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br />  <br /><strong>43)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迷生寂亂이요 悟無好惡어니                                                                            </strong>(미생적란)       (오무호오)<br />미혹할 때는 고요함과 혼란함이 생기나 깨치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좋다ㆍ나쁘다 하는 감정은 취사심이므로 미혹할 때는 집착심이 있지만 깨치면 취사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44)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一切二邊은 良由斟酌이로다.<br /></strong>                                                                                     (일체이변)   (양유짐작)<br />모든 치우친 두 가지 견해, 즉 양변을 다 버려야만 무상대도인 일승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우리가 쓸데없는 생각과 계교심을 일으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진다는 것입니다. 본래 법에는 양변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마음으로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분별을 내는 것을 짐작(斟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짐작인 취사심만 버리면 전체가 현전하여 대도(大道)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45) 꿈속의 허깨비와 헛 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夢幻空華를 何勞把捉가.<br /></strong>                                                                                   (몽환공화)   (하로파착)<br />‘꿈속의 허깨비와 헛 꽃’은 일체의 변견을 말합니다.성불하려는 것도 꿈속의 불사(佛事)이니, 성불한다는 것도 중생 제도한다든지 하는 것도 모두 꿈, 이미 헛 꽃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니 부처님 하는 생각과 불법이니 세법이니 하는 것도 다 놓아 버려야 하는데, 왜 이를 잡으려고 애를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46)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라. 得失是非를 一時放却하라.</strong><br />                                                                          (득실시비)   (일시방각)<br />잘 잘못과 옳고 그름 모두가 변견이니, 이러한 양변을 완전히 버리면 중도가 현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47) 눈에 마음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眼若不睡면 諸夢自除요.</strong><br />                                                                                   (안약불수)   (제몽자제)<br />누구든지 잠을 자지 아니하면 꿈은 없는 것입니다. 꿈은 누구든지 잠을 자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48)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느니라. 心若不異면 萬法一如니라.</strong><br />                                                                         (심약불이)    (만법일여)<br />마음에 다른 생각인 차별심ㆍ분별심을 내지 않으면 만법이 여여(如如)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br />만법이 본래 여여한데 우리가 여여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은 바로 마음에 분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여여한 것을 우리가 억지로 여여치 않게 할 수도 없는 것이며, 여여치 않은 것을 여여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만법이 본래 한결 같아서 여여부동(如如不動)한데도 그것을 보지 못함은 중생의 마음 속에 분별심이 있기 때문이므로 마음 가운데서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전혀 분별심이 없으면 ‘만법이 한결 같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49) 한결 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一如體玄하야 兀爾忘緣하야.</strong><br />                                                                                     (일여체현)      (올이망연)<br />‘일체 만법이 여여하다’는 것은 그 본체가 현묘하기 때문입니다. 현묘한 본체는 석가가 아무리 알았다 해도 실지로 알 수는 없으며, 달마가 전했다 해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석가도 알지 못하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을 건가(釋迦猶未會이니 迦葉 能傳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br />  <br />정말 알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그럼 석가가 깨치고 가섭에서 전했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알고, 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전하는 것이 불교의 묘법이니, 이것이 참으로 현묘한 이치라는 것입니다.<br /><br />“올연히 일체 인연을 다 잊었다.”고 하는 그 인연이란 생멸인연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멸인연이든 불생멸인연이든 세간법이든 출세간법이든 모든 인연을 다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br />  <br /><strong>50) 만법이 다 현저함에 돌아감이 자연이니라. 萬法이 齊觀에 歸復自然이니라.</strong><br />                                                                     (만법)  (제관)    (귀복자연)<br />“만법제관(萬法齊觀)”이란 일체만법을 환히 다 본다는 뜻으로 흔히 해석하지만 일체만법이 모두 다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돌아감이 자연하다”고 해서 그냥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니, 그렇게 되면 천연외도(天然外道)가 되고 맙니다. <br />  <br />귀복(歸復)이란 반본환원(返本還源)의 뜻으로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실제 분별심만 다 버린다면 이 자성청정심에 돌아가는데, 그 돌아감이 아무런 조작이 없으며 힘들지 아니하여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br />]]></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1:11:3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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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심명(神心銘) 강설 (51-60)</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16</link>
	<description><![CDATA[<strong>51) 그 까닭을 없이하면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泯其所以하야 不可方比라.<br /></strong>                                                                              (민기소이)      (불가방비)<br />그러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사의 해탈경계(不思議解脫境界)이기 때문에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52)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止動無動이요 動止無止니                                                                               </strong>(지동무동)      (동지무지)<br />움직임과 그침은 상대법으로서 여기서는 먼저 이 두 상대법을 서로 긍정적 다음에 두 법을 당부하였습니다(照而遮). 그치면서 움직인다(止而動)함은, 그침과 움직임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융통자재하게 살아나는 동시에 움직임이 없음(無動)을 말하였고, 움직이면서 그친다(動而止)함은, 움직임과 그침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상통(相通)하는 동시에 그침이 없음(無止)을 말하였습니다. <br />  <br />그러므로 움직임과 그침의 양변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다시 두 법을 긍정하여 서로 융통자재하게 쓸 수 있는 중도정의(中道正義)를 여기서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그치면서 움직임(止動)과 움직이면서 그침(動止)은 두 법이 서로 비춰서(雙照) 살아남(常 照)을 말하고, 움직임이 없고(無動) 그침이 없다(無止)함은 두 법을 함께 막아(雙遮)없애 버림으로써(常寂) 비치면서 항상 고요하고(照而常寂)고요하면서 항상 비치는 (寂而常照)중도 법계의 이치를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br />  <br />이 구절에서는 먼저 비춰서 막고(照而遮) 뒤에 막아서 비춘(遮而照)다는 순서만 달리하였을 뿐, 막음과 비춤을 함께 한(遮照同時)중도정의는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함께 융통자재하면서 동시에 두 상대법이 없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움직임은 그침 가운데 움직임이며(靜中動), 그침은 움직임 가운데 그침이어서(動中靜) 움직임과 그침의 두 상대법이 함께 없어지면서 함께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br />  <br /><strong>53)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 건가. 兩旣不成이라 一何有爾아<br /></strong>                                                                                            (양기불성)      (일하유이)<br />움직임과 그침이 상대법이기 때문에 움직임과 그침을 모두 버리면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는데 하나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까지도 없어져야 둘이 없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둘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인들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54) 구경하고 궁극하여서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究竟窮極하야 不存軌則이요.</strong><br />                                                                                    (구경궁극)      (부존궤칙)<br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중도를 성취하면 거기서는 중도라 할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경하고 궁극한 법으로서 어떠한 정해진 법칙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칙이 없다해서 단멸에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br />  <br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으며, 모날 수도 있고 둥글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전한 진여대용이 자유자재하고 호호탕탕하여 법을 마음대로 쓰는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br />  <br /><strong>55)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契心平等하야 所作이 俱息이로다.                                                                    </strong>(계심평등)      (소작)   (구식)<br />내 마음이 일체에 평등하면 조금도 차별 망견을 찾아볼 수 없고 여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이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물이 산 위로 솟아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산은 산 그대로 높고, 물은 물 그대로 깊은데, 그 가운데 일체가 평등하고 여여부동함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쉰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바로 일<br />체 변견을 다 쉬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56) 여우 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며 狐疑가 盡淨하면 正信이 調直이라                                                                    </strong>(호의)   (진정)      (정신)   (조직)<br />자기의 일체 변견과 망견을 다 버리면 의심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이 화살같이 곧게 서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正信)이란 신ㆍ해ㆍ오ㆍ증(信解悟證)의 전체를 통한 데서 나오는 믿음이며 처음 발심하는 신심(信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경을 성취하면 바른 믿음이라 하든 정각(正覺)이라 하든 여기서는 뭐라해도 상관없으니 이것이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는 것입니다. <br />  <br />바른 믿음은 수행의 지위가 낮고 정각은 수행의 지위가 높은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근본은 바로 성취한 사람을 믿음이라, 각(覺)이라, 부처라, 중생이라, 조사라, 무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바로 성취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이름은 무엇이라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br />  <br /><strong>57)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一切不留하야 無可記憶이로다.</strong><br />                                                                                 (일체불유)      (무가기억)<br />객관적으로 일체가 머물지 못한다거나 주관적으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떤 머물 것이 있고 머물지 못할 것이 있는 것처럼 됩니다. 때문에 여기에는 능ㆍ소(能所)가 붙이므로 <br />바른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br /><br />여기서는 바른 믿음이 곧고 발라서 진여자성이 현전해 있기 때문에 일체가 머물지 못하고 또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는 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기억할래야 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부처도 조사도 찾아볼 수 없는데 무슨 기억을 할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br />  <br /><strong>58)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虛明自照하야 不勞心力이라.                                                                       </strong>(허명자조)        (불로심력)<br />허(虛)란 일체가 끊어진 쌍차(雙遮)를 의미하고, 명(明)이란 일체를 비추어 다 살아나는 것으로서 즉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허(虛)가 명(明)을 비치고 명(明)이 허(虛)를 비춰서 부정과 긍정이 동시(遮照同時)가 된다는 말입니다. <br />  <br />이것은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진 자성의 묘한 작용이므로 마음의 힘으로서 억지로 어떻<br />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59)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로 측량키 어렵도다. 非思量處라 識情으론 難測이로다.                                                                      </strong>(비사량처)    (식정)    (난측)<br />대도는 사량(思量)으로는 알 수 없고 깨쳐야만 안다는 것입니다. 보통 중생의 사량은 거친 사량(思量)이라 하고, 성인의 사량은 제팔 아뢰야식의 미세사량(微細思量)이라 하는데 거친 사량은 그만두고, 미세사량으로도 대도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br />  <br />십지ㆍ등각의 성인도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만이 그러한 무상대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진여법계라 한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60)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眞如法界엔 無他無自라.<br /></strong>                                                                                    (진여법계)   (무타무자)<br />여기서부터는 「신심명(身心銘)」의 총결산입니다.모든 병폐를 털어 버리면 진여법계가 현전한다는 것입니다. 진여법계란 일심법계(一心法界)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그 진여법계의 내용은 남도 없고 나도 없어서 모든 상대 곧 일체를 초월하여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br />  <br /> 우리의 모든 현실이란 상대로 되어 있는데, 그 현상계를 해탈하여 진여법계ㆍ일심법계인 자성을 보게 되면, 남도 없고 나도 없는 절대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상대법이 끊어진 쌍차(雙遮)의 경계이며 진여법계ㆍ일심법계인 것입니다. <br />]]></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1:12:2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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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심명(神心銘) 강설 (61-70)</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15</link>
	<description><![CDATA[<strong>61) 재빨리 상응코저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要急相應하면 唯言不二로다.<br /></strong>                                                                                 (요급상응)      (유언불이)<br />앞에서 ‘진여법계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고 하니 아무것도 없는 텅빈 그런 세계라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진여법계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대자유의 세계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삼차원의 차별세계를 완전히 초월하면 차별이 다한 사차원의 부사의경계(不思議境界)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여법계이며 ‘둘 아님을 말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 아니란 말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있음(有)과 없음(無)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br />  <br />대립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는 상대세계를 초월하고 절대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상대를 극복하여 융합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나와 남이 없다 하니 아무 것도 없이 텅텅 빈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나와 남이 없을 뿐입니다. 따라서 남이 곧 나이고 내가 바로 남으로서, 나와 남이 하나로 통하는 절대법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br />  <br /><strong>62)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不二가 皆同하야 無不包容하니.</strong><br />                                                                                  (불이)  (개동)     (무불포용)<br />서로 상극되는 물과 불을 예로 들어 봅시다. 물과 불이 상대적으로 있을 때는 서로 통하지 않지만, 참으로 쌍차(雙遮)하여 물과 불을 초월하면 물이 곧 불이고 불이 바로 물이 되어 버립니다. 보통의 논리로는 전혀 말이 안 되는 듯도 하지만, 여기에 와서는 물과 불이 둘 아닌 가운데 물 속에서 불을 보고 불 속에서 물을 퍼내게 되니, 이러한 세계가 참으로 진여법계라는 의미입니다. <br />  <br />둘이 아닌 세계, 즉 물도 불도 아닌 세계는 물 속에 불이 있고 불 속에 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체 만물이 원융무애하고 탕탕자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한 것이니 쌍조(雙照)입니다. 즉 그 세계에서는 일체 만물의 대립은 다 없어지고 거기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둘이 아닌 진여법계를 깨치지 못하면 서로서로 대립이 되어 포섭이 되지 않고 싸움만 하게 됩니다. 쌍차(雙遮)란 모든 것을 버리는 세계며, 쌍조란 모든 것을 융합하는 세계입니다. <br />  <br /><strong>63)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로 들어 옴이라. 十方智者가 皆入此宗이라.<br /></strong>                                                                                      (시방지자)   (개입차종)<br />시방세계의 모든 지혜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 종취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모든 있음과 없음의 차별세계를 떠나면 절대세계인 둘 아닌 세계(不二世界)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br />  <br />‘이 종취에 들어간다’한 것은 바로 ‘둘 아닌 세계’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대립을 버리면 모든 것이 융합한 세계에 들어가는데 그곳이 곧 둘 아닌 세계, 진여의 세계, 쌍조의 세계인 것입니다. <br />  <br /><strong>64) 종취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 宗非促延이니 一念이 萬年이요.<br /></strong>                                                                                  (종비촉연)      (일념)   (만년)<br />이러한 종취는 짧거나 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촉(促)이란 짧은 것, 연(延)이란 긴 것입니다. 이 진여법계의 종취는 시간적으로 짧거나 길지도 않다는 것으로서 한 생각 이대로가 만년이며 만년 이대로가 한 생각입니다. 즉 무량원겁(無量遠劫)이 한 생각이며 한 생각이 무량원겁이라는 것입니다. <br />  <br /> 본문에서 짧은 것도 없고 긴 것도 없다 하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긴 것이 짧은 것이고 짧은 것이 긴 것이라는 뜻으로서, 한 생각이 만년이며 만년이 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br /><br />‘짧고 긴 것이 아니라’함은 쌍차(雙遮)이며, ‘한 생각이 만년’이라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우리가 진여자성을 깨쳐서 대도를 성취하면 시간의 길고 짧음이 다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만년’이라고 해서 한 생각과 만년이 따로 있는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시간, 공간이 끊어진데서 하는 말이므로 ‘한 생각’도 찾아 볼 수 없고 ‘만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br />  <br /><strong>65)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바로 눈 앞이로다. 無在不在하야 十方目前이로다.</strong><br />                                                                                     (무재부재)        (시방목전)<br />시방(十方)은 먼 곳을 말하고 목전(目前)은 가까운 곳을 말합니다.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서로 융합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br />  <br />우리가 해탈하여 둘 아닌 진여세계로 들어가면 시간적으로 길고 짧음이,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없어서 한 생각이 만년이고 만년이 한 생각이며,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어서 시방이 목전이고 목전이 시방입니다. <br />  <br />여기서는 멀고 가까움이 통하여 원융무애한 둘 아닌 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다’는 것은 쌍차를 말하며 ‘시방이 눈앞이라’함은 쌍조를 말합니다. <br />  <br /><strong>66)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極小同大하야 忘絶境界하고.                                                                            </strong>(극소동대)        (망절경계)<br />어떻게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을 수 있는가? 이는 조그마한 좁쌀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간다는 의미인데, 시방세계 속에 좁쌀이 들어간다는 말은 알기 쉽지만, 좁쌀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간다 하면 상식적으로 우스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원융무애하여 상대가 끊어진 세계는 조그마한 좁쌀 삼천대천세계가 들어가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상대적인 경계가 끊어져 한계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br />  <br />한계가 있으면 작은 좁쌀에도 한계가 있고 시방세계도 한계가 있으니 작은 좁쌀 속에 어떻게 큰 시<br />방세계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는 한계가 없으므로 조그마한 좁쌀 속에 큰 시방세계로서, 온 시방세계가 좁쌀 속에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고 작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경계가 있다면 좁쌀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br />  <br /><strong>67)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極大同小하야 不見邊表라.                                                                             </strong>(극대동소)        (불견변표)<br />지극히 커도 작은 것과 동일하여 가도 없고 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큰 것이 같다’함과 지극히 큰 것과 작은 것과 같다‘함은 쌍조(雙照)를 말한 것이며, ’경계가 끊어졌다‘함과 끝이 겉을 볼 수 없다’함은 쌍차를 말한 것으로 모두 양변을 여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면 둘 아닌 세계(不二世界)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br />  <br /><strong>68)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有卽是無요 無卽是有니.</strong><br />                                                                   (유즉시무)   (무즉시유)<br />있음과 없음이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이 가장 통하기 어려우나 진여법계에서는 모든 것이 원융하여 무애자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69) 만약 이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 되느니라. 若不如此인댄 不必須守니라.</strong><br />                                                                                   (약불여차)      (불필수수)<br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닌 진여법계를 우리가 실제로 바로 깨치면,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인 둘 아닌 세계로 바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하기 전에는 불법(佛法)이라 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br />  <br /><strong>70)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一卽一切  一切卽一이니</strong>. <br />                                                                (일즉일체)  (일체즉일)<br />하나가 작은 하나이며 일체는 커다란 전체입니다. 진여법계에서는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바로 하나로서 하나와 많음이 서로서로 통하여, 곧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바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br />]]></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1:13:08 +0900</dc:date>
	</item>
	<item>
	<title>신심명(神心銘) 강설 (71-맺은말)</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14</link>
	<description><![CDATA[<strong>71)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뭘 걱정하랴, 但能如是하면 何慮不畢가<br /></strong>                                                                                          (단능여시)      (하려불필)<br />일체 진리를 깨치고 나면 일체 원리를 모두 성취하여 버렸다는   말이니, 결국 이것은 우리의 자성자리 곧 법계실상(法界實相)을 얘기한 것입니다. <br />  <br /><strong>72) 믿음 마음은 둘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信心이 不二요 不二信心이니.</strong><br />                                                                               (신심)    (불이)   (불이신심)<br />그러면 이 진여법계를 무엇으로 깨치느냐 하면 바로 신심(信心)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심(信心)은 범부에서부터 부처가 될 때까지 모두가 신심(信心)뿐인 것이니, 이는 신(信)ㆍ해(解)ㆍ오(悟)ㆍ증(證)을 함께 겸한 신심(信心)입니다. 그러므로 신심은 불법 진여의 근본으로서 그것은 둘이 아니며, 모든 것이 원융하여 쌍조가 되어서 ‘둘 아님이 신심(信心)이라 하였습니다. “둘 아님이 신심(信心)”이니 거기서는 아무 상대도 없고 무애자재만 남게 됩니다. <br />  <br /><strong>73)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아니로다. 言語道斷하야 非去來今이로다.</strong><br />                                                                                      (언어도단)      (비거래금)<br />그 깊고 오묘한 도리는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말이나 문자로써 설명할 수 없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삼세(三世)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어의 길이 끊겼다’하니 벙어리의 세계냐고 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대적인 언어의 길은 끊겼지만 원융무애한 진여법계에서는 언어의 길은 끊어졌다고 해도 한마디 한마디가 무한한 진리로서 모든 것이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br /><br />또 ‘삼세가 없다’ 하지만 삼세가 끊어진 곳에 삼세가 분명하여 과거 속에 미래가 있고 미래 속에 과거가 있으며, 현재 속에 과거가 있고, 현재 속에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닌 동시에 과거 속에 미래 속에 현재가 원융하여 무애자재한 진여법계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br /><hr /><p align="left">                                                             맺   은   말 
</p><p align="left">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신심명」의 대의는 우리가 모든 상대적인 양변의 차별견해를 모두 버리면 원융무애한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사의해탈경계(不思議解脫境界), 또는 진여법계(眞如法界),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선종에서는 ‘마음’ 또는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p><p align="left">하지만 ‘마음’ ‘자성’이라 하는 것도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서 그것도 다 거짓말이며, 깨치면 결국 이런 말이 다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진여법계ㆍ둘 아닌 세계ㆍ무장애법계ㆍ부사의해탈경계라 하지만, 깨치고 보면 이러한 표현들이 도저히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대로가 견성이고 선종의 구경인줄 알면 큰일 납니다.<br /></p><p align="left">삼조승찬대사가 「신심명」을 지은 것도 중생을 위하여 할 수 없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나중에 참으로 스스로 자성을 깨치고 보면 이것도 아이들 말장난인 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높은데 올라가려면 사다리 안 딛고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의 말씀도 그 사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p><p align="left">사다리를 딛고 실제로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면 사다리 그것 또한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심명」이라는 이 언어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이것이 참 진리라는 생각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자성을 바로 깨치면 「신심명」전체가 거짓말인줄 분명히 알 것입니다. 
</p><p align="left">그러므로 「신심명」전체가 거짓말이며 부처도 한 푼어치 못된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때서야 참으로 삼조 승찬대사가 「신심명」을 지은 깊은 뜻을 알 수 있고 불법을 바로 알아서 부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것입니다.<br /></p><p align="left">둘 아닌 세계(不二世界)인 무애자재한 세계를 말씀해 놓은 이 「신심명」도 모를 때는 금덩이처럼 소중하지만 깨치고 보면 거름처럼 더러운 것입니다. 글자만 따라가서는 영영 죽고 말지니 여기 모인 대중들은 화두를 부지런히 하여 하루 빨리 견성성불합시다.<br /></p>]]></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1:13:58 +0900</dc:date>
	</item>
	<item>
	<title>불교탐구 - 제1부 사원과 불자의식</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13</link>
	<description><![CDATA[<p align="left"><strong>제 1 부.   사원과 불자의식</strong></p>
<p align="left"> </p>
<p align="left"><strong>제 1 장.   사찰예절</strong></p>
<p align="left"><strong></strong> </p>
<p align="left">사찰은 거룩한 부처님을 모신 신성하고 장엄한 도량이며, 우리 마음에 묻어있는 더러운 때를 씻어 깨끗이 하는 도량이다.  그러므로 절에서 지켜야 할 예법도 바르게 알아서 행해야 될 뿐만 아니라 마음자세도 단속하여 올바른 신행생활을 해야한다. <br /></p>
<p align="left">*도량이란 모든 부처님께서 바른 깨달음을 얻으신 장소를 말하는데, 보통은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장소를 일컫는다.</p>
<p align="left"> </p>
<p align="left"><strong><font color="#0021b0">1. 참배의 대상과 마음가짐</font></strong></p>
<p align="left">불자가 사찰을 찾아 참배하는 것은 신행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이 되며 으뜸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신행생활이 우리에게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 새 정신과 새 힘을 얻어 다시 생활에 임할 수 있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진리의 세계를 찾아 들어서는 것이며, 신성한 분께 자신의 오만과 아집을  꺾는 일이며, 참 인간의 길을 걷기 위한 첫 노력의 표현인 것이다.            </p>
<p align="left">우리의 참배 대상은 당연히 부처님이시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은 과거 2천 5백여년전의 석존만이 아니고 경전에 나오는 모든 부처님들을 포함한다. 부처님이라야 우리의 예배를 받을 자격이 있고 우리에게 공덕을 베풀어줄 능력이 있는  것이다. </p>
<p align="left">그런데 부처님은 아무리 많아도 모두 하나로 통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결국 모두가 법신(法身) 부처님의 분신(分身)으로서, 본래 법신불(法身佛)이 무수한 불성(佛性)으로 분신하여 많은 부처님과 중생 그리고 우주법계의 본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처님과 중생이 하나이며, 따라서 예배는 자기속에 있는 부처님에게도 하는 것이다.</p>
<p align="left">이와 같이 우리 자신은 이미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지를 부여받았다. 그렇지만 아직 자신의 불성(佛性)을 깨달은 것이 아니므로 사찰법당에서 불상을 참배하여, 이미 불성을 깨달으시고 우리에게 불성이 있다고 모범을 보이신 부처님을 우러러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상을 참배하는 것은 위대한 스승 앞에 예의를 표시하는 것이며, 불상을 보면서 자기에게도  저러한 불성(佛性)이 있음을 보고 자성(自性)을 확인하는 것이다.</p>
<p align="left">자성(自性)이란 우리 자신의 본성품, 즉 불성(佛性)을 말한다. 부처님의 심성(心性)인 불성(佛性)은 마음의 깨달음으로 아는 것이다. 마음이란 정신의 중심체이다. 「원각경」을 보면 몸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六根)과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가 안팎으로 합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그 안에 기운이 허망하게 모여있는 것을 마음이라고 했다. </p>
<p align="left">이때의 기운이란 6식(識)을 가리키는데, 6식(識)의 작용이 한 군데로 모이고 쌓여서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6식(識)은 눈, 귀, 코, 혀, 몸, 뜻을 가리키는 6근(根)의 기초의식을 말하는데, 이 6식(識)이 마음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6식이 활동할 때에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6식이 활동을 멈추면 마음의 자리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망자(亡者)에게서의 마음은 떠돌이 신세인 것이다.</p>
<p align="left">6식보다 더 깊고 깊은 우리 마음의 밑바탕,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같이 깨끗하다. 그래서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부처님이 계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성(佛性)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 땅에 있을 때에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고 자성(自性)을 보는 첫 걸음마인 예배수행부터 착실히 해야 하는 것이다.</p>
<p align="left">즐겨찾는 명찰(名刹)과는 별도로, 우리가 소속된 사찰에 정기법회가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결석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지니면 자연히 만사가 순조롭게 변하여 법회에 참석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를 가족과 이웃에게도 전하여 함께 법회로 인도하는 것도 필요하다.</p>
<p align="left">그리고 부처님께 올릴 향, 초, 꽃, 과일, 곡식, 보시 등의 공양물은 깨끗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준비한다. 향은 명예와 돈과 권력으로 부터의 자유와 해탈을 상징하며 또한 희생, 화합 등도 상징한다. 초(또는 등)는 어둠을 밝히는 지혜를 상징하며 또한 희생과 광명이다. 수행을 상징하는 꽃을 바친 이는 내세에 미인으로 태어난다. 깨달음을 상징하는 과일, 법문을 음미하며 메마른 삶에 청량함을 상징하<br />는 물 한잔의 공양, 차 한잔의 공양도 그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쌀은 기쁨이다. 이밖에도 여러 형태의 공양이 가능하다. </p>
<p align="left"> </p>
<p align="left"><strong><font color="#013add">2. 사찰 출입</font></strong></p>
<p align="left">사찰(절)은 마음의 번뇌를 맑게 하여 지혜를 닦는 수행장으로서 기도하고 참회하는 귀의처이다.  따라서 정성스럽게 도량을 보호해야 하고, 출입하거나 참배할 때에는 마음과 몸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하여야 한다. 사찰을 찾을때는 단정한 옷차림을 해야 하며 지나친 단장(화장,장신구,의복)은 피하고 차는 지정된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출입해야 한다.</p>
<p align="left">도량에 들어서거나 나올 때는 입구에서 법당을 향해 합장 반배를 하고 곧장 큰법당의 부처님께 예배하러 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대웅전(大雄殿)은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왼쪽에 문수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을 모신 곳이다. 석가모니불은 참 지혜와 복덕과 일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큰 원력을 갖추시고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하기 위해 계시며, 문수보살은 지혜를 맡고, 보현보살은 덕행을 맡아 석가모니불의 중생제도를 돕는다.</p>
<p align="left">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참배하되, 법당에 들어설때는 가운데 복판문(어간문)을 피하여 좌, 우 옆문을 이용한다.  어간문은 부처님을 시봉하는 조실(祖室)스님, 주지스님, 법사스님들이 이용하시는 곳이므로, 일반 신도는 사용하지 않는다. 법당문을 열 때에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되, 왼쪽문으로 들어설 때는 왼발부터 들여놓고, 오른쪽 문으로 들어설 때는 오른발 먼저 들여놓는다. (나올때도 이와 같다.) 부처님을 앞으로 마주하는 자세가 되도록 첫발을 딛고 들어서야 한다. </p>
<p align="left"> </p>
<p align="left"><strong><font color="#013add">3. 법당 예절</font></strong></p>
<p align="left"><strong>(1) 참배 </strong><br />일단 법당안에 들어섰으면 먼저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허리를 60°정도 굽히며 반배한다.  공양물이 있으면 그것을 들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단정한 걸음걸이로 뒤꿈치를 들고 불단 앞까지 나아간다. 법회중일 때나 의식이 진행될 때는 다른 사람의 머리맡으로 다니거나 방해되지 않도록 살펴가며 나아가거나 잠시 기다린다. </p>
<p align="left">불단 앞에 서서는 가볍게 부처님을 향해 합장 반배하고, 앞으로 다가서서 공양물을 올려놓고 나서 촛불을 피우고, 향을 사루어 꽂은 다음, 한걸음 뒤로 물러나 합장 반배하고, 뒷걸음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 몸을 돌려 적당한 자리로 돌아와서 예배한다. 이때 스님이나 웃어른과 나란히 서지말고 약간 뒤에 떨어져서 예배하되 부처님의 정면에 서지말고 약간 비켜서며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한다.</p>
<p align="left">향은 한 개비만 피우면 되고 다른 사람이 꽂아 놓은 것이 있거나 촛불이 켜져 있으며 자기가 가져온 것은 그대로 불단에 올려놓으면 된다. 다른 사람이 켜놓은 것을 끄거나 뽑아치우지 않도록 한다. 초를 꽂는 법은 먼저 오른손으로  초를 잡고 왼손으로 같이 잡아 반듯하게 꽂고 불을 켠다. 향은 촛불에 불을 붙혀 향로 가운데 반듯하게 꽂은 뒤 다시 합장하고 물러나서 반배하고 몇걸음 물러나 3배 올린<br />다. 보시(불전)봉투는 주소와 이름을 깨끗이 써서 불전함에 펴서 잘 넣고 자리로 돌아와 예배한다. 다기물(茶器物)을 올릴때도 맑은 물을 다기(茶器) 차관에 떠 와서 오른손으로 차관 잡고 왼손으로 받들어 다기에 넘치지 않게 따른다.<br />이제 자리가 정해졌으면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자세로 큰절 3배를 올린다. 오체투지의 예법은 불자들이 삼보께 올리는 절로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경건한 동작이다. 두 팔꿈치, 두무릎, 이마를 바닥에 대고 가장 낮은 자세로 손바닥을 위로 하여 부처님을 받드는 큰절<br />법이다.</p>
<p align="left">자리는 먼저 온 사람부터 앞으로 당겨 서고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리가 좁을때는 자기 무릎 위에 경전을 올려놓고 읽으며 경전을 밟거나 넘거나 하면 안 되며, 경전 위에 다른 물건을 올려놓아도 안 된다. 경전을 소중히 여기고 공경치 아니하면 박복해지고 지혜가 없어진다. 법당 안에서는 앉을 자리를 서로 다투거나 큰소리로 말하지 말고 웃거나 장난을 하지 않으며 가벼운 눈짓이나 행동으로 의사를 표시하며 서로의 인사는 목례(눈인사)로 한다. 참배가 끝나면 반드시 촛불을 끄고 다기를 비운 다음 나와야 하는데, 촛불은 입으로 불어서 끄는 것이 아니고 준비된 도구나 손바람으로 끈다. 큰법당 참배가 끝나면 각단에 예불한다.</p>
<p align="left"> </p>
<p align="left"><strong>(2) 불공기도</strong></p>
<p align="left">기도는 다겁생(多劫生)＊으로 지어온 죄업을 맑히고 현생에 길들여진 삿된 가치관과 습관을 풀어 가는 거룩한 일으므로 경건하고 오직 부처님을 향하는 일념으로 모든 업장＊이 소멸되고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성불한다는 확신으로 임한다. 이처럼 기도는 의심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이 지정의(知情意)를 완전히 내던졌을 때 가피력이 온다.</p>
<p align="left">기도에도 마장＊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참회하고, 앞으로 올바르게 살려는 자기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며, 우주법계에 가득찬 법신불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리하면 불자의 마음이 법신의 부처님과 하나되어 만사가 뜻과 같이 순조롭게 되고, 그 감사의 마음이 이웃을 향한 봉사행이 되어 삶의 보람을 얻게 되는 것이다. </p>
<p align="left">기도하는 법으로, 법회 중이면 목탁을 치시는 스님을 따라서 하면되고, 독경할때는 편안한 자세로 반듯하게 앉아 합장하고 목탁에 맞추어 독경하되 남이 독경할 때 절을 하면 안된다. 정근할때는 같이 서서 합장하고 일념으로 함께 염불한다.  스님께서 축원하실 때 계속 절을 하면 된다. 우리가 하는 염불(念佛)의 의미는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염불은 큰소리로 독송함이 좋다. 염불을 하면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이 쉬게 되고 부처님이 기뻐하시며 삼매가 뚜렷해지니 끝내 극락 세계에 왕생한다. 이를 고청염불십종공덕(高聽念佛十種功德)이라한다. </p>
<p align="left">이밖에도 기도의 종류는 독경기도(진언과 경을 정성껏 읽으며 하는 기도), 정근기도(부처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며 하는 기도), 사경기도(경을 쓰면서 하는 기도로서 한번 절하고 한 글자 쓴다), 시식기도(구병기도, 49재 등을 통해 영구적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기도), 보살행기도(공양)＊, 예불 등 삶의 모든 일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 등이 있다.</p>
<p align="left">* 겁(劫)이란 어떤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 단위이다. 몇 가지 정의 중에 하나는 ‘둘레가 40리나 되는 거대한 바위 주위를 천인이 1백년마다 한번씩 돌아 엷은 옷을 스쳐서 마침내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더라도 한 겁이 다하지 않는 기간’이다.</p>
<p align="left">* 업장이란 악업에 의해서 생겨난 장애이며, 업이란 일반적으로 몸, 입, 뜻으로 짓는 동작, 말, 생각하는 것들의  세력을 말한다. 원어로 ‘카르마’이다.</p>
<p align="left">* 마장이란 방해자, 악자(惡者), 살자(殺者) 등이다. 일반적으로 악마라고하며 사람들 육신의 생명을 빼앗아가고 지혜를 끊으며 몸과 마음을 요란케 하고 착한 일을 방해하는 악귀신을 말한다.</p>
<p align="left">* 공양이란 공급봉양의 준말이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와 부모, 스승, 망자(亡者), 국가 등에 대하여 몸과 마음을 다해 받드는 것이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마지(摩旨)라고 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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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3) 법회</strong></p>
<p align="left">시간 전에 도착하여 부처님께 삼배한 후 법회 순서에 따라 한다. 법회란 부처님의 정법을 배워 이해하고 실천하여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므로 항상 경건한 마음가짐과 돈독한 신심으로 법회에 임하며, 법회가 시작되면 모든 사적인 언행을 삼가고 법회에 일심동참하며, 끝까지 법회를 다 마치고 나간다.</p>
<p align="left"> </p>
<p align="left">설법을 들을 때는 귀담아 듣고 마음을 반조하며 설법 내용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가벼이 생각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천번 만번 들어도 들을 때마다 새롭고 감사한 마음으로 듣도록 하여 생활의 지표로 삼고, 실천토록 애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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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font color="#013add">4. 절하는 법과 의미</font></strong></p>
<p align="left"><strong><font color="#013add"></font></strong><br />절은 존경의 표시로, 절하는 것은 본래 거만함을 꺾고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순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자기 공로를 잊음으로써 한량없는 발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절을 할 때의 마음자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부처님께 최상의 존경과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특히 3배를 드림은 몸(身), 입(口),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업(業)을 참회하고 삼보께 귀의하며 참 진리를 배우고자 자기를 굽히는 일이다. 우리가 108배, 1천배, 3천배를 하는 순간마다 업력은 소멸되고 무아(無我)의 경지가 나타나 소원성취를 돕는다.             </p>
<p align="left"><strong>(1) 합장법</strong></p>
<p align="left">합장은 본래 부처님의 나라 인도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께 예배하는 인사법으로서,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한데 모아 너와 내가 하나 된다는 의미를 표하는 것이다.  합장할때는 오직 부처님께 향하는 일념으로 정성을 다해, 두 손을 앞으로 올려 가슴 앞에서 맞닿게 모으고 두 손바닥과 열 손가락이 밀착되도록 해서 가운데 공간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가슴과 합장한 손 사이에는 손바닥 하나가 드나들 만큼 약간 뗀다. 이때 두 손은 약간 안으로 당기는 듯 세워서 자기 턱을 향하도록 하며, 눕거나 처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p>
<p align="left">        <br /><strong>(2) 반배법</strong></p>
<p align="left">합장한 자세에서 그대로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여 45°정도로 공손하게 한다. 이를 달리 합장예의라고도 한다.</p>
<p align="left"><strong>(3) 삼배법</strong></p>
<p align="left">3배 중의 1배는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이며, 2배는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 3배는 거룩한 스님네께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3배하는 순서는 합장하고 선 자세에서 반배를 한번 하고 나서, 합장한 채 상체를 약간 앞으로 굽힌 듯 해서 두 무릎을 가지런히 바닥에 댄 다음 두 손을 무릎 앞머리가 닿을 정도 되는 위치에 어깨넓이 정도로 짚음과 동시에 왼발등을 오른발 위에 겹쳐 얹는다. 엉덩이를 발뒷꿈치에 밀착시키며 이마를 바닥에 대며 양손은 펼쳐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해서 귀 있는 곳까지 올려서 접족례(발을 떠받드는 형상)를 한다. 이때 손가락 사이를 벌리거나 구부리지 않고 반듯하게  편다. </p>
<p align="left">일어설 때는 손바닥을 뒤집어 일어서면서 반대 순서로 세 번째 절하려고 엎드리고 귀까지 올려던 손을 뒤집어서 손바닥이 바닥에 닿게 짚었다가 머를 약간 들면서 엎드린 채 합장한 자세로 한 번 절을 하고 (유원 반배 또는 고두례) 일어선다.  마지막으로 완전히 일어서서 선 채로 합장 반배한다. </p>
<p align="left"><strong>(4) 고두배</strong></p>
<p align="left">고두례 또는 고두배라고 하는데, 이는 3배, 108배, 1천배, 3천배 등의 모든 절을 마칠 때 마지막 마무리로 하는 절이다. 자세히 설명하면, 예컨대 3배의 마지막 세번째에 엎드려 절하고 손을 들어 올리는 것까지는 같은데, 그 다음 들어올린 손을 거두어서 이미 밑에서 엎드린 채 합장한다. 이때 합장한 새끼손가락이 바닥에 닿을 정도면 된다. 이렇게 하는 예법을 고두배라고 하는 것이다. 고두배가 끝났으면 다시 한번 더 두 손바닥을 펴서 귀밑 부근에서 받들어 올린다. </p>
<p align="left">그 다음 올린 손바닥을 내려 바닥에 대고 이마를 들어올리면서 발 앞꿈치를 세우고 동시에 왼손을 들어 가슴에 댄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서 왼손과 합장하고 무릎을 꿇은 자세는 처음과 같다. 바닥을 짚든지 합장하고 일어나 반배를  하면 마지막 예법이 끝난다.</p>
<p align="left"><strong>(5) 두 손을 받드는 이유</strong></p>
<p align="left">절하면서 엎드린 채 두 손을 들어올리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을 상징하는 두발을 받들어 올리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격자로서 지혜와 복덕을 모두 갖춘 분이시므로 우리 중생은 두 손으로 존중의 뜻을 표하는 것이다.</p>
<p align="left">재승덕박(才勝德薄)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재주와 복덕을 둘다 갖추기란 쉽지 않다. 재주만 있다고 세상을 잘 살아가는게 아니라 많은 세월동안 선업(善業)을 닦아 지은 복이 있어야 매사 순순히 풀린다. 우리는 부처님을 모범으로 해서 부지런히 지혜를 갈고 닦고, 세상에 많은 선한 일을 하여 복덕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심오한 의미를 알고 참배수행을 꺼리지 않고 항상 실천해야 한다.</p>
<p align="left">법당 앞을 지날때는 항상 합장 반배하며, 걸어다닐 때 신발을 끌거나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용히 다닌다. 마루에 걸터앉거나 불단을 등지고 앉거나 서지 말며 신발은 언제나 가지런히 벗어 놓는다.  사회적인 화제로 도량을 시끄럽게 하여 수행하는 스님들을 방해하면 안되며, 스님을 만나게 되면 먼저 합장 반배하며 아는 스님만 가려서 인사하면 못쓴다.</p>
<p align="left">스님은 삼보 가운데 하나인 승보(僧寶)이며 중생의 복전이 되므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의하며, 스님 개인 일이나  단점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스님께 상담할 것이 있으면 사전 연락을 취해 만나서 3배 드리고, 본인이 누구인가 밝히고 용건만 상담한다.</p>
<p align="left">경내에 떨어진 오물이나 쓰레기 등은 보는 대로 줍되, 자기가 버린 것이 아니더라도 치우며, 사찰에 있는 모든 물건은 우리 모두의 공용물이기 때문에 항상 아끼고 제자리에 정돈하여 훼손되지 않게 보호해야 하며, 특히 법구 (종, 북, 목탁, 요령)등은 함부로 만지지 말아야 한다. </p>
<p align="left">절에서는 오전 정진이 끝나고 큰법당에서 여섯망치의 마지종이 울리면서 9～11시 사이에 사시(巳時) 예불 또는 사시 마지(摩旨)가 거행 된 후에 재식(齋食:점심공양)이 시작된다. 공양을 하게 되면 다같이 평등하게 나눠 먹어야 하고 남기거나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며, 설거지를 함께 돕는다.</p>
<p align="left"> </p>
<p align="left"><strong>제 2 장.    사찰의 구성</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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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1. 사찰건축물</strong></p>
<p align="left"><strong></strong> </p>
<p align="left"><strong>(1) 법당 </strong></p>
<p align="left"><strong></strong><br /><strong>① 대웅전 (大雄殿)</strong></p>
<p align="left">석존을 모신 큰 법당을 대웅전이라 한다. 부처님을 대웅(大雄) 즉 ‘위대한 영웅’으로 표현한 것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도 하며, 항상 사찰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금당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왼쪽에 문수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을 모신다. 문수보살은 문수사리라고도 하며 지혜를 상징한다. 오른쪽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지닌 경우가 많다. 대좌는 연화대나 청사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의 명호를 듣거나 청념하면 4중죄(重罪)가 없어진다고 한다.</p>
<p align="left">보현보살은 대행원(실천)을 상징한다. 보현보살은 연화대 위에서 합장한 보습으로 나타나며, 손에는 연꽃을 쥐고 코끼리를 타고 있는 수가 많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실천이 새의 양쪽 날개와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함께 일체보살의 으뜸이 되어 부처님의 중생구제 일을 돕는다. 특히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명(延命)보살이라고도 한다. </p>
<p align="left"><strong>② 비로전 (毘盧殿)</strong></p>
<p align="left">맑고 깨끗한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으로 혹은 대적광전, 대광명전이라 하여 대웅전 대신 큰법당으로 하기도 한다. 법신이라는 것은 우주 만물의 근본이고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소리나 형체나 생(生)이나 멸(滅)도 나타나지 않는 진리의 본체이신데, 이것을 인격화시킨 것이 청정법신 비로자 나불이다. 모든 부처님은 비로자나 부처님으로부터 존재하시므로 이 분의 형상을 모실 때는 항상 지권인(智拳印)을 짓는데, 이른 오른손의 부처님의 세계가 왼손의 중생세계를 감싸고 있음을 뜻한다. 즉, 부처님과 중생은 하나이며 법신본유(法身本有)라 하여 법신이 일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음을 상징한 것이다.</p>
<p align="left"><strong>③ 극락전 (極樂殿)</strong></p>
<p align="left">극락세계의 부처님이신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으로 미타전(彌陀殿)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하며 큰법당으로 쓰기도 한다.  극락전에는 가운데 아미타불을 모시고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신다. 그리고 부처님 뒤쪽으로 아름다운 극락세계를 보여주는 불화가 있다. 극락세계에 사람이 나게되면 그곳에서도 좋은 세계가 있고 더 좋은 세계가 있어서 9층의 세계로 나누어져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극락세계 9품 연대라 한다.</p>
<p align="left">아미타불은 영원한 수명과 무량한 광명을 보장해주시며,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주재하면서 일념으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을 아름답고 편안한 극락세계로 맞아가는 부처님이시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나타난 아미타불의 역사는 오랜 옛적 세자재왕불의 감화를 받은 법장(法藏)이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극락정토를 건설하고 있으며 이 부처님이 바로 10겁전에 성불한 아미타불이라고 한다. </p>
<p align="left">한국 화엄종에서는 아미타불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고, 아미타불의 후신이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심으로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시고, 대세지보살은 지혜광명으로 지옥, 아귀, 축생, 중생을 제도하시는 분이시다. 좌우의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자비와 지혜를 가리키는데, 아미타불의 자비와 지혜 중에서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대세지보살은 지혜를 수반한 용기를 베푸신다. 대세지보살은 한번 발을 디디면 삼천세계와 마군의 집이 진동하므로 붙혀진  이름이다.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다만 머리에 쓰고 있는 화관에 부모님의 유골을 담은 보배병을 이고 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부모님을 마치 내 부모인양 공경하고 모시겠다는 소망 때문이다. 우리도 대세지보살처럼 이웃을 내 부모처럼 공경해야 한다. </p>
<p align="left">* 중생이란 육도에 윤회하며 살아가는 무리이다.</p>
<p align="left"><strong>④ 관음전 (觀音殿)</strong></p>
<p align="left">대자대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으로, 강원도 낙산사처럼 큰 법당을 대신할 때는 관음전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원통전(圓通殿)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음성을 관하시고 발고여락(拔苦與樂)하는 자비의 화신이며 현세의 구세자이시다. 법화경 보문품에 의하면 갖가지 고뇌를 받는 무량백천만억의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듣고 일심으로 칭명하면 관세음보살은 즉시 그 음성을 <br />관하여 구제한다고 기록되어있다. 왼손에는 봉우리 상태의 연꽃을 들고 오른손에는 불사의 감로수병＊을 들고 있다. 연꽃의 봉우리는 중생들 각자의 불성(佛性)을 상징하며 감로수병에는 법수의 향기가 가득해 마구니의 구름을 세탁하고 서기(瑞氣)를 일으키며 열과 번뇌＊를 소제하여 청량을 준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머리에 쓴 보관은 항상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데, 그 연유는 아미타불이 지니고 있는 자비의 덕성을 이어받고 있음을 상징한 것이다. </p>
<p align="left">관세음보살은 14가지 무외력과 자비희사(慈悲喜捨)라는 네가지 무량심(無量心)을 성취했다. 14가지 무외력(無畏力)이란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 불 속의 중생이 타지 않게 하는 힘, 물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는 힘, 귀신의 해를 입지 않게 하는 힘, 살해를 당하게 되어도 칼이 토막토막 부서지게 하는 힘, 어두운 성품을 없게 하여 악귀가 보지 못하게 하는 힘, 중생에게 쇠고랑이나 오랏줄 등이 몸에 붙지 않게 하는 힘, 험한 길을 가더라도 겁탈당하지 않게 막는 힘, 음욕을 여의게 하는 힘, 성내는 마음을 없애는 힘, 어리석음을 영원히 없애는 힘, 지혜총명한 아들을 낳게 하는 힘, 단정한 딸을 낳게 하는 힘,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한번 부르는 것이 62억 항하사 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과 같은 <br />복덕이 되게 하는 힘 등이다.<br />* 감로수는 천신들의 음료 또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이슬, 도리천의 감미로운 영액이다. 고뇌를 없애주고 장수하게 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비유하기도 한다.<br />* 번뇌는 중생의 마음이나 몸을 번거롭게 괴롭히고 어지럽게 하며 더럽히는 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108번뇌의 108은 6근(根: 눈, 귀, 코, 혀, 몸, 뜻) x 6경(境: 색, 성, 향, 미, 촉, 법) x 3세(世: 과거, 현재, 미래) = 108에서 산출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중생의 감정은 108속에 포함된다.</p>
<p align="left"><br /><strong>⑤ 지장전 (地藏殿)</strong></p>
<p align="left">명부전(冥府殿)이라고도 하며 대원력의 상징인 지장보살을 중앙에만 모시기도 하나 대부분 우리나라 사찰은 명부의 시왕을 좌우로 모시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석존께서 입멸하신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 중생을 제도하시는 분인데 특히 <br />지옥중생을 가엾이 여겨 지옥문전에서 항상 눈물을 흘리시면서 중생을 제도하신다. 따라서 지장보살은 육도윤회의 끝에서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해주는 보살이다.</p>
<p align="left">머리를 깍은 민머리를 하시거나 두건을 쓰시고 가사를 입고 연꽃을 들고 오른손에 보배구슬을 들기도 하며, 석장(錫杖)을 짚은 모습과 종자를 안은 분도 있다. 지장보살은 대원본존(大願本尊)으로서 성불하지 못한 중생이 한 중생이라도 있으면 성불하지 않겠다 함이 이 보살의 서원이다.</p>
<p align="left">지장보살의 좌우보처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있으며, 그 옆으로 시왕(十王)이 자리잡고 있다. 시왕은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이승의 죄를 판결하는 10대 지옥의 대왕들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염라대왕은 발설(發舌)지옥을 관장하며 영가가 5주째 만나는 대왕이다. 그는 양손으로 수염을 다듬고 머리에 명부책을 이고 있다. </p>
<p align="left"><strong>⑥ 미륵전 (彌勒殿)</strong></p>
<p align="left">용화전(龍華殿)이라고도 하며 앞으로 오실 미륵불을 모신 법당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미륵불은 대부분 옥외에 크게 조성하여 모시는 것이 대부분의 모습이다. 미륵불은 석존께서 열반에 드신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 사바세계＊에 강림하시어 중생을 제도하실 분이며 불상은 용화전(미륵전)에 모셔져있다.</p>
<p align="left">미륵불은 사랑과 우정을 나타내는 말로, 한번 약속한 맹서는 반드시 지킨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미륵 부처님은 현재 도솔천에 계신다. 도솔천에서 이 세상에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서 성불할 때 세상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고 재난은 없으며 서로 공경하여 평화롭게 살아가게 되며, 석존이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3회에 걸쳐서 용화법화에서 제도하는데 오늘 불교를 믿는 우리들은 여기 이 작은 인연이 미륵불을 친견하는 씨앗이 되는 것이다.</p>
<p align="left">* 사바세계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써 여러 가지 번뇌를 참고 견디어 나가야만 하는 세계이며 성자들이 이곳에서 참고 교화해야 하는 세계이다.</p>
<p align="left"><strong>⑦ 약사전 (藥師殿)</strong></p>
<p align="left">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약사여래는 현세중생의 모든 재화(災禍)와 병을 없애고 고통을 구제하는 부처님이시며, 바른 법을 가르쳐 깨달음의 세계에 들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워 동방정토 유리광(瑠璃光) 세계를 건설하신 분이다. 모든 중생이 약사여래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 몸이 유리처럼 청정해져서 아무 더러움이 없고 불구의 몸이 회복되고 병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가난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은 약사전을 찾아가 기도한다. </p>
<p align="left">약사여래부처님의 손에는 약이 든 약합, 약그릇이 들려 있다. 이 부처님은 해가 돋는 동쪽나라에 계신다고 하는데, 태양은 어둠을 물리치는 강한 힘과 발원을 나타내므로 약사여래께 기도하면 병이 낫고 기쁨과 발원 풍요가 넘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약사여래좌우로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진리광명<br />을 두루 비추어 중생의 모든 고통 제거를 돕고 있다. 일광보살은 연꽃을 위거나 일륜(日輪)을 가지고 있기도 하며, 월광보살은 초생달형의 달을 갖고 있거나 만월형의 월륜(月輪)을 앞가슴에 지니고 있기도 한다. </p>
<p align="left"><strong>⑧ 나한전 (羅漢殿)</strong></p>
<p align="left">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10대 제자 혹은 16대아라한을 모신 법당, 혹은 500 나한전도 있다. 10대 제자에 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언급되겠지만, 아라한이란 석존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 큰 깨달음을 이루고 성위(聖威)에 오른 사람에게 붙혀진 호칭이다. 나한전 안에는 석존을 중심으로 좌우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있고 그 옆으로 16명의 나한들이 앉아 있다. 이렇게 16 나한만을 모신 법당을 응진전이라고 한다. 16나한 대신 500 나한을 모신 법당은 오백나한전이라 한다. </p>
<p align="left"><strong>⑨ 팔상전 (八相殿)</strong><br />부처님의 생멸을 팔상으로 나누어 주로 탱화로 그려서 모신 법당이다.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도솔래의, 탄생, 사문유관, 출가, 성도, 항마, 전법륜, 열반의 내용을 그리고 있다.</p>
<p align="left"><strong>⑩ 삼성각 (三聖閣)</strong></p>
<p align="left">산신, 칠성(七星), 독성(獨聖)님을 모신 법당이다. 사찰에 따라 각각 따로 모시기도 하며, 큰 사찰에는 산신각 또는 산령각을 따로 큰 법당보다 뒤편에 모신다. 나반존자를 모신 법당을 독성각(獨聖閣)이라 하는데, 독성이란 스승 없이 혼자 깨달은 성자를 뜻한다. 말세 중생을 제도하시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통도사의 나반존자상은 소나무나 구름 등을 배경 삼고 희고 긴 눈썹을 하시고 오른손에 지팡이, 왼손에는 염주나 불로초를 들고 평평한 돌 위에 반듯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독성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다 아시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앙이 발달했다. </p>
<p align="left">산신각은 산신을 모신 집으로, 호랑이와 노인 형상을 모시거나 탱화로 모셨다. 우리 선조들은 산, 강, 하늘 등에 신령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오랜 옛날부터 산신, 수신, 천신 등을 믿어온 까닭에 칠성각과 함께 민족 토착 신앙으로  불교에 포용된 것이다.</p>
<p align="left">칠성각은 수명을 길게 해준다는 칠성님을 모신 곳인데, 칠성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칠성각에는 칠성광여래를 모시며 좌우로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모신다. 이외에 일곱명의 성스러운 별나라 임금의 탱화도 모신다.</p>
<p align="left">우리 불교는 오랜 옛날 우리 조상들이 믿어 온 삼성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사찰의 한쪽을 차지하게 했다. 일심(一心)이 청정하면 일신(一身)이 청정하고, 일신이 청정하면 다신(多身)이 청정하며 나아가 시방 중생의 원각(圓覺)이 청정해진다는 「원각경」의 말씀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부처님의 화현이므로 업신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바라고 화(禍)를 멀리하려고 한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며 종교는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p>
<p align="left"><strong>⑪ 신중단</strong></p>
<p align="left">불법(佛法)을 옹호하는 호법신장을 모신 단이다. 주로 탱화를 그려 모시는 데 중앙에는 동진 보안보살상을 그려 모신다.</p>
<p align="left"> </p>
<p align="left"><strong>(2) 문(門)과 교각(橋脚)</strong></p>
<p align="left"><strong>① 일주문 (一株門)</strong></p>
<p align="left">어느 사찰에 가든지 절 입구에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一株門)이란 기둥이 하나로 건축된 문을 뜻한다. 일(一)이라는 의미는 불교에서의 우주 만유를 일심의 표현으로 본 것을 상징하며, 법계 전체를 일심의 그림자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화엄경」에도 일체유심조(一切唯心造)라 하였으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하였고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은 일심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보는 것이 불교의 본질인데,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한다면 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가지도록 하는 마음을 촉진시키는데  그 뜻이 있다. </p>
<p align="left"><strong>② 금강문 (金剛門)</strong></p>
<p align="left">금강문은 가정의 대문에 해당되는 것인데, 금강문이 없는 사찰은 바로 사천왕문에 도달하기도 한다. 금강문에는 금강역사상이 있는데, 이는 사천왕과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과 절을 찾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금강역사는 코끼리의 백만배나 되는 힘과 지혜를 가지고 있고 웃옷을 벗고 허리에만 옷을 걸친 날래고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손은 주먹을 쥐었다가 칼 또는 금강저를 들고 있다. 경주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은 유명하다. </p>
<p align="left"><strong>③ 천왕문 (天王門)</strong></p>
<p align="left">천왕문은 본래 밝고 깨끗해야 할 부처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건물로, 욕계육천의 수미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님 재세시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성스러운 법회에 잡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사방을 수호하던 분들로, 영원한 세월에라도 불법을 수호하겠다는 굳은 맹세를 하신 부처님의 화현이다. 제각기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東(지국천왕, 비파를 들고 있슴), 西(광목천왕, 용을 잡고 있슴), 南(증장천왕, 보검을 지님), 北(다문천왕, 보탑을 받쳐 들고  있슴)에서 삼보가 계시는 사찰을 수호하는 일을 한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을 일깨우는데 그 뜻이 있다.</p>
<p align="left"><strong>④ 해탈문 (解脫門)</strong></p>
<p align="left">불교의 지상목표는 해탈에 있는 것이다. 번뇌와 망상의 그물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 것을 성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미 일주문을 넘어 해탈문을 지나치게 될 때 벌써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으로, 뜨거운 정진을 촉진시키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탈문은 욕계육천의 수미산 밑에 있는 문이라고 한다. </p>
<p align="left"><strong>⑤ 불이문 (不二門)</strong></p>
<p align="left">불이(不二)란 뜻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유와 무가 둘이 아니며 공(空)과 색(色)이 둘이 아니라는 깊고도 묘한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진리를 깨달은 세계에 들어서는 문이라는 뜻으로, 불이문은 대들보 없이 만들어져 있다. 보통 이 문을 지나면 큰법당을 만나게 되어있다. </p>
<p align="left"><strong>⑥ 피안교</strong></p>
<p align="left">피안은 범어로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인데, 모든 번뇌에 얽매인 고통의 세계 곧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 이상경(理想境)인 열반＊의 언덕에 도달하기 위한 다리이다. 즉, 고통을 건넌다 또는 씻어낸다 하여 큰절의 입구에 피안교가 마련되어있다. 피안교는 욕계육천(欲界六天)의 하단부 수미산을 둘<br />러싼 칠산팔해(七山八海)의 향수해(香水海)가 있으므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현 인간세계의 현실과 삼천대천세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씻는다는 뜻도 되고 삼천대천세계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br />* 열반이란 멸, 적멸, 멸도라고 하기도 하는데,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궁구하여 생사를 초월하는 궁극의 경지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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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3) 탑 (塔)</strong></p>
<p align="left"><strong>① 탑(塔)의 유래와 의의</strong></p>
<p align="left">탑의 유래는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세존의 사리를 인도의 여덟나라에서 8등분하여 각각 자기 나라로 가져가 불탑을 세운데서 비롯된다.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이 탑은 불자들의 예배대상이 되어 부처님에 대한 신앙심이 굳어지면서 더 많은 탑을 세워야할 필요가 있어서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8만4천 <br />법문을 의미하듯 인도 전 지역에 8만 4천개의 불탑을 세웠다고 전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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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그때의 탑은 반구(半球)형으로 꼭대기에서 수직으로 구멍을 뚫어서 땅바닥에 이르게 하고 그 기둥 밑에 부처님의 사리와 유물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반둥글게 하여 탑을 많이 세웠지만 차츰 탑의 재료나 모양이 변천되어 중국에서는 진흙벽돌로 만든 전탑(塼塔), 우리나에서는 벽돌의 생산이 용이하지 못했으므로 초기에는 목탑(木塔)을 주로 세우다가 차차 돌(화강암)로 만든 석탑을 많이 세우게 되었으며, 일본은 목탑이 특별히 많이 세워지는 등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백제시대 때 목탑이 많이 세워졌다고 하는데, 전란으로 거의 다 소실되어 현재는 아주 귀하다. 탑은 다같이 힘을 모아 쌓아올린 공덕의 힘을 표시하며, 맑고 아름다운 도량을 장엄하는데 의의가 있다. 탑돌이는  자동남래(自東南來)라 하여 동쪽에서 남쪽으로 한다. <br /></p>
<p align="left"><strong>② 사리탑과 경탑 (經塔)</strong></p>
<p align="left">사리(舍利)는 부처님을 다비(茶毘=화장)한 뒤에 남은 부처님 유골인데, 원래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그 위에 흙이나 돌을 높이 쌓아 만들었던 것이 최초의 기원이다. 사리는 여러 곳에 봉안하지만 대부분 탑 속에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사리는 영골(靈骨) 즉, 몸에서 나는 신령스런 구슬로,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잘 닦아 훈수(勳修)한 금강불괴(金剛佛壞)의 법체(法體)이다. 또한 한량없는 육바라밀의 공덕으로 생긴다고는 하나 매우 얻기 어려운 것이다.  즉, 삼악을 짓지 않고 십선을 꾸준히 수행한 진혜광(眞慧光)의 묘한 물질로서, 대단한 수양을 쌓아야 얻어지는 정신적 결정체인 것이다. 경탑(經塔)은 사리(舍利) 대신 경전을 탑 속에 넣어 모신 것이다. </p>
<p align="left"><strong>③ 부도 (浮屠)</strong></p>
<p align="left">훌륭하신 스님이 열반하신 뒤에 남기신 사리를 모신 탑을 승탑(僧塔) 또는 부도(浮屠)라고 한다. 석탑이 여러 층으로 만들어진 반면, 부도는 팔각원형단층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는 항아리처럼 생긴 부도를 세워 그 위에 보개를 얹는다.  특히 부도에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을 들 수 있는데 목탑의 유래로 생긴 것으로 본다. 방형(方型)에는 고려때 만들어진 강원도 원주에 있는 법천사(法天寺) 지광국사 현묘탑이 있고, 복발형(覆鉢型)으로는 통도사 사리탑, 금산사 사리탑이 대표적이다. 오륜형에는 정토사 홍법국사탑이 있는데, 이것은 서울 경복궁안에 있다. 이런 부도탑들은 사원 건축물에 관계없이 사원 외각에 부도전(浮屠田)이 따로 있는 것이 특징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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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4) 종루 (鐘樓)</strong></p>
<p align="left">사물(四物)을 갖추어 놓고 조석 예불시에 치는 건물로, 보통 2층으로 되어있다.</p>
<p align="left"><strong>① 범종 (梵鐘)</strong></p>
<p align="left">범종은 지옥중생을 비롯한 일체 중생을 위해 친다. 아침에는 주로 28번 치는데, 이 수는 마하 가섭에서부터 달마대사까지의 28대 조사를 의미한다고 하기도 하며, 욕계 6천(天), 색계 18천(天), 무색계 4천(天)의 합이 28이라 하여 이것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저녁에는 33번 치는데 천상의 28계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을 합쳐 33이 되므로 그렇다고도 하며, 33번째 천(天)이 도리천이라<br />고 보고 그것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이 범종은 예불할 때, 대중을 모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큰스님의 열반을 알릴 때 등에 쓰인다.</p>
<p align="left"><strong>② 법고 (法鼓)</strong></p>
<p align="left">법고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축생을 제도할 때 쓰인다. 법고의 북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에 비유되어 북소리가 울려 퍼지듯이 불법(佛法)이 삼천대천세계에 널리 퍼지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p>
<p align="left"><strong>③ 운판 (雲版)</strong></p>
<p align="left">운판은 청동이나 쇠붙이로 되어 있고, 전체 모양이 구름같이 생겼다하여 운판이라 한다. 이것의 소리가 날짐승을 제도한다.</p>
<p align="left"><strong>④ 목어 (木魚)</strong></p>
<p align="left">목어는 마치 고기모양의 나무를 속을 파고 그것을 조석 예불 때 치는 것이다. 물고기의 제도를 상징하는데 그 유래가 전한다. 옛날 어느 절에 많은 제자를 거느린 큰스님이 계셨는데, 제자 가운데 한명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나쁜 짓을 하다가 그만 병에 걸려 죽어 물고기로 환생했다. 그런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솟아나서 헤엄치기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었다. 스승이 배를 타다 물고기가 뱃전에 와서 슬피 우니 자신의 제자임을 알아보고 즉시 물속 생명을 위해 법회를 베푸셨다. </p>
<p align="left">그날 밤 물고기의 몸을 벗어난 제자가 스승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등에 난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 소리를 내어주면 물에 사는 생명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제자의 부탁대로 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경각심을 심어준다. 알다시<br />피 물고기는 눈을 감는 예가 없다. 그와 같이 우리 중생들도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경책의 의미가 담겨있다. 목탁은 목어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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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5) 당우 (堂宇)</strong></p>
<p align="left">① 강당 (講堂) : 설법과 강의가 이루어지는 큰 강</p>
<p align="left">② 선방 (禪房) : 참선하는 곳이다. 선종에서는 가장 중요시하는 건물이다.</p>
<p align="left">③ 강원 (講院) : 경전을 배우는 곳이다. 일명 승가대학을 일컫는다.</p>
<p align="left">④ 요사 (寮舍) : 스님들이 거주하는 방 또는 건물이다.</p>
<p align="left">⑤ 장경각 (藏經閣) : 경전을 봉안하여 둔 곳으로, 대부분 목판을 보관하는 곳 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각이 유명하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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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font color="#013add">2. 불 상</font></strong></p>
<p align="left"><strong>(1) 불상의 연원 </strong><br />불상의 연원에 대한 근거를 경전에서 찾아보면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권28, 「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권3,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권6, 「불설대승조상공덕경(佛說大乘造像功德經)」권6 등에 나와있다. 내용인즉, 석존이 일찍 돌아가신 마야부인을 제도하기 위하여 기원정사를 떠나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으로 올라가 어머니를 예경하고 석달동안 천인들을 위해 설법하셨는데, 지상에서는 부처님 계신 곳을 몰라 소동이 일어났다. 이에 제자 아나율이 천안(天眼)으로 살펴 도리천에 계신 것을 알리니 부처님을 그리워한 코살라국의 우전왕이 불상을 만들고자 생각했다. </p>
<p align="left">그래서 비수갈마천이 내려와 전단향으로 5척의 부처님을 탄생일에 맞추어 조성했고 우전왕은 진짜 부처님처럼 조석으로 향과 공양을 올리며 예배했다. 부처님이 대범천왕, 제석천왕, 사대천왕의 호위를 받으며 지상에 내려 오시니 만들어진 불상이 부처님께 자리를 내어 주었고, 이에 부처님께서는 불상을 보고 네가 말세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하셨다는 일화가 여러 경전에 기록되어 전한다. </p>
<p align="left"><strong>(2) 불상의 32길상(吉相)과 80종호(種好)</strong></p>
<p align="left">이것은 부처님의 신체적 특징을 헤아려 나열한 것인데, 부처님의 자비하신 인격과 종교적 신비성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던 많은 제자들은 부처님과 전륜성왕＊에게만 나타나는 32상(相)과 80종호(種好)에 근거를 두고 불상을 조성했다. 32상은 큰 특징들이고, 80종호는 여든가지 작은 특징들을 가리키는데, 이는 부처님이 탄생하신 직후 아시타선인이 싯타르타 아기 부처님의 관상을 살피시고 큰 깨달음을 이루리라고 예언했던 것도 부처님의 32상 80종호에 의한 것이다.</p>
<p align="left">이와 같이 32상은 부처님의 과거세에 수행하실 때 한가지 상을 이루기 위하여 백가지 선한 생각을 하시고 백가지 복덕을 지어서 이룬 것이다. 즉, 전생에서의 선행의 결과이며 500여회 나고 죽음으로써, 육바라밀의 보살 대행을 지켜오면서 형성된 것을 대상(大相)으로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32상 80종호를 다 열거하지 않고 아주 특징적인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p>
<p align="left"><br />① 금색상 (몸이 금색으로 된 모습)<br />② 족하이륜상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가 있는 모습)</p>
<p align="left">③ 신장상 (키가 크신 모습) : 불신은 10척 정도로 키가 크고 언제나 뒤에 광배를 지니고 있다.</p>
<p align="left">④ 장광상 (신체 주위에 일장의 빛을 발하는 모습)</p>
<p align="left">⑤ 장지상 (손가락이 가늘며 긴 모습)</p>
<p align="left">⑥ 정계상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잘 말려져 있는 두부(頭部) 정상에는 높이 솟은 육계가 있는 모습) : 항상 미간에 백호를 넣어서 32상 80종 호를 나타낸다.</p>
<p align="left">⑦ 눈은 중생을 자비롭게 살피시는 형상을 하고 계시며, 귀바퀴가 쳐진 귀 는 크게 조성되어 있고 입은 붉다.</p>
<p align="left">⑧ 백모상 (눈썹 사이 흰털이 하나 있어 오른쪽으로 돌아나 있는 모습)</p>
<p align="left">⑨ 대설상 (혀가 길고 혀를 빼면 얼굴 전체를 덮고 머리칼에 이르나 입 속 에 넣으면 차지 않는 모습)</p>
<p align="left">⑩ 부처님 손을 펴면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는 것 등등 불상은 모두 32상 80종호(種好)에 근거한다.</p>
<p align="left">* 전륜성왕이란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어느 특정한 국가가 아니라 보편적 국가의 제왕을 뜻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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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3) 수인 (手印)</strong></p>
<p align="left">수인이란 불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처님의 손모습을 말하는데, 손모습에 따라 의미가 각각 다르다.</p>
<p align="left"><strong>① 선정인 (禪定印)</strong></p>
<p align="left">부처님께서 선정에 드신 모습으로 어느 손이든 한 손을 단전에 갖다 댄 경우다. 이는 마음으로써 중생을 편안케 하며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모습이다.</p>
<p align="left"><strong>② 설법인 (說法印)</strong></p>
<p align="left">손을 들고 계시면 설법인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온갖 두려움을 없애준다고 하여 시무외인(施無畏印)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설법인을 하고 계시는 부처님을 만나게 되면 부처님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내리고 계신지를 깨달아 수행하며 기도해야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p>
<p align="left"><strong>③ 여원인 (與願印)</strong></p>
<p align="left">이는 다섯 손가락을 편채로 손바닥을 내 보이신 모습으로서 중생의 원하는 바를 들어주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여원인은 한 중생도 버리지 않고 온갖 방편으로 인도하시는 부처님의 한량없으신 자비를 상징한다. 따라서 불자는 자기 소원이 부처님의 원력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알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올려야 한다. </p>
<p align="left"><strong>④ 항마촉지인 (降魔觸地印)</strong></p>
<p align="left">손을 아래로 하고 계신 모습이다. 이는 모든 마구니를 항복받은 모습이시다. 일에는 무엇이든 마구니가 있고 마음의 번뇌가 있어 장애가 생기기 마련이다. 부처님은 삿되고 나쁜 것을 없애주신다. </p>
<p align="left"><strong>⑤ 지권인 (智拳印)</strong></p>
<p align="left">왼손의 집게손가락을 오른손 주먹 속에 넣고 오른손가락과 왼손 집게손가락을 마주 잡고 있는 모양이다.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를 상징하고 왼손은 중생의 세계를 상징한다. 모든 중생이 부처님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비로자나불을 표상한 것이다.</p>
<p align="left">이 밖에도 천지인 (탄생시 손모습), 전법륜인(轉法輪印) 등이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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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4) 광배 (光背)</strong></p>
<p align="left">일장(一丈)의 빛이 난다고 해서 32상 중에 장관상이 있다. 원래 무량광으로 시방세계에 빈틈없이 비친다.</p>
<p align="left">① 두광(頭光)은 백호를 중심으로 법륜형, 화염형, 연꽃형, 원형등이 있고, 바탕에 화불과 길상초와 보상화 등을 장식한다. </p>
<p align="left">② 신광(身光)은 몸을 중심으로 두광과 더불어 같이 장식되어 있다.</p>
<p align="left">③ 학신광(學身光)은 불신 후면에 입상이든 좌상이든 대좌에서 시작하여 머리 위까지 불신 전체를 감싼다. 단형광배(丹形光背)라고도 한다.</p>
<p align="left"><strong>(5) 대좌 (臺座)</strong></p>
<p align="left">대좌는 부처님을 보시기 위한 한 단계 높게 만들어 놓은 자리이다. 그 형태는 대체로 우주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과 같은 모양을 취하고 있다. 대좌는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에 올라서 어머니를 위해 법을 설하신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대좌는 상중하로 나뉘는데, 중대는 수미산 중턱의 좁<br />아진 모양을 나타낸다. 상대와 하대는 사바세계의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을 생각하여 복련(覆蓮), 앙련(仰蓮)으로 장식하고 있다. 그래서 연화대라고 한다.</p>
<p align="left">① 수미산형 좌대 : 나한상</p>
<p align="left">② 연좌(蓮座) - 나뭇잎 좌대 : 나한상</p>
<p align="left">③ 하엽좌(荷葉座) - 나뭇잎 좌대 : 제신항</p>
<p align="left">④ 암좌(岩座) - 암석 좌대 : 사천왕</p>
<p align="left">⑤ 생령좌(生靈座) - 잡신좌대(동물좌대) : 사천왕</p>
<p align="left"><strong>(6) 자세</strong></p>
<p align="left">① 입상 : 행동, 상, 걸식 (그림벽화) - 직립형 / - 굴곡형 (통일신라시대 이후)</p>
<p align="left">② 좌상 : 법당 내부 대부분 좌상 (성도, 항마, 설법)<br />③ 와상 : 휴식, 열반상</p>
<p align="left">④ 기상(埼像) : 삼화령 법주사</p>
<p align="left">⑤ 교각상(橋脚形) : 발복을 교차한 거상의 자세</p>
<p align="left">⑥ 탄생상 : 천상천하유아독존 (칠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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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font color="#013add">3. 탱화</font></strong></p>
<p align="left">불보살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불화라고 하고, 불화를 점안하여 불상뒤에 모시면 탱화가 된다. 보통 각 전(殿)마다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불화의 연대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다고 하나 그에 뒷받침할 증거는 없고, 다만 잡사(雜史)에 기록된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기원정사 건립후 부처님께 물어 부처님이 벽에 그릴 그림을 알려준데서 불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는 괘불탱화는 불상을 크게 그린 불화나 탱화를 말한다. 이것은 큰절에서 대법회때 법당앞에 걸고 법회를 봉행시 사용한다. 그밖에 조왕탱화 등 많은 불화가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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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font color="#013add">4. 불교의 상징</font></strong></p>
<p align="left"><strong>(1) 만 (卍) </strong></p>
<p align="left">만(卍)자는 불교사원을 상징하는 표시로 이미 대중화되어있다. 만(卍)자는 만(萬)을 대신해서 쓰여진 것이기에 음역을 “만”이라고 한다. 범어로 ‘스바스티카’이며, 길상(吉祥), 유락(有樂), 덕상(德相), 행운(幸運), 경복(慶福) 등으로 그 유해를 살펴보면 비시나, 크리시나라는 신이 가슴에 달었던 것이 만(卍)자 모양과 비슷하며, 인더스 문화유물에서도 그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부처님 재세 이전에도 사람들이 숭상했던 신이나 왕은 만(卍)자를 지니고 있었고, 자이나교 계조의 가슴에도 만(卍)자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힌두교 사원에서는 천신의 재단에 만(卍)자가 쓰여져 있다고 한다.</p>
<p align="left">이로 미루어 만(卍)은 부처님 당시 꼭 불교의 상징으로 정하여 쓴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길조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다가 불교의 전파에 따라 중국에서 만덕원만한 모양으로 부처님의 가슴에 그리며 혹은 불심인(佛心印)이라고  설명한다. 또는 부처님의 발바닥 65상 속에도 그려져 있다. </p>
<p align="left"><strong>(2) 원상 (圓相)</strong></p>
<p align="left">원상(圓相)은 일원상(一圓相)이라 하는데 중생의 마음은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길고 짧고 넓고 좁음을 표현할 수 없으나 마음의 평등한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원형 하나 로 표상한 것이다. 흔히 선종(禪宗)에서 일원상을 많이 논 하는데, 이는 우주의 모든 근원이 일원상에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승(禪僧)은 이 원(圓)이 근본을 깨달아 각(覺)을 이루기 위해 정진한다. </p>
<p align="left"><strong>(3) 삼보 (三寶)</strong></p>
<p align="left">원형 셋이 삼각을 이루고 있는 이 문양은 부처님과 부처님불 의 가르침과 승단이 각각 분리되지 않고 항상 공존한다는 의미다. 즉, 이 그림은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가리키며, 삼보란 불교 최대의 보물이라는 의미이다. 위에 불(佛)이 법 승 자리하고 법(法)과 승(僧)이 좌우로 나란히 삼각을 이루고 있다. </p>
<p align="left">우리나라에는 삼보사찰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불보사찰은 금강계단이 설해져 있는 경남 양산의 영축산 통도사(通度寺)로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금란가사(金?袈裟)가 봉안되어있다.  법보사찰은 부처님 말씀인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고 있는 경남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이다. 승보사찰은 전남 승주의 조계산 송광사(松廣寺)로, 이곳은 많은 고승들이 수행한 절이며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되어  있고, 보조국사(普照國師)를 비롯한 16국사의 영정이 모셔져있는 곳이다.</p>
<p align="left"><strong>(4) 불교기 (佛敎旗)</strong></p>
<p align="left">불교기는 1950년 스리랑카에서 열린 ‘세계불교도 대회’에서 정식승인되어 현제 세계불교국가의 불교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 불교기의 5색의 가로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5색의 세로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원불멸하다는 의미를 상징한다.</p>
<p align="left"><strong>(5) 법륜 (法輪)</strong></p>
<p align="left">법륜은 범어로 Dharmacakra(작흘라)를 음역한 것인데, 법륜 또는 윤보(輪寶)라 한다. 이는 부처님의 교법(敎法)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윤보가 산과 바위를 부수는 것과 같아서 한 사람, 한 곳에 머물지 아니하고 늘 굴러서 여러 사람에게 이르는 수레바퀴와 같이 팔정도의 수행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왕의 상징이며, 왕의 보기(寶器)로 사용했다고 한다. 전륜성왕이 전생의 복으로 법륜을 얻어 이것을 돌릴때마다 땅은 평탄해지고 산악과 암성은 부서져서 악당을 물리치게 되고 여러 민족을 통일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불교에서의 법륜은 팔정도(八正道) 수행으로 악을 물리치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데 쓰인다.</p>
<p align="left"><strong>(6) 염주 (念珠)</strong></p>
<p align="left">염주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구슬이다. 염주는 보통 108개를 기준으로 목에 거는데, 특별히 손목에 차는 것은 단주(短珠)이지만 통칭하여 모두 염주라 한다. 목에 걸때는 불보살님이 들어있는 모주(母珠)를 목 </p>]]></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Tue, 18 Mar 2008 11:48:19 +0900</dc:date>
	</item>
	<item>
	<title>불교탐구 - 제2부 삼보(三寶) - 3장 석가모니 부처님</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12</link>
	<description><![CDATA[<p><strong>제 2 부  삼 보 (三 寶)</strong></p>
<p> </p>
<p>제 3 장  석가모니 부처님</p>
<p><font color="#013add"><strong>1. 삼신설 (三身說)</strong></font></p>
<p> <strong> (1) 법신 (法身)</strong></p>
<p>  ‘부처님’이라는 명칭은 인도의 범어인 붓다(Buddha)라는 말이 중국에서 불타(佛陀)로 가차(假借)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부처, 부처님으로 바뀌어 불려진데서 유래한다. <br /></p>
<p>원래 붓다라는 말은 ‘눈을 반짝 뜨다’라는 말로 결국 진리에 눈을 떠서 진리와 한 몸이 된 자라는 의미이다. 즉, ‘진리를 깨달은 자’이다.이렇게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셨던 석가모니부처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부처님이 존재한다고 본서 맨처음에 언급했다.</p>
<p></p>
<p>그러나 이러한 교법은 대승불교시대에 와서 정립된 삼신설(三身說)에 의한 것이고, 전대의 소승불교에서는 불멸후 석존께서 곁에 안계시게 되니, 실존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색신(色身)이라고 보고, 이와 구별하여 그가 설한 진리의 당체(當體)를 법신(法身)이라고 생각하여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색신과 법신으로 둘로 나누어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을 소승불교의 이신론(二身論)이라고 함을 참고로 알아둔다.</p>
<p></p>
<p>삼신(三身) 가운데 법신이란 참다운 진리를 깨달은 분, 완전히 진리를 깨닫고 실천한 사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진리 그 자체’가 되셨던 분이다. 이러한 연유로 부처님은 예배와 공양을 받고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 되는 것이다.  </p>
<p> </p>
<p>진리 그 자체 즉 진리의 본체이신 부처님을 가리켜 우리는 청<br />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구별하여 칭한다. 법(法=진리)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이며 따라서 법신(法身)은 곧 깨달음이며 우주의 근원이며 진리가 발현되는 몸으로서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p>
<p></p>
<p>법신은 이 세상 어느 곳이나 안 계시는 데가 없으며, 부처님이나 우리 모두도 갖추고 있는 것이어서, 누구든지 성불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 아니고 수없이 많을 수 있으며, 이름은 각기 달라도 결국 뿌리는 하나의 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p>
<p><br /><strong>(2) 보신 (報身)</strong></p>
<p>  석존도 진리의 몸인 법신으로부터 과거의 무수한 수행과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아 성불(成佛)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얻은 원만한 불신(佛身)을 공덕의 보답으로 석존과 같은 부처가 된다고 하여 보신(報身)이라고 한다. 보신불은 32상(相)과 80종호(種好)을 갖추고 계신데, 절대 완전한 진리의 몸인 법신이 보신을 통해서 표상된 것이다.</p>
<p></p>
<p>우리는 보신의 대표적인 부처로 아미타불을 꼽는다. 아미타불은 법장(法藏) 비구의 48가지 원력에 의해 현현한 몸이시다. 그 원력에 의해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생긴 것이다. 이외에도 중생의 원(願)에 따라 미륵불, 연등불 등 수많은 부처님은 보신(報身)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온갖 수행의 결과로 생긴 몸이라고 하여 보신불(報身佛)이라 하며, 중생들의 살아갈 방향과 귀의처를 알려주신다.</p>
<p></p>
<p><strong>(3) 화신 (化身)</strong></p>
<p>  중생구제를 위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변화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화신(化身)이라고 한다. 법신과 보신불 외에도 역사적으로 실존 하시는 부처님이 있다. 우리는 부처님하면 맨먼저 석가모니 부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석존은 인류 역사상 자신의 본질을 깨닫고 스스로 진리 자체가 되신 최초의 성자로서, 이 분에 의해 불교가 생겨났으니 당연할 것이다.</p>
<p></p>
<p>석가모니라는 이름의 뜻만 알아두자면, ‘샤캬무니’에서 온 것으로 ‘샤캬’는 종족의 이름이고 ‘무니’는 성자(聖者)라는 말이다 즉,샤캬족에서 태어난 성자라는 의미다. 이 분은 화신불(化身佛)로서, 실은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이시다. 석존은 2천 5백여년전에 인도에서만 탄생하신 분이 아니라 전생의 원력에 의하여 일천백억의 혹성에 동시에 일천백억개의 몸으로 태어나신 연유이다.</p>
<p></p>
<p>이러한 삼신불(三身佛)은 하는 일은 각기 다르지만 하나의 몸에서 비롯된 일신(一身)으로서, 모양은 다르나 그 본질은 하나의 법성(法性)에서 나와 인연따라 달리 수많은 부처님이나 보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법성이 비어 있으되 한없는 공덕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는 일도 광대하고 깊은 덕으로 그 경계를 그 누구도 알지 못하니 다만 묘유(妙有)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p>
<p></p>
<p>요컨대, 역사적으로 불교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생각을 점차 체계화시켜 나갔다. 부처님은 석가모니 한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부처님께서 남기신 말씀이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육신으로 오셨던 부처님과 말씀으로 남은 부처님을 둘로 나누어 전자를 색신(色身), 후자를 법신(法身)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이렇게 하다가 말(말씀)이 부처라고 하니 아무래도 이상하여 생각해보니 부처님이 돌아가서 안계신 것이 아니라, 이름도 형상도 없는 그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우주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되었다는데 일치를 보았다. </p>
<p> </p>
<p>이러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의 생명력으로서의 본체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체(體)로서의 부처님 곧 법신불이며, 체(體)에서 상(相)과 용(用)이 생겨나듯, 이 부처님으로부터 어떤 모습을 나타내고 어떤 작용을 하는 부처님을 이름하여 보신불과 화신불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삼신(三身)사상이 생겼다. </p>
<p> </p>
<p>그렇지만 체(體)와 상(相)과 용(容)이 하나를 이루듯, 결국 삼신도 마찬가지라고 이해하면 된다. 부처님의 세가지 측면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으니, 누구나 갖추고 있는 우리 자신의 불성(佛性)을 인식하여 갈고 닦아야 한다. 우리도 법성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최초로 입증해보인 불교의 개조(開祖)이신 석존의 교설을 따라 함께 걸어가야 한다.</p>
<p><strong><font color="#013add">

2. 연등불 수기 (授記)＊</font></strong></p>
<p>  어느 때 선혜(善慧)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생사의 구렁속에서 방황하는 자신과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발심하여 큰 행원을 세우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끝없이 많사오매 내가 부처가 되어 마지막 한 생명까지도 건지리라”하는 서원을 세우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한편 일을 하고 보수를 아껴 은전 500냥을 모았다. </p>
<p> </p>
<p>이때 연등부처님께서 이 나라에 오시게 되었다. 백성들은 꽃을 바쳐 공양하려고 했다. 선혜 수행자도 이 소식을 듣고 꽃을 구하려 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꽃을 찾아 거리를 헤매이던 중에 한 궁녀가 푸른 연꽃 일곱송이를 감추어 가는 것을 보고 겨우 사정한 끝에 은전 500냥을 주고 다섯 송이를 사게 되었다.</p>
<p> </p>
<p>마침내 연등부처님께서 거리로 행진해 오심에 선혜도 시민들과 더불어 푸른 연꽃을 바치셨다. 그때 연등부처님께서 나아가시는 길 앞에 진흙탕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을 본 선혜는 입고 있는 사슴가죽옷을 벗어서 진흙탕 위에 덮고 그것도 부족하자 엎드려 머리카락을 풀어서 깔고 그 위로 부<br />처님께서 걸어가시도록 했다. </p>
<p> </p>
<p>이것을 보신 연등부처님께서는 선혜를 향하여 찬탄하셨다. 그리고 말하기를 “장하다, 선혜여! 그대의 보리심은 참으로 갸륵하구나. 이같이 지극한 공덕으로 그대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불본집행경)하셨으니 이것을 흔히 「연등불 수기」라 한다.</p>
<p> </p>
<p><font color="#013add">* 수기란 이마를 만지면서 미래 일을 증명한다는 것인데, 부처님께서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등 제자에 대하여 미래의 증과(證果) 곧 성불하리라는 내용을 자세히 말씀하신 교설이다.</font></p>
<p><strong>
<font color="#013add">3. 팔상성도 (八相成道)</font></strong></p>
<p>  석존의 행정은 크게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시어 29세때 출가하여 35세때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道)’를 이루셨고, 녹야원에서의 최초의 ‘전법륜(轉法輪)’을 시작하여 그 후 45년동안 각지에서 설법을 계속하시어 교단을 육성하셨으며, 쿠시나가라에서 80세의 일기로 입멸(入滅)‘하셨다. 이 네가지 사적(史蹟)이 있었던 장소는 그때부터 불교의 4대성지가 되었다.</p>
<p> </p>
<p> 여기에 석존의 전생이야기와 몇가지 사건이 덧붙혀져서 팔상(八相)이 완성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팔상성도(八相成道)＊이다.</p>
<p><font color="#013add">* 통도사 영산전에 가면 팔상도가 있고, 법주사에도 팔상전이 있다.</font></p>
<p> </p>
<p><strong>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strong></p>
<p>  부처님은 그 먼 과거 시절 연등불로부터 수기(授記) 받으신 후 보살의 행원을 계속하다가 도솔천 내원궁(內院宮)에서 호명(護明)보살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시던 중에 우리 지구 염부제(閻浮提) 중생을 위해 인간의 몸을 빌어 하강하셨다.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년전에 중부 인도 카필라 (지금의 네팔 타라이 지방)라는 왕국의 마야왕비에게 눈이 부신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신기한 꿈결로 입태하시니 육신의 부처님 이전의 무량광전 법신불의 시현이다. </p>
<p> </p>
<p>부왕은 정반왕(淨飯王)＊이다. 도솔래의상이라는 말은 도솔천(=兜率天)이세 내려오시다는 뜻<br />이다.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는 사바세계인데, 이 안에 우리가 사는 중생계가 있고 이것은 다시 욕계 (욕망에 의해 살아가는 세계), 색계 (욕망은 크지 않으니 아직 육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색신에 집착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세계), 무색계 (욕망과 육신은 벗어났으되 아직 미미한 집착이 남아있는 선계의 중생들이 사는 세계)라는 삼계로 이루어져 있다.</p>
<p></p>
<p>삼계는 다시 각각 여러개의 세계로 구분되는데, 하계(下界)인 욕계에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제일 밑바닥에 있는 지옥에는 제일 욕심 많은 중생들이 가는 곳이다. 그 다음은 아귀로서 굶주린 중생들, 본능적 욕구에 가득찬 중생들이다. <br /></p>
<p>축생은 깊은 판단력과 이해력이 없이 본능에 따라 사는 중생들이다. 아수라는 깊은 판단력과 이해력이 없어서 선악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항상 분노에 차서 사는 중생들이다. 그 다음이 인간, 천상(天)인데, 여기까지만 올라와도 대단한 것이다. 천상에는 다시 6개의 층이 있는데 이를 6욕천(六欲天)이라 한다. 이 6욕천의 맨 밑에 사천왕(四天王)이 있는 사왕천(四王天)이 있다. <br /></p>
<p>신화적으로 생각한 것인데,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이 수미산(須彌山)이다.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에 사천왕이 버티고 있으면서 네 방향을 지킨다. 이 사왕천 위의 수미산 꼭대기에 33천이 있는데, 이것이 도리천(&amp;#24521;利天)이다 이곳의 수장(首長)이 제석천(帝釋天)이다.<br /> <br />도리천 다음에는 야마천(夜摩天)이 있다. 인도신화에서 최초로 죽은 사람이 ‘야마’라는 남자인데 그가 바로 염라대왕이다. 즉 야마천은 죽은 사람들의 나라이다.그 다음 4번째가 도솔천, 그 다음이 화락천(化樂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화락천은 자기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노는 곳이고, 타화자재천은 타인의 운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신들의 나라이다.</p>
<p></p>
<p>이상이 욕계에 있는 6욕천이다. 이중에서 도솔천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는 내생에 부처가 될 사람은 바로 도솔천에서 내려 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존도 도솔천에서 내려오셨고 56억 7천만년뒤에 부처로 오실 미륵보살도 현재 도솔천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도 부처가 되기 전에 하나의 과정으로써 수행을 하다 보면 부족함이 없는 모든 것이 만족스런 경지에 가게 된다. </p>
<p></p>
<p>그래서 지족안분(知足安分)하며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면 도솔천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또 한편, 천상계에 속하는 색계와 무색계에도 각각 18천과 4천이 있어 욕계의 6천과 합쳐 중생계의 천당은 모두 28천이 있게 된다. 저녁에 28번 범종을 치는것도 여기에 연유한다.</p>
<p> </p>
<p>이러한 색계와 무색계는 수행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으로서, 욕심이 점차 줄어들면서 체험하게 되는 세계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사바새계에 오시기 전에 도솔천에서 왕으로 천상의 백성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 이름이 호명보살이시다. 이분이 지상에 태어나 도를 닦아 정각을 이룰 원을 세우니 인간계에서 가장 복이 수승한 왕과 왕비를 찾아보니 바로 인도 카필라국의 왕과 왕비임을 알고, 흰 코끼리가 도솔천에서 내려와 부인의 옆구리로 들어오는 모습을 현몽한 뒤 태중에 들어온 것을 ‘도솔래의상’이라고 한다. </p>
<p></p>
<p>* 아주 옛날 포타나성을 다스리던 이쿠슈바쿠바왕(태양의 후예라고 뜻)과 두 부인 사이에 5남 5녀가 있었다. 이들은 국내 정치 사정으로 당시 카필라라는 선인이 공부하던 근처에 있는 기름진 땅에 옮겨와 나라를 세웠는 데 누중에 왕이 찾아와서 “오! 샤캬”(나라일을 잘 시작했다)라고 칭찬한 데서 ‘샤캬(Sakya)가 그 종족의 이름(석가족)이 되었고 선인의 이름인 ’카필라‘는 성의 이름이 되었다. </p>
<p> </p>
<p>여기에서 왕의 막내인 별성왕이 나라를 다스렸으며, 사자협을 낳았고, 사자협은 정바, 백반, 곡반, 감로반 등 사형제를 두게 되었고, 정반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석존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다. ’정반(淨飯)‘이라는 명칭의 의미는 ’깨끗한 밥‘이라는 뜻이다. 즉, 아직 불교는 없었지만 어떤 두려운 존재에게 깨끗한 밥을 바치며 제사를 올리는 신심을 지닌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p>
<p><font color="#013add">
<strong>[ 삼계육도 (三界六道) ]</strong></font></p>
<p><strong>&lt; 삼계(三界) &gt;</strong><br /><strong> 1. 무색계(無色界)</strong><br /> ①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 <br /> ②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br /> ③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br /> ④ 공무변처천(空無變處天)<br /><strong></strong></p>
<p><strong>2.색계 (色界)</strong><br />   (1) 제4선천(第四禪天)<br /> ① 색구경천 (色究竟天)<br /> ② 선견천(善見天)<br /> ③ 선현천(善現天)<br /> ④ 무열천(無熱天)<br /> ⑤ 광과천(廣果天)<br /> ⑥ 복생천(福生天)<br /> ⑦ 무운천(無雲天)<br />  (2) 제3선천(第三禪天)<br /> ① 변정천(邊淨天)<br /> ② 무량정천(無量淨天) <br /> ③ 소정천(少淨天)<br />  (3) 제2선천(第二禪天)<br /> ① 극광정천(極光淨天)<br /> ② 무량광천(無量光天)  <br /> ③ 소광천(少光天)<br />  (4) 초선천(初選天)<br /> ① 대범천(大梵天)<br />  ② 범보천(梵輔天)<br /> ③ 범중천(梵衆天)<br /><strong></strong></p>
<p><strong>3. 욕계(欲界)</strong><br />  (1) 육욕천(六欲天)<br /> ①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br /> ② 낙변화천(樂變化天)<br /> ③ 도솔천(兜率天)<br /> ④ 야마천(夜摩天)<br /> ⑤ 도리천(&amp;#24521;利天)<br /> ⑥ 사왕천(四王天)<br /> <br />&lt; 육도(六道) &gt;<br />  천상(天上)<br />  인간(人間)   <br />  아수라(阿修羅)<br />  축생(畜生)<br />  아귀(餓鬼)<br />  지옥(地獄)</p>
<p><br />  (2)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p>
<p>  비람강생상은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난다는 뜻이다. 해산달이 가까워지자 마야왕비는 당시 인도의 풍습대로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이 있는 콜리성으로 가게 되었다. 동쪽 문을 나서서 카필라성에서 약 20㎞쯤 떨어진 룸비니에 이르렀을 때 잠시 쉬어 가시려고 행보를 멈추었다. </p>
<p> </p>
<p>그때 봄을 맞은 룸비니동산에 피어있는 꽃가지 하나를 마야부인이 만지려는 순간 갑자기 산기를 느끼게 되시고 보리수 아래 황급히 휘장을 쳐서 산실을 만들었으며 곧이어 태자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가 BC 624년 4월 8일이다.</p>
<p></p>
<p>태자는 탄생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난 뒤 한 손으로 하늘을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시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내가 가장 존귀한 자이다)이라고 외쳤다. 이 말은 외부의 신이나 어떤 전능자가 따로 있어서 존귀한 게 아니고 인간의 심성 속에 있는 참 내가 가장 위대함을 선언한 것이다. </p>
<p> </p>
<p>이는 그동안 신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인간의 위대성을 잊고 지내던 인류에게 인간 스스로 존귀하다는 것을 표방한 것이다. 왕은 왕자의 이름을 싯다르타 (Siddharta)라 지으셨는데 이는 “모든 훌륭한 덕이 다 갖춰져 있고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는 뜻이라 한다.</p>
<p></p>
<p>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선인이 저 동쪽에서 환하게 빛나는 광채를 보고 왕궁에 경사가 난 것을 알았다. 왕궁에 와서 왕자의 상(相)을 보니, 부처님의 신체적 특징인 32상 80종호가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나는 나이가 먹어서 이 아이가 커서 영광을 누리고 큰 일을 할때에 그 혜택을 보지 못할 것이 슬프다고 했다. </p>
<p> </p>
<p>그러자 왕은 이 아기가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고 물으니 장차 위대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라고 하고, 또한 만약 태자께서 출가한다면 모든 중생을 다 건질 세상에 둘도 없는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p>
<p>  <font color="#013add">* 진리를 설법하는 것을 가리켜 ‘법륜(法輪)을 돌린다’고 하<br />는데, 이 말은 당시 인도사람들이 이상적인 왕으로 생각하고 있<br />는 전륜성왕의 모습과 상통하는 것이다. </font></p>
<p> </p>
<p><strong> (3) 사문유관상 (四門遊觀相)</strong></p>
<p>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지 7일만에 불행하게도 마야왕비는 돌아가시고 당시의 풍습대로 이모가 새 어머니가 되어 태자를 양육하였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태자를 안타깝게 생각한 왕은 왕자의 마음을 위로해주려는 뜻과 한편 출가하려는 마음이 생겨날 것을 염려하여 더욱 깊은 사랑과 정성을 쏟았으며 자기가 기대하는데로 성장하여 자신의 뒤를 이어주기를 소원하였다. </p>
<p> </p>
<p>그리하여 태자는 8세에 왕위계승자로서의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당시 가장 뛰어난 스승들을 초대하여 글과 무예 등 왕자로서의 모든 덕을 기르도록 하였으며, 화려한 궁전과 시중드는 궁녀 등 태자로 하여금 생활하는데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시설하고 사용하기에 넉넉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제왕의 수업은 12세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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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편 정반왕은 선인의 얘기를 듣고 태자가 수도하는 사문(沙問)＊이 될까봐 걱정하여 사방의 성문을 굳게 닫고 키웠다. 그런데 태자가 자꾸 바깥구경을 하고 싶어하니 동남서북 사대문으로 4번 바깥출입을 허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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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평소부터도 시간이 있으면 깊은 명상에 잠기길 잘하는 태자는 어찌하여 누구는 편안하게 안락한 생활을 즐기며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어떤 사람은 힘들여 일만 하는 평등치 못한 삶을 이루는것에 대해서, 또 살아있는 것들은 어째서 먹고 먹히며 약육강식의 형태를 이어가면서 괴로운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에 대하여 깊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깊은 명상에 잠겨 답을 얻지 못하고 궁전으로 돌아온 태자는 날이 갈수록 깊은 사색 속으로 빠져들었다.</p>
<p> </p>
<p>이에 정반왕은 선인의 예언이 생각나며 왕자의 출가가 걱정이 되어 주위의 모든 신하에게 매사에 조심토록 명령을 하는 한편 태자의 결혼을 서둘러서 19세(팔상록에는 17세) 되던 해 이웃나라 콜리성주 선도왕(善道王)의 딸 야소다라를 태자비로 맞아들였다.</p>
<p><font color="#013add">＊ 태자로서는 결혼이 썩 내키지 않았으나 부왕의 청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결혼을 했어도 그의 의문이 해결된 것이 아니므로, 왕자비의 따뜻한 마음도 즐거움이 되지 못했다.</font></p>
<p></p>
<p>그러던 어느 날 화창한 날을 골라서 성문밖에 구경을 나가게 되었다. 처음 동문에 나가보니 매우 늙어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머리는 희여졌으며 주름살로 가득한 얼굴의 노인을 본다. 또 남쪽의 성문으로 나갔다가 병이 들어 몹시 쇠약해져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을 보게 되고 의문이 일어나 도중에서 돌아오고 만다. </p>
<p> </p>
<p>어느날은 서쪽 성문으로 나갔다가 죽은 사람의 장례식 행렬과 그 가족들의 슬퍼함을 보고 더욱 깊은 의문과 생, 노, 병, 사에 대한 괴로움을 해결하겠다는 결심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북문을 통해서 나갔다가 만난 수행자의 모습에서 어떤 희열과 안락함을 얻는 듯 했으나 근본적인 의문이 다 해결되지도 않았고, 더욱 출가의 결심은 굳어지게 되었다.<br />  <br />이와같이 사무유관상은 사대문 밖으로 나가 인가의 생노병사와 출가 수도인의 생활을 보게 된다는 의미이다. 세상의 모든 철인 (哲人)들이 그러했듯이 영원한 스승은 삶과 죽음의 근본적인 문제를 사유하고 자각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p>
<p>  <font color="#013add">* 사문은 부지런히 모든 좋은 일을 닦고 나쁜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으로 출가수도자의 총칭이다.</font></p>
<p>  <font color="#013add">* 태자비는 전생에서 석존의 전생의 인물이었던 선혜와 연등불에 바칠 꽃을 사고 판 사건으로 내생에서 부부의 연을 약속한 구리선녀이다. 그녀도 마하파자파티와 함께 머리를 깍고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font></p>
<p> </p>
<p>(4) 유성출가상 (踰城出家相)</p>
<p>  유성출가상은 성을 넘어 출가하다는 뜻이다. 점차 출가의 뜻을 굳히며 지내던 태자의 나이 29세에 태자비가 아들을 낳았다는 전갈을 듣고 “오! 라훌라!”라는 탄식의 말을 뇌까리게 되었다. 무의식중에 “라훌라”라고 한 말은 장애라는 뜻으로써 자신의 출가에 장애물이 생겨났다고 판단한데서 나온 말인데, 이로 인해 태자의 아들 이름이 라훌라가 되어 버렸다.</p>
<p></p>
<p>그러나 한편으로 대를 이을 후계자를 두어야만 자유롭게 출가도 할 수 있다는 사회풍습을 생각한다면 마음놓고 출가할 수 있는 촉진제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침내 태자는 아들은 얻은 해에 생노병사(生老病死)가 없는 삶을 찾아서 마부 찬타카의 도움으로 성을 넘어 몰래 출가를 단행하시니, 이때가 2월 8일로 우리가 말하는 ‘출가재일’이며 이는 곧 부처를 이루시려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p>
<p> </p>
<p>(5) 설산수도상 (雪山修道相)</p>
<p>  설산수도상은 설산에서 수도하는 상을 말한다. 여기서의 설산은히말라야를 말한다. 히말라야는 인도말로 눈을 항상 가지고 있는 산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실제로 부처님이 깨달으신 장소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다. 그러므로 설산이 가진 신성한 의미를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p>
<p> </p>
<p>성을 나오신 태자는 지니고 있던 보물을 모두 마부 찬타카에게 주신 뒤 차고 있던 칼로 스스로 머리칼을 자르시고 인근을 지나던 사냥꾼과 옷을 바꿔 입으시어 외모의 형상을 수행자답게 꾸미신 뒤 모든 준비를 갖추셨다. 이렇게 수행자가 된 태자를 흔히 사문 고타마라고 부른다. </p>
<p> </p>
<p>찬타카와 작별하신 다음 여느 수행자들처럼 숲속을 찾아 들어가시게 된다. 처음에는 다른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숲속에 자리잡고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겼으나 이레가 지나도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게 되자 당시에 유명한 수행자들의 스승을 찾아 나서기로 하신다. </p>
<p></p>
<p>첫 번째로 바가바라는 고행주의를 수행하는 스승을 만났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수행하는 목적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뿐이기 때문에 태자는 못마땅하여 하룻밤을 잔 뒤 다시 스승을 찾아 나가게 된다. 왜냐하면 태자는 죽음을 면할 길을 찾기 위해 출가했거늘, 그들 방식대로라면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먼저 죽어야 하며, 또 그 하늘에서의 수명이 다하면 또 죽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
<p></p>
<p>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배화주의자였는데, 범천(梵天)＊과 일월(日月)과 수화(水火)를 섬기는 자들이다. 이 또한 자신이 닦을 수행이 못된다고 판단하여 그곳을 물러났다. 그리고 나서 당시 가장 명망이 높은 철인(哲人) 두 사람을 차례로 찾아가 사사(師事)받았다. 이 두 철인은 모두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다다르는 선정법(禪定法)을 수행하는 수정주의자(修正主義)이다.</p>
<p> </p>
<p>이들은 육체활동을 정지하고 정신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에 의해서만 해탈에 이른다고 믿는 자이다. 싯다르타는 이들에게 각각 지도를 받아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하는 최고수행단계까지 이르렀으나, 그 경지도 일단 정신통일의 상태가 끝나버리면 다시 이전 상태로 되돌아오므로 수정(修定)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야만 했다. 그래서 수정주의자들의 선정이 결코 무고안온(無苦安穩)의 해탈이 될 수 없고, 죽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음을 깨닫고 떠나게 된다.</p>
<p></p>
<p>이처럼 명성있는 수도자들을 찾아보았으나 다 허사였고, 이제는 할 수 없이 스승을 찾지 말고 자기 스스로 깨달아야겠다는 비장한 각오 아래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부다가야산(설산)이었다. 이곳에서 싯다르타는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해 심한 육체적 고행을 시작했다. 이때 부왕은 아들을 염려하여 다섯사람을 보냈는데, 이들5인도 고타마와 함께 수행자가 되어 고행을 닦았다. <br /></p>
<p>여기에서는 그야말로 혹독한 수행을 실천하며 갖가지 고행법은 다 겪어 보시게 된다. 거의 6년에 이르도록 싯다르타는 출가한 후 이곳에서 가장 오래 머물면서 고행을 하는 가운데 어느 때는 몇 톨의 낟알과 한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내시기도 하는 등 초인적 고행을 하신 결과 몸엔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모습에 눈은 움푹 들어가고 뺨도 가죽만 남아 결국 고행은 고행대로 했으되 아직도 생사의 번뇌는 끊어지지 않고 생사해탈의 방법도 없어 보이자 태자는 달리 생각을 하게 된다.</p>
<p> </p>
<p>즉,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으로써 육체를 잊고자 한다면 아직도 육체에 집착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비로소 고행을 통해 육체를 괴롭히기보다는 그것을 맑게 가지는 것이 마음의 고요도 가져오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고행을 중지할 것을 결심한다. </p>
<p></p>
<p>이렇게 생각을 바꾼 싯타르타는 우선 지나치게 지친 몸을 회복시키고자 네란자라강에 내려가 몸을 깨끗이 씻고, 인근에 사는 목녀(牧女)가 공양한 우유죽을 잡수셨다. 왕의 명령으로 태자의 곁에서 고행을 지켜보며 같이 따르고 수행하던 5인(교진여, 마등, 구리 등)은 태자가 목욕도 하고 여자로부터 우유죽을 얻어 잡수셨으니 그가 이제 고행을 포기했다고 실망하고 태자의 곁을 <br />떠나 녹야원으로 가버렸다.</p>
<p></p>
<p>고행까지 그만 두었다는 것은 당시에 성행했던 수행법을 모두 버린 셈이며, 슬기로운 판단력과 과감한 결행과 불굴의 의지로써 과거 관습의 타성과 모순성을 정확히 꿰뚫고 힘차게 일어나신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불교의 세계가 열려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혼자 남은 싯타르타는 커다란 보리수 아래의 반석에 길상초를 푹신하게 깔고 앉아 우주와 생명의 실상을 알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이렇게 하기를 이레째 되는 날까지 심심삼매＊에 들어가셨다.</p>
<p> </p>
<p> <font color="#013add">* 범천이란 색계의 초선천으로 욕계의 음욕이 없기 때문에 항상 깨끗하고 고요한 곳이다. 범중천, 범보천, 대법천의 세 하늘이 있다.<br /> * 삼매란 산란한 마음을 한곳에 모으고 움직이지 않게 하여 바르게 하므로 망념에서 벗어난 적정의 상태이다.</font></p>
<p></p>
<p>(6) 수하항마상 (樹下降魔相)</p>
<p>  보리수 아래서 마군을 항복받는다는 뜻이다. 태자가 삼매경에 드니, 마왕 파순이 유혹한다. 보리수 아래서 조용히 명상에 잠겨 계시는 태자의 32상과 80종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밝게 빛났고, 한 길이나 되는 둥근 광명이 몸 전체에 더욱 더 크게 빛났다. 그리고 미간백호상공명으로 온 우주세계를 비추자 욕계의 제6천 마왕궁에도 광명이 눈부시니 그는 32가지 악몽을 꾸고 크게 놀라 태자의 성불을 결사 방해하기로 했다. </p>
<p> </p>
<p>마왕은 이 세상에 부처님이 나타나시면 삿되고 악한 무리인 자신들이 살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마녀들을 동원하여 태자를 유혹하고 맹수 나찰 아귀를 보내고 8만 4천 마군중을 파견하지만 모두 실패하게 되자 마왕 파순은 항복하고 태자에게 귀의하고 만다.  이렇게 이레째 되는 날 찬란한 새벽별이 반짝일 때 마왕들에게 항복 받으시고 마침내 크게 깨달으시게 되는데, 이때 개달으신 것이 연기법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이치)이며, 중도의 진리이며, 이로써 드디어 우주가 내 자신이고, 내 스스로가 우주임을 알게 되신 것이다.</p>
<p></p>
<p>그동안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서 현실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고통을 주는 주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은 사색을 시작했고, 또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해서 냉정하게 분석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가 태어난 후 왕자로서의 호화로운 생활과 출가하여 자기 몸을 학대하던 일, 고요히 명상에 잠겨 삶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도피적 생활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 이전의 사람들이 개발한 방식대로 노력해 보았지만 막상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종국에 싯다르타가 얻은 결론은 우리가 영위하는 삶속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사이는 서로 연관성이 있어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 모든 문제들이 발생하며, 이렇게 발생한 문제들은 객관적인 법칙에 의해서만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p>
<p> </p>
<p>즉, 우리가 괴롭다고 느끼는 감정의 최초 원인은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무지(無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부처님은 훗날 무명(無明)이라고 설법하셨다. 인간이 느끼는 괴로움의 원인을 객관적인 밑뿌리부터 제거할 때 그것으로 인한 모든 현실의 괴로움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최고의 행복한 상태인 열반에 이르는 길임을 깨달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새벽녘이 밝아올 무렵 고타마 싯다르타는 긴 방황의 터널을 빠져나온 것이다.</p>
<p></p>
<p>온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생명체이건 무생명체이건 서로 연관을 가지며 서로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도 예외가 없이 그러한 것들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훗날 부처님은 이러한 절대적인 진리를 바로 연기(緣起)라고 하시고, 상호연관되어 돌아가는 객관세계의 법칙을 잘 관찰하고 그에 따라 생활할 때 우리들의 삶이 비로소 행복해진다고 설하셨다. 석존께서 그의 나이 35세때 마가다국의 붓다가야라는 곳의 보리수에서 깨달으신 내용이 바로 이 객관세계의 법칙인 것이다.</p>
<p></p>
<p>이처럼 태자는 드디어 큰 깨달음을 성취하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푼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이것은 출가후 6년만의 일이며 태자께서 35세 되던 12월 8일 보리수나무 밑에서의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날을 기리어 부처님의 성도일로 정했으니, 우리도 적극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해야 할 것이다. </p>
<p> </p>
<p>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들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신(神)이나 자기만의 쾌락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통찰력과 그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것만이 행복하고 안락하며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기존의 사유방식으로부터의 해탈이며 최고의 즐거움(=열반)인 것이다.</p>
<p></p>
<p>(7) 녹원전법상 (鹿苑傳法相)</p>
<p>  녹원전법상이란 녹야원에서 불법을 전한다는 뜻이다.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께서는 그곳에서 21일을 더 머물러 계시며 깨달음의 기쁨을 누리시고 또 깨달으신 바를 점검하신 뒤 이것을 세상에 전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생각하다가 범천(梵天)의 권천(勸請)에 의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해야겠다는 대자비심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전법의 길로 나서게 되신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대자대비가 없는 각자(覺者), 즉 진리만 깨달은 이를 부처라고 보지 않는다.</p>
<p> </p>
<p>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된 고타마 싯다르타는 법열＊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실로 거룩한 부처님의 길은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부처님은 누구에게 처음으로 이 법을 전할까 생각하시며 자신의 세 스승을 떠올렸으나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된 것을 아시고, 다음은 같이 수행하던 5인의 수행자를 찾아 녹야원으로 가시게 된다. </p>
<p> </p>
<p>처음에 부처님이 타락했다고 여기고 떠났던 이들 5인은 부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부처님을 뵙더라도 인사조차 하지 말자고 약속했으나 부처님께서 가까이 오시자 그 거룩하신 모습에 절로 머리를 숙여 예배하고 자리를 내드리며 최고의 공경을 드리게 된다. 부처님은 녹야원에서 교진여 등 다섯 수행자에게 비로소 가르침을 폈으니, 이것을 불법의 첫 펼침이라 하여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p>
<p> </p>
<p>여기서 출가수행자는 욕락(慾樂)과 고행의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할 것과,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심으로 그들을 깨우쳐 진리의 세계에 눈뜨게 하셨고, 교진여 등으로 하여금 부처님께 귀의한 최초의 제자가 되게 함으로써, 불교가 비로소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고, 최초로 불(가르침을 연 부처님)&amp;#8228;법(부처님의 가르침)&amp;#8228;승(불법을 받들고 실천하는 수행자 집단)의 삼보(三寶)가 구족한 승가의 성립을 보게 된다. 그때 근처 어느 부호의 외아들 야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불제자가 되었는데, 야사의 부모와 아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된다. </p>
<p> </p>
<p>이들이 우바새(優婆塞)와 우바이(優婆夷)의 시초이다. 또 야사의 친구 50명도 감화를 받았는 데 부처님의 제자 사문(沙門)이 되었다. 그 후로도 부처님은 왕사성과 사위성 그리고 고향 카필라를 왕래하며 직접 가르침을 펴셨고, 바라나시와 베사알리와 코삼비 등에도 가서 교화하셨다.</p>
<p> </p>
<p> 당시 인도문화의 중심지인 마가다국의 왕사성으로 가서 유명한 종교가였던 가섭 3형제를 교화하여 제자로 삼으셨는데, 이들 3형제는 부처님보다 훨씬 연장인 늙은 종교가였음에도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을 보고 백성은 물론 왕사성 국왕과 많은 신하들이 놀라 부처님께 가르침을 펼 수 있는 사원을 지어 드렸는데 이 절이 불교사원의 시초가 되는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이로부터 <br />불교는 왕사성을 중심으로 크게 교세가 확장되었다.</p>
<p></p>
<p>부처님께서 직접 교화한 곳으로는 왕사성과 사위성이 가장 중심지이며, 북쪽으로는 카필라, 남쪽으로 녹야원이 있는 바라나시, 동족으로는 참파, 서쪽은 코삼비 등이다. 유명한 설법장소로는 최초 서럽지인 녹야원, 왕사성의 죽립정사와 영축산, 사위성의 기원정사와 녹자모강당(東園精舍) 등인다.</p>
<p></p>
<p>부처님도 45년간 수많은 중생을 교화하셨는데, 그 가운데 열명의 훌륭한 제자가 있었고, 그 밖에 항상 따라다닌 제자만도 1,250명에 다다랐고, 한번 설법하면 8만이 모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불제자에는 계급의 귀천도 빈부의 차별이나 인종 구별도 없었다. 오직 화합과 평등과 진리(=법)에 의한 질서만이 존중되었다. 그래서 당시 종교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던 여성출가수행자도 인정되었다. </p>
<p></p>
<p>부처님은 우주 인생의 보편타당한 진리를 올바르고 참되게 깨달은 정등각자이며 또한 자율적이고도 자주적인 원만한 인격을 갖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시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참삶의 길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 일깨우기 위하여 여러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진리를 증득하여 해탈한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많은 지방으로 가서 불법을 알리고 교화하도록 했다. </p>
<p>그래서 제자들에 의해 더욱더 널리 알려진 불교는 부처님 재세시에 이미 동쪽으로 갠지스강 하류까지 전해졌고 서쪽으로는 지금의 봄페이 북방인 아라비아해 연안까지 전파되었다고 한다. </p>
<p></p>
<p>이외에도 부처님은 교화의 방법으로 위의교화법(威儀敎化法)과 설법교화법(說法敎化法)을 사용하셨다. 위의교화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방에게 감화를 주고 마음을 일깨우는 방법이다. 말이 없으면서도 말로써 가르치는 것 못지 않은 성과를 거두기 때문에 이를 달리 상호설법(相互說法)이라고 하는데, 처음 녹야원에서 5인 수행자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일과, 배반자 데바닷타와 아자타삿투왕이 풀어놓은 술 취한 코끼리를 굴복시킨 이야기들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러 지어서 하는 몸가짐이 아니고 자연히 풍겨나는 인격과 심<br />덕(心德)의 발로인 점이 특징이다. </p>
<p></p>
<p>두 번째 교화법인 설법교화는 언설(言說)에 의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게송(偈頌)의 운문(韻文), 산설(散說), 비유(譬喩), 인연담(因緣談), 문답법, 전의법(轉意法)등의 다양한 형<br />식으로 응용된다. 이 중에서 인연담은 상대에게 자신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과거 회고 및 미래에 선과(善果)를 거두도록 하여 생활을 향상되게 하는 수단이다. 문답법은 대화를 통해 스스로 올바른 견해를 갖도록 하는 방편인데, 상대의 질문이 적절하면 그대로 긍정해주는 것, 질문이 이치에 맞는가 그른가를 먼저 분별하고 그에 알맞은 답을 하는 것, 질문을 받고 오히려 반문하여 상대의 잘못된 생각을 깨닫도록 하는 것, 질문이 이치에 합당치 않고 아예 쓸모가 없을 때는 침묵해버리는 것 등이다. </p>
<p> </p>
<p>전의법(轉意法)은 상대의 견해를 처음부터 부정하지 않고 교묘히 새로운 의의를 갖게 하는 것이다. 가령, 바라문교의 이상은 생천(生天)하는 것인데, 부처님은 이러한 생천설을 직접 부정하지 않고 생천하기 위해서는 자비희사(慈悲喜捨),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아야 한다고 가르쳤기에 실질적으로 생천보다 더 긴요하고 소중한 현실에 충실을 기하도록 하는 것이다.</p>
<p></p>
<p>그에 따라 당시 기성종교인들은 젊은 부처님과 불교세의 확장을 두려워하여 음해공작을 한 예도 있는데, 임신한 여인을 꾸며 대중 앞에서 부처님의 아이라고 모함하거나 불구덩이나 독약을 이용해 부처님을 음해하려는 경우, 또 탕녀를 죽여 묻어놓고는 불교교단에서 한 짓이라고 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비방하였으나모두 실패하고 도리어 부처님은 유명하게 될 뿐이었다.</p>
<p> <font color="#013add"> * 범열이란 마음을 깨달아 지혜를 얻는 순간, 또는 그것을 남에게 가르칠 때 얻는 기쁨을 말한다</font>.</p>
<p> </p>
<p>(8) 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p>
<p>쌍림열반상은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셨다는 의미다.출가하시어 6년만에 성도하신 후 45년이라는 세월을 갠지스강유역을 중심으로 중생제도와 교화하시는 일로 일생을 보내시어 어느덧 80세가 되셨을 때 노쇠한 몸으로 왕사성에서 사위성으로 가시는 도중 바이샬리에 이르시어 제자들에게 “3개월 후에 열반에 드시겠다”고 예언을 하시고, 이어 금세공장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다시 병을 얻게 되신다.</p>
<p></p>
<p>부처님은 바이샬리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불러놓고 “무엇이든 연기의 법칙, 인과의 법칙 그리고 삼법인의 내용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벗어나면 설하는 사람의 견해이지 내 가르침<br />이 아니다”라고 설하시며 불법이 왜곡될 것을 경계하여 정법의 판단기준에 관해 말씀하셨다.</p>
<p></p>
<p>부처님은 고통을 참으시며 룸비니쪽으로 다시 길을 떠나셨다. 이렇게 쿠시나가라에 도착하시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해 눕고 싶다. 저기 사라쌍사 아래에 가사를 4겹으로 접어 깔아다오. 나는 오늘밤 여기에서 열반에 들겠다” 이렇게 하여 마지막으로 모여든 제자들에게 열반경을 설하신 후 열반에 드시니 이때가 2월 15일 즉 열반 재일이라 한다.</p>
<p></p>
<p>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누구에게 의지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나의입멸(入滅)을 슬퍼하지 말라. 무릇 육신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니 내 비록 육신은 멸한다고 하나 내법신(法身)은 멸하지 않으니, 법신이란 내가 일생동안 설(說)한 법(法)＊과 율(律)＊ 중에 빛나고 있는무상의 정각(正覺) 바로 그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별한 후에 너희들은 법과 율을 큰 스승으로 삼아 살도록 하라.”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몸과 스스로의 마음을 알고 또 법을 알고 나서 탐욕과 근심과 슬픔을 제거하고 “남에게 의지말고 마치 강 가운데 모래톱과 같이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며, 법에 의지하여” 수행을 계속해 나간다면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훈계하는 듯한 말씀을 남기셨다. </p>
<p> </p>
<p>여기서 모래톱은 등불의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스스로 등불을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열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제자 가섭에게 부처님은 말없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시며 부처님의 진정한 법신이 영원하심을 만중생에게 또 알리셨다. </p>
<p> </p>
<p>이는 부처님께서 열반의 모습을 보이셨으나 죽음을 의미하는 열반에 드시지는 아니한 것과 본래로 진리의 몸이 시기에 여여부동하심을 입증한 것이다. 부처님은 신묘불가사의한 사리를 남기셨는데 정골 사리가 양산 통도사를 비롯한 5대 보궁에 봉안되어 있고, 8섬 4말의 사리가 8개국에 한섬씩 분배되었고 후일 인도 아쇼카왕에 의해 인도 전국에 8만 4천개의 사리탑이 세워지게 이른다.</p>
<p> </p>
<p>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교단은 가섭존자가 중심이 되어 500명의 대아라한과 성전편찬작업을 하였는데, 이것을 결집이라고 한다. 이러한 결집은 이도불교사상 수차례 행해졌으며 불멸 직후에 제 1회 결집이 있었고 그 후 100년마다 3번의 결집이 더 행해졌다. 1회 결집 후 200여년이 지난 아쇼카왕 때 제 3회 결집이 행해져 삼장(三藏) 즉, 경장(부처님의 말씀), 율장 (부처님의 계육), 논장 (스님네의 학술논문)이 수집되었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생생히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p>
<p> <font color="#013add"> * 불설(佛說)중에서 교리와 사건에 관한 것이 법이다.<br />  * 출가자들의 행위한 관한 규정과 승가의 운영과 규율에 관한 부분이 율(律)이다.</font></p>
<p><strong>
<font color="#013add">4. 부처님의 위신력</font></strong></p>
<p>  (1) 여래십호 (如來十號)</p>
<p> 부처님은 지혜와 복덕을 갖추어 복혜(福慧)의 무한한 공덕으로열 가지 이름을 가지셨으니 이를 여래십호라 하며, 이를 통해 부처님의 능력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이름들만 외워도 염불이 절로 되며 암송이 쉽게 된다. 법화경에는 다음과 같은 여래십호가 자주 등장하니 알아둔다. </p>
<p></p>
<p>① 여래 (如來)</p>
<p>  이 말은 범어로 ‘타타가타(Tathagata)인데, ’타타‘는 온다, ’가타‘는 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타타‘는 진여(眞如)＊의 세계에서 여실히 오신 분이라는 의미이다. 여래의 여(如)는 여여(如如) 또는 진여(眞如)의 줄임말로, 쉽게 말하면 그 시간 그곳에서 취해야할 가장 마땅한 상태, 가장 원만한 자세, 아무에게도 해를 끼침이 없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안주해 참된 이익을 주는 모습을 말한다. 그러한 자세, 상태, 모습에 도달했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 여래(如來)이다.</p>
<p></p>
<p>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 판이하다. 실수와 잘못과 후회의 연속으로 꾸며진 우리들 범부(凡夫)의 삶과는 달리 여래는 이미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여여한 마음으로 사는 비범인(非凡人)이요, 대자유인(大自由人)이요, 인생의 승리자인 것이다. 부처님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우주 삼라만상의 법을 알고 그 법대로 사는 것이다.</p>
<p></p>
<p>그래서 부처님의 이름 가운데 여래를 제일 처음에 두고 있고, 대승경전에서 부처님을 주로 석가여래라고 칭하는 이유도 그 이름의 의의가 큰 때문이다.</p>
<p><font color="#013add">  * 진여는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개념의 하나로서 우주만유에 보편하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본체이다. 논리적이거나 사상적 개념 또는 언어나 문자로는 미칠 수 없고 오직 깨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지다.</font></p>
<p></p>
<p>② 응공 (應供)</p>
<p>  이것은 아라한의 번역으로, 응수공양의 뜻으로 남의 공양을 응당히 받으시는 분을 상징한다. 일체 번뇌를 소멸하시며 천인(天人)이 공양하니 이에 응신하신다는 뜻이다.</p>
<p></p>
<p>③ 정등각 (正等覺)</p>
<p>  이는 삼약삼붓다의 번역으로 올바로 모든 것을 다 환히 깨달았는 뜻이다. 그래서 정변지(正邊知)라고도 하는데, 이는 고집멸도의 모든 법을 아시니 온갖 참됨과 거짓을 살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p>
<p></p>
<p>범어의 ‘삼약’은 훌륭하다. 완전하다라는 뜻이다. 삼약삼붓다는 올바로 두루두루 모든 것을 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낮은데 앉아있어도 높은데서 보는 것처럼 전부 다 속속들이 보고 알며, 그러면서도 이야기 안하고 혼자서 미소짓고 소리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훌륭한 인격자이다.</p>
<p></p>
<p>④ 명행족 (明行足)</p>
<p>  비디야차라나삼판나의 번역이다. 명(明)과 행(行)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명행족으로 번역되었다.모든 것을 다 보는 눈을 가진 천안(天眼), 과거생, 현생, 내생을 다 아는 숙명(宿命),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아는 누진(漏盡)의 밝음을 삼명(三明)이라 하는데, 명(明)은 모두 꿰뚫어 훤히 <br />지혜롭게 다안다는 말이다. 행이란 신구의(身口意)의 행업을 말한다. </p>
<p> </p>
<p>즉, 명행이 갖추어졌다 함은 계정혜(械定慧)의 삼학(三學)에 의해 바른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삼명육통을 얻으셨다는 의미다.</p>
<p></p>
<p>육신통(六神通)은 위의 삼명에 천이통(모든 것을 다 듣는 귀를 가진 것,) 타심통(상대방의 마음을 보는 것), 신족통(어디든지 다 갈 수 있는 발을 얻는 것)을 말한다. 육신통 가운데 누진통을 제외한 나머지는 마왕 파순, 천상의 왕, 극락의 사람들도 갖추고 있으되, 누진통은 오직 부처님만 지니고 계신 능력이다. </p>
<p> </p>
<p> ⑤ 선서 (善逝)</p>
<p>  선서는 범어 ‘수가타’의 번역인데, ‘수’는 잘이라는 말이고 ‘가타’는 가다, 즉 잘 가신 분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선서(善逝)로 번역되었는데, 서(逝)는 ‘가다’의 의미이다. 부처님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잘 가신 분, 사바세계로부터 잘 가신 부처님, 모든 중생의 갈 길을 잘 밝히신 분이심을 뜻한다.</p>
<p></p>
<p>⑥ 세간해 (世間解)</p>
<p>  ‘로카비드’의 번역이다. ‘로카’는 세간(世間)이고 ‘비드’는 안다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다. 즉, 세간의 모든 중생사를 결정하고 고민해 주시는 분이심을 가리킨다.</p>
<p> </p>
<p> 원래 ‘로카’라는 말은 ‘깨어지게 되어있는 것’, ‘오래 못가는것’등의 의미가 있는 말인데, 세간살이를 일컫는 말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이치를 배운 불자들은 미리미리 대책을 세우며 살아야 될 것이다. 세간란 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기에 파란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다.</p>
<p></p>
<p>⑦ 무상사 (無上士)<br />  최상의 인간이라는 말로,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원어는 ‘아눗타라푸루샤’이다. 한자로 푸류샤를 사(士)로 번역했지만 실은 사람(人)이라는 뜻이다. 영원한 광명, 영원한 진리를 체득하신 부처님, 광명이며 진리당체이신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을 의미한다.</p>
<p> </p>
<p> ⑧ 조어장부 (調御丈夫)</p>
<p>  푸류사다미야사라틴의 번역으로, ‘다미야’는 길들인다. ‘샤라틴’은 대장부,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다. 즉, 장부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사람들을 잘 길들이는 대장부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조어장부라고 함은 여러 가지 적절한 방법과 가르침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조절하고 제어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뜻한다.</p>
<p> </p>
<p>  ⑨ 천인사 (天人師)</p>
<p>  샤스타 데바마누시야남의 번역으로서 ‘샤스타’는 스승이라는 말이다. 데바는 신, 마누사야는 사람이고 그 끝은 복수의 소유격이다. 즉, 신과 인간들의 스승이라는 의미다. 그들을 무한한 행복, 영원한 광명으로 인도하는 모든 육도 중생의 스승이다.</p>
<p> </p>
<p>  ⑩ 세존 (世尊)</p>
<p>  세존이란 바가바트의 번역인데, 복덕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 말은 옛날부터 있던 말로, 여래십호 가운데 바가바트라는 말만은 다른 종교에서도 쓰던 말이고, 그 밖의 9가지는 불교의 독특한 말이다. 붓다라는 말은 자이나교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여래십호가 아니니 별문제다</p>
<p> </p>
<p> 부처님 당시 제자들은 스승을 세존이라고 불렀다. 이는 복덕과 지혜를 다 갖추시고 그 은혜를 중생에게 베푸시므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존귀하게 생각하는 분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석존이라는 말은 석가세존의 준말이고, 세존 앞에 불(佛)을 붙혀 불세존(佛世尊)이라고도 한다. 불(佛)은 불타의 준말로 각자(覺者)라는 말이다.</p>
<p> </p>
<p>이처럼 부처님은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시는 각행(覺行)이 원만하신 분을 말한다. 그래서 <br />부처님을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스스로 깨닫고 있다는 면에서 보면 깨달은 지혜가 본지(本旨)를 이루고, 또 남을 깨닫게 해준다는 면에서 보면 자<br />비(慈悲)가 본지를 이룬다. 이렇게 자각의 지혜와 각타의 자비, 이 두가지가 모자람없이 만족된 행위를 각행원만이라고 한다. 또한 부처님에게는 특유한 덕성(=공덕)이 있는데 이것에는 십<br />력(十力), 사무외(四無畏), 18불공법(不共法), 32상(相) 80종호(種好)등이다.</p>
<p> </p>
<p> (2) 십력 (十力)</p>
<p>  「구사론」27, 「잡아함경」, 「관무량수경」등에 십력이 소개되었는데 일체를 요지하시는 부처님은 신묘불가사의한 능력을 행하신다. 이 능력들은 모두가 아는 힘이다. 그만큼 부처님은 잘 아시는 분이고 지혜로운 분이심을 의미한다.</p>
<p> </p>
<p> ① 지시각비처력 (知是覺非處力)</p>
<p>  이것은 시(是)를 알고 비(非)를 아는 것, 시처(是處)와 비처(非處)를 아는 힘을 말한다. 간단히 시처비처력(是覺非處力)이라고 하면 외우기 쉽다. 즉, 옳고 그름(시비)을 분명히 아시는 힘을 말한다. 옳은 것을 도리(道理)라고 하고 그른 것을 비리(非理)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바른 도리와 바르지 못한 도리를 여실히 알아서 잘 분별하는 힘이다. 이는 지혜의 힘을 가지신 부처님의 능력이시다.</p>
<p></p>
<p>② 지업보력 (知業報力)</p>
<p>  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얻는 모든 업의과보에 대해 그 이유와 원인을 아시는 능력이다.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간단히 업력이라고만 했다. 업과 과보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p>
<p> </p>
<p> ③ 지제선삼매력 (知諸禪三昧力)</p>
<p>  가지가지 선삼매를 아는 힘, 모든 해탈과 선정을 다 통달하여 아시는 능력이다. 간단히 정력(定力)이라고 할 수 있다.</p>
<p></p>
<p>④ 지타중생제근상하력 (知他衆生諸根上下力)</p>
<p>  중생들의 근기(根機)의 상하를 아는 힘으로, 줄여서 근력(根力)이라고 한다. </p>
<p> </p>
<p> ⑤ 지타중생종종욕력 (知他衆生種種欲力)</p>
<p>  중생의 욕구나 이해의 정도를 아는 힘으로서, 줄여서 욕력(欲力)이라고도 하는데, 중생들의 갖가지 발원을 아는 힘이다. 잠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십력이 모두 아는 힘과 관련된 능력이라고 했는데, 보다시피 우선은 알아야 그 다음에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해준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발원까지도 알아서 살펴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발원(欲)과 욕심(慾)을 구별해야 한다. 발원이 없는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부처님도 초년에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발원을 품고 <br />이것을 위해 얼마나 끈기있게 정진하셨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br />다.</p>
<p> </p>
<p> ⑥ 지세간종종성력 (知世間種種性力)</p>
<p>  세간 중생의 성격을 아는 힘이다. 여기서 성(性)이란 마음바탕을 가리킨다. 성(性)과 욕(欲)은 약간 차이가 있는데, 중생의 성류(性類)에 따라 성력(性力)은 각기 달라 그들이 머무는 세간도 각기 다른데 부처님께서는 이를 다 아시는 능력을 말한다.</p>
<p></p>
<p>⑦ 지일체도지처상력 (知一切道智處相力)</p>
<p>  이것은 업에 의해 나타나는 세계를 아는 힘이다. ②의 업력(業力)과는 구별하여 이것을 과력(果力)이라고 한다.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업을 지으며 살게 되는데 문득 내가 하고 있는 일(=업)을 돌이켜 보고 반성하도록 하는 힘에 해당된다.다음 세가지 능력은 6신통의 앞 세가지이다.</p>
<p></p>
<p>⑧ 지숙명력 (知宿命力)</p>
<p>  숙명을 아는 힘, 중생의 과거세를 다 기억하여 아시는 지력(知力)을 말한다.</p>
<p></p>
<p>⑨ 지천안력 (知天眼力)</p>
<p>  중생이 나고 죽음을 보고 미래의 천함과 고귀함, 행과 불행을 각각 그 업에 따라 다 아시는 능력이다.</p>
<p> </p>
<p> ⑩ 지누진력 (知漏盡力)</p>
<p>  번뇌가 다 없어진 것을 자각하는 힘이다. 부처님은 모든 번뇌를 끊는 열반을 스스로 아시는 능력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여래십호의 공덕을 갖추시고 십력육신통을 가지고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이다. 이는 오직 중생을 향한 대자재비심의 발현이다. </p>
<p></p>
<p>(3) 4무외 (無畏)</p>
<p>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에 있어서 두려움을 갖지 않는 다는 말로, 이것을 자신감할 때의 자신(自信)이라고 번역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p>
<p> </p>
<p> ① 법무소외 (法無所畏)</p>
<p>  여기서 법(法)이라는 것은 모든 현상이라는 말인데, 일체 법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게끔 되어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모든 현상에 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자신을 갖추신 것이다.</p>
<p></p>
<p>② 누진무소외 (漏盡無所畏)</p>
<p>  누(漏)는 번뇌이고, 누진은 고통의 원인인 번뇌가 다했다는 뜻이다. 누진무소외는 모든 번뇌, 모든 잘못을 다 끊어버렸다는 자신을 갖추신 것이다.</p>
<p></p>
<p>③ 설장도무소외 (說障道無所畏)</p>
<p>  설장도는 장도(障道)에 관해 설하는 것이고, 장도는 도를 이루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가르킨다. 즉 번뇌이다. 끊어야 하는 번뇌에 대하여 설법하는데 있어 조금도 의심이 없는 자신을 갖추신 것이다. </p>
<p> </p>
<p> ④ 설진고도무소외 (說盡苦道無所畏)</p>
<p>  이는 번뇌를 끊는 쪽으로 인도하는 도리를 틀림없이 설하는 자신을 갖추고 계심을 뜻한다. </p>
<p> 다음 장에서 살펴볼 사성제와 팔정도가 있는데, 바로 팔정도 (고통을 멸하는 길)를 자신있게 설법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한것이 설진고도무소외이며, 고통의 원인이 되는 탐진치(貪瞋癡)에 대해서 자신있게 설할 수 있는 자신이 바로 설장도무소외이다.</p>
<p></p>
<p>그러므로 4무외는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어서 자신에게나 이웃에게나 자신만만해진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처님을 사자(獅子)라고도 하며, 부처님은 ‘사자후(獅子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p>
<p> </p>
<p> (4) 18불공법 (不共法)</p>
<p>  부처님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18불공(공통되지 않는)의 공덕이 있다. 옛날에는 십력, 사무외, 삼념주(三念住), 대비(大悲)를 합쳐서 18불공이라고 했으나 대승불교에 와서는 다른 특징을 들어서 말한다.  대승불교이전에 18불공의 세가지에 해당되었던 삼념주(三念住)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고 18불공을 설명하기로 한다.</p>
<p></p>
<p>삼념주(三念住)는 부처님의 정념(情念), 정지(靜止), 올바른 지혜에 편안히 거하고 계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항상심(恒常心) 또는 평등심(平等心)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는 것인데, 만나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항상 평등한 마음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즉, 삼념주는 평등한 마</p>]]></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1:44:15 +0900</dc:date>
	</item>
	<item>
	<title>불교탐구 - 제2부 삼보 -  4장 부처님 교설</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11</link>
	<description><![CDATA[<p><strong>제 4 장 부처님의 교설</strong></p>
<p>  법(法)이라는 말은 의지하는 것, 지탱하는 것 등의 어원적 의미가 있는 말인데, 그 적용범위에 따라 보편진리, 종교적 교리, 법률이나 관습을 일컫는 사회적 규범, 행위, 윤리, 도덕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말이다. 불교에서도 진리나 교리 그밖에 어떤 현상을 성립시키는 이치, 이러한 이치를 지닌 현상 하나하나를 일컬어 법(法)이라고 통칭하는데, 사실 이것들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것이다. </p>
<p> </p>
<p>우리는 지금부터 불교의 창시자인 석존의 45년간의 설법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 내용은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시대의 기본이론을 구성하고 있다. 그 중에는 사성제설, 12연기설, 업력설, 무상론, 무아론 등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특히 인생의 현상과 그 본질에 대한 불교의 총체적인 입장을 밝힌 것으로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p>
<p> </p>
<p>따라서 제각기 따로 설명하기보다는 크게 사성제와 삼법인을 줄기로 삼고 다른 것을 연관지어 설명하면 훨씬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사성제와 삼법인 등 여러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함경」의 법(法)에 의거하여 설명하되,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논의된 것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p>
<p><br /><font color="#013add"><strong>1. 사성제 (四聖諦)</strong></font></p>
<p>  제(諦)라는 것은 진리의 도리, 깨달음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사성제라고 하는 것은 인생에 관한 모든 문제와 그 해결방법에 관한 온전한 네가지 깨달음이다. 즉, 인생의 고통이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며,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치유의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살핀 것으로,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말한다.</p>
<p> </p>
<p> 이것은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녹야원으로 가셔서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 최초로 설법하신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서, 부처님이 주로 초창기에 설하신 것이다.</p>
<p> </p>
<p>사람을 향하여 설법한 내용인 사성제는 자연의 법이 아니라 인생의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어떠하고 또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계신 중요한 법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p>
<p><br />  (1) 고제 (苦諦)</p>
<p>  卍. 4고 (苦)</p>
<p>  인간사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의미다. 본래부터 근본적인 괴로움을 이루고 있는 내용으로서 만물이면 무엇이나 겪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4고(苦)가 있다.</p>
<p>  ① 생(生)은 태어나는 것인데,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기는 아기대로 고통을 겪는 사실을 설하신 것이다.<br />  ② 노(老)는 늙는 것인데, 인간이 늙어 가는 고통도 큰 고통의 하나이다. 늙어서 힘을 못 쓰고 뒷전에 물러나야만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닐수 없다.<br />  ③ 병(病)은 지구상의 인간에게 찾아오는 가장 고통스런 대상 중의 하나이며 예고없는 병으로 죽음이 앞당겨 지기도 한다.<br />  ④ 죽음(死)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죽음 그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보고싶은 사람이나 애착을 갖고 있는 그 무엇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고통이다.  이러한 생로병사의 고통 외에도 인간에게는 네가지 고통이 더해진다고 설하셨다. 즉, 8고(苦)는 4고(苦)에다 다음 네가지가 더해진다.</p>
<p> </p>
<p>卍. 8고 (苦)</p>
<p>  ⑤ 애별리고 (愛別離苦) : 사랑하는 것과의 이별의 고통<br />  ⑥ 원증회고 (怨憎會苦) : 미워하는 것과의 만남의 고통<br />  ⑦ 구부득고 (求不得苦) : 구하려는 것을 얻지 못하는 소유욕으로부터의 고통<br />  ⑧ 오취온고 (五取蘊苦) :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br />등의 오온(五蘊)＊에서 오는 괴로움, 즉 인간의 제 조건을 취함으로 인한 고통 등이다.</p>
<p> </p>
<p>부언하면, 부처님의 고통의 모습을 이렇게 여덟가지로 규정하고, 어떤 인생이든지 이런 고통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첫 번째 깨달음인 것이다.</p>
<p>이와 같이 8고(苦)가 있고 이 8고로 인하여 108고가 있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8만 4천 가지의 고뇌가 있다.</p>
<p> </p>
<p>이렇듯 삶은 무한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108고와 8만 4천 고뇌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라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염주알이 108개인 것도 우리의 고통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인도인들은 가장 큰 수를 8만이라고 한다. 여기에 4천이 추가된 것은 인간의 고뇌가 그만큼 무한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p>
<p> </p>
<p>요컨대, 인생이 고통이라는 자각, 이것만해도 깨달음의 제일보(第一步)를 내딛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았다고 부처가 되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된다.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깨달아가는 길인 것이다. 그 무한한 고통도 그것의 근원을 제거하면 순식간에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p>
<p> </p>
<p> 불교에서는 인생은 이미 정해져있다는 예정론 따위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전생의 업보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열심히 수행하면 업보를 제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순수 우리의 의지에 의하여 지혜롭게 얼마든지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지혜로움이 있어야 한다. 진리를 알면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진리는 물질 그 자체가 이미 공(空)이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면 된다. 우리는 부지런히 일해서 얻은 양식에 감사하고 주어진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운명의 신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p>
<p> </p>
<p><font color="#013add"> * 오온이란 다섯가지가 모여 쌓인 것이라는 뜻인데, 물질계와 정신<br />계 양면에 걸쳐 작용하는 일체의 변함이 있는 색, 수, 상, 행, 식의 <br />다섯을 말한다.</font></p>
<p><br />  (2) 집제 (集諦) 와 연기법 (緣起法)</p>
<p>  부처님은 우리에게 인간세가 본래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고, 이어서 고통의 원인에 대하여 가르쳐주신다. 부처님은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貪瞋癡)라는 세가지 독소(삼독)가 있어서, 이것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잘못되어 여러 가지 고통을 스스로 만들게 된다고 한다. 즉, 모든 고통의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p>
<p> </p>
<p>집(集)은 모인다는 뜻으로, 모든 것은 모이고 합해져서 존재를 이루고 있음을 보신 것이다. 이는 곧 불교의 무아(無我)사상이 되는데, 모든 것은 인광에 의하여 흩어지고 모여지고 또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고정된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자연과 더불어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고(苦)가 생기게 된다. 모든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 때문에 항상 집착하고 이것들이 번갈아 닥쳐오므로 고(苦)의 원인이 된다.</p>
<p> </p>
<p>집제설은 주로 12연기설로 전개되는데, 12연기설은 번뇌로부터 고(苦)로의 전개과정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슬로우비디오로 현상을 설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연기설은 윤회설과도 관련이 깊은데, 해탈의 경지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보여준다.</p>
<p> </p>
<p> 卍. 존재의 법칙 12연기</p>
<p>  부처님께서 삼천년전에 보리수 아래서 사색과 분석을 통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존재 원리에 대해서 구명(究命)하고 정각(正覺)을 이루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12연기법으로서, 번뇌로부터 고(苦)에 이르는 인과관계를 깨달으신 것이다.</p>
<p> </p>
<p>사람의 고통은 어디에서 오며, 생명은 어디에서 오며, 궁극적인 귀착지는 어디가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석존은 일체 사물은 모든 인연이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모두 인과관계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고 인생의 고통, 생명, 운명 등은 모두 자신이 인(因)을 짓고 자신이 과(果)를 받는다고 주장하신 것이다. 따라서 12연기설은 일체의 존재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며,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이론으로서, 근본 因(종자)이 있고 이에 부합하는 緣(조건)이 합해질 때 마침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인연의 만남이 끝나면 결국 일체의 존재는 독립적으로 남아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p>
<p> </p>
<p>이것이 바로 불교의 12연기법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 인연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비롯된다)의 준말이다. 일체의 존재는 명백한 관계성에 의해 생겨나며 없어진다는 불교의 연기론은 부처님이 깨달은 정각인 동시에 불교 교리의 근원인 것이다.</p>
<p> </p>
<p>「잡아함경」의 &lt;설법의설&gt;(說法義說 2-296)이라는 원시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p>
<p> </p>
<p>“ 연기법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比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나고 (比起故 彼起)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比無故 彼無),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한다 (比滅故 彼滅). 곧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행(行)이 일어나고 행(行)으로 식(識)이 일어나고 식(識)으로 명색(名色)이, 명색(名色)으로 육처(六處)가, 육처(六處)가 촉(觸)이, 촉(觸)이 수(受)로, 수(受)가 애(愛), 애(愛)가 취(取), 취(取)가 유(有), 유(有)가 생(生)이되고 생(生)으로 말미암아 노사(老死)와 우비고뇌가 된다. 그리하여 괴로움이 모이는 것이요, 이것이 연기의 법이다.”</p>
<p> </p>
<p>이는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고뇌가 왜 생기며 그 근원을 규명하고 그것을 끊어 고뇌를 없애는 12단계의 과정을 설한 것이다. 이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상관해서 생하고 멸하는 이치의 가리킴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 연기의 법 위에서 모든 사상과 실천(수행)체계가 구축된다. 이것을 12연기라고도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p>
<p> </p>
<p>① 무명 (無明)</p>
<p>  무명은 무지(無知)의 뜻으로,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일어나는 생존욕, 본능적 생명력, 생활의 의지 등을 말한다.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며, 안과 밖을 알지 못하며, 업보를 알지 못하며 삼보를 알지 못하고 사성제와 연기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불교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통달하지 못한 상태로서, 참 지혜가 없어 어둡고 어리석어 밝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p>
<p> </p>
<p>② 행 (行)</p>
<p>  무명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모든 욕망의 움직이는 상태를 말하며 몸과 마음으로 짓는다고 본다. 이는 신행(身行), 언행(言行), 의행(意行)의 삼행 즉, 삼업을 말한다. 행은 곧 업이다. 삼업에는 신삼(身三 : 살생, 도둑질, 음행)과 구사(口四 : 망언, 도리에 맞지 않는 꾸민 말, 험담, 양설)와 의삼(意三 :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바르지 않은 생각)이 있고, 보(報)는 지은 업에 대한 응분의 댓가이다. 이것이 인과응보이다. 다시 말해서 무지무명을 연함으로써 그릇된 삼업을 만드는 것이 행이다.</p>
<p> </p>
<p>③ 식 (識)<br /> 행을 하다보면 무엇인가 인식하는 작용이 생겨나며 이는 행위의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행에서 얻어지는 분별심 (선, 악)이기도 하다. 식은 6식이 있어, 눈의 식, 귀의 식, 코의 식, 혀의 식, 몸의 식, 뜻의 식이 있다.이것은 모태 안에서부터 최초로 발생하는 한 찰나＊의 오온(五蘊)이다.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이 생긴다. </p>
<p>  <font color="#013add">* 시간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찰나’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시간 단위이다. 「대비바사론」에는 두 남자가 몇 가닥의 비단실을 잡아당기고 다른 한 남자가 날카로운 칼로 단숨에 이 실을 절단할 때 64찰나가 경과한다고 정의하고 있다.</font></p>
<p> </p>
<p>  ④ 명색 (名色)</p>
<p>  인식(識)의 대상, 즉 객관을 표시한다. 명(名)이라 하는 것은 마음이요 색(色)은 물질, 온(蘊)이 아직 완벽하게 조화되지 못한 상태를 이른다. 즉, 마음이란 형상이 없는 4온 (受, 想 行, 識)이요, 물질이란 4원소 (地, 水, 化, 風)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명색으로 말미암아 육처가 생긴다.</p>
<p> </p>
<p>⑤ 육처 (六處)</p>
<p>  이는 명색을 받아들이는 곳이다. 우리 몸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 6근(根)이 구비되어진 상태로, 감각과 지각 능력에 해당한다.</p>
<p> </p>
<p> ⑥ 촉(觸)</p>
<p>  이러한 여섯 가지 기관을 통해 바깥 경계의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등을 의식한다. 쉽게 말하자면, 촉은 6근을 통해 6식을 작용하게끔 하는 자극 곧 원인이다. 이것만으로는 선악과 무관한 인식론이지만, 식(識)이 무명(無明)에 기초한 잘못된 인식이기 때문에 미혹을 야기하게 된다.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생긴다.</p>
<p> </p>
<p> ⑦ 수 (受)<br /> 감각 기관이 바깥 경계를 접촉한 다음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단계로써 좋고 나쁨을 느끼는 감정, rhl롭다는 느낌, 즐겁다는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세 가지가 있다. 우리가 동일물을 인식해도 느낌의 차이가 있는 것은 수에서 기인한다. 수에서 애가 생긴다.</p>
<p> </p>
<p>⑧ 애 (愛)</p>
<p>  苦와 樂을 분별해서 좋은 것을 보면 애착심을 내어 열망하고 강한 욕구를 내는 것이다. 욕망에는 삼애(三愛)가 있는 바, 욕계의 모든 것을 탐내는 마음 (욕애에는 식욕, 수면욕, 음욕의 육체인 욕구와 명예욕, 재물욕의 정신적 욕구가 있어 이를 5욕이라 한다), 색계의 모든 것을 탐하는 욕망, 무색계의 모든 것을 탐하는 욕망 등이다. 애로 말미암아 취가 있게 된다.</p>
<p> </p>
<p> ⑨ 취 (取)</p>
<p>  애착심이 증장되어서 이를 자기의 소유로 하고자 하는 생각이며 나쁜 것을 버리려는 행동이다. 취란 집착으로, 4취가 있다. 즉, 욕망, 견해, 계(戒), 나(我)에 대한 집착이다. 취는 유를 말미암는다.</p>
<p> </p>
<p> ⑩ 유 (有)</p>
<p>  소유욕이 따라 선, 악의 업을 지어 앞의 愛와 取의 인연에 의해 과보가 있게 되는 윤회생존을 말한다. 유(有)는 존재라는 뜻이니 존재에는 삼유(三有)가 있다. 즉, 욕계에 있는 존재, 색계에 있는 존재, 무색계에 있는 존재이다. 이렇듯, 애역과 취착의 선악업이 습이 되어 미래의 과(果)를 발생시키게 된다.</p>
<p> </p>
<p>⑪ 생 (生)</p>
<p>  생이란 중생 (생명이 있는 것)이 태어나서 오온과 삶의 바탕과 육처와 명근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유(有)의 지은 업연으로 미래의 생을 받게 됨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는 일상생활의 경험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의 의미도 있다. 즉, 미래의 과(果)를 만드는 위치가 바로 생인 것이다.</p>
<p> </p>
<p> ⑫ 노사 (老死)</p>
<p>  생겨남을 원인으로 하여 생애에서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오온(五蘊)을 벗어난다. 12연기 가운데 중심고리는 무명(無明)과 식(識)과 유(有)이며, 특히 무명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12인연의 순서는 순서대로도 할 수 있고 역순으로도 할 수 있는데, 원인에서 결과로 이르는 순관(順觀)의 경우는 무명이 중생 유전의 기점이 되며, 역관(逆觀)으로 볼때도 무명은 모든 생사를 일으키는 근본원인이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명(無明)이 없어야 된다. 무명이 없으면 명(明)만 남아서 전혀 다른 인과를 형성했을 것이고, 명(明)에 의한 12연기법은 좋은 생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p>
<p> </p>
<p>또한 식(識)이 중요한 이유는 식이 명색이 생기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즉, 식은 생명체의 정신과 형체를 이루는 직접 원인이자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有)는 사상행위 즉 업(業)을 의미하는 것인데, 업은 내세의 과보를 일으켜서 내세 윤회의 원인임과 동시에 조건이기에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p>
<p> </p>
<p>  이상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12연기론이 우리 중생의 삶과 죽음에 대한 원인과 결과의 구체적 관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양중(三世兩重)의 인과(因果)로 정리하여, 무명과 행은 과거세의 두가지 인연이며, 식, 명색, 육처, 촉, 수의 고(苦)는 현세의 다섯가지 과(果)이고, 애, 취, 유는 현세의 세가지 인(因)에 해당되며, 생노사는 미래세의 2과(果)로서 고(苦)에 해당되는 것이다. 과거세의인(因 무명과 행)이 현세의 과(果 식, 명색, 육처, 촉, 수)와 연(緣)을 지어 하나의 인과가 결정되고, 현세의 인(애, 취, 유)이 미래세의 과(생노사)와 연(緣)을 맺어 또 다른 하나의 인과를 만들게 된다. 이 두 가지 인과를 통합해 보면 삼세양중(三世兩重)의 인과가 성립된다. 이화같이 12연기법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복합다단한 현상이므로 해석에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p>
<p> </p>
<p><strong>[ 삼세양중인과 (三世兩重因果) ]</strong></p>
<p>順<br />觀<br />① 무명</p>
<p>感(연분)<br />과거세의 二因<br />重因果<br />② 행<br />業(因)<br />③ 식<br />苦(果)</p>
<p><br />④ 명색<br />⑤ 육처<br />현재세의 五果<br />⑥ 촉</p>
<p><br />⑦ 수<br />⑧ 애<br />感(연분)<br />현재세의 二因<br /> 重因果<br />⑨ 취<br />逆<br />觀<br />⑩ 유<br />業(因)<br />⑪ 생<br />果(果)<br />미래세의 二果<br />⑫ 노사</p>
<p><br />  卍. 업보윤회설과 육도 (六道)</p>
<p>  윤회(輪廻)란 하나의 생으로부터 다음의 생으로 재생(再生)을 거듭하는 것으로 생사(生死)와 비슷한 말이다. 윤회를 생존의 형식으로 보면 유(有)가 된다.</p>
<p> </p>
<p>우리는 흔히 수레바퀴가 돌아서 정지하지 않는 것에 비유하여, 윤회(輪廻)를 단순히 중생의 생사가 유전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석존께서 설법하신 윤회사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고, 12연기설과 윤회업력의 사상을 통일시켜 업보윤회설을 제시하며 중생의 운명이 각각 다른 이유를 설명하셨다.</p>
<p> </p>
<p> 석존은 업력이 중생의 과보 원인이라 하셨고, 또 중생의 생사유전되는 원동력이라고 하셨다. 업력으로 중생의 행위와 행위를 지배하는 의지가 생기고, 맨 처음 하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심리활동, 즉 의업(意業)이 있고, 다음이 구업(口業)이며 신체상으로 행위가 드러나는 신업(身業)이 있게 된다. 부처님은 이러한 중생의 3업이 종종 무명, 즉 무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셨다. 인생은 무아이며 무상이며 궁극적으로는 소멸하게 되는데도 자신에게 내(我)가 남아있기를 바라므로 이러한 중생의 행위는 종종 무지의 표현이며, 이로 인한 행위가 괴로움의 총체적 근원이라는 것이다.</p>
<p> </p>
<p> 업(業)은 역량과 작용, 공덕과 과실을 나타낸다. 석가모니는 업력의 영향을 없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 중생이 지은 선업과 악업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일으킨다고 한다. 그런데 업의 성질이 각각 같지 않기 때문에 얻게 되는 과보 역시 다르며, 내세에 이르게 되는 윤회의 상태도 동일하지 않게 된다. </p>
<p> </p>
<p>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중생이 지은 선악의 업보에 따라 6도(道)윤회를 겪는다고 한다. 중생은 육도 (=여섯 세상)를 윤회한다. 이것은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아수라계, 사람계, 천상계이 그곳이다.</p>
<p> </p>
<p>  ① 지옥계</p>
<p>  지옥(地獄)은 너무나 잘 알려진 곳으로 인간의 죄를 벌하는 곳이다. 살아서는 요행이 국법의 심판을 면했다 할지라도 죽어서는 죄과의 몇십배나 되는 고통으로 심판하는 곳이 지옥이다. 죽은 후의 일이라고 대비하지 않는 이도 많을 것이다. 죽음의 세계에도 이 세계와 똑<br />같은 감각과 환경이 있으므로 지옥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일의 일이 되는 것이다.</p>
<p> </p>
<p> 삶을 매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금생이 바로 전생의 업보로 인한 지옥 속의 삶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은 윤회하는 세상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곳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함부로 인과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다가는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법이다.</p>
<p> </p>
<p>  지옥은 8만 4천개가 있다. 그 중에서도 8열(熱)지옥과 8한(寒)지옥이 있는 근본지옥, 8열지옥 중의 제 8아비지옥은 가장 고통스런 무간(無間)지옥으로 유명하며, 근변(近邊)지옥, 고독(孤獨)지옥 등이 있다.</p>
<p> </p>
<p> ② 아귀계</p>
<p>  이는 글자 그대로 배고픈 귀신(餓鬼)들의 세계를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49일만에 다른 몸을 받게 되는데, 이 동안은 누구든지 중음(中陰)에서 귀신의 형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49일이 지나도 아직 귀신 상태로 남아있는 중생이 있을 수 있는데, 이들은 통상 집착이 많아 다른 세계로 가지 못하고 살아있을 때처럼 돌아다니는 영혼이다. 귀은 자기 존재가 진정 있다는 어리석은 집착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들 영혼은 귀신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스스로의 존재가 허상임을 받아들이고 집착을 놓게 될 때 비로소 다른 몸을 받아나게 된다.</p>
<p> </p>
<p>이와 같이 영혼은 비물질로서, 본래 없는 것이다. 죽은 영혼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승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질 때에만 비로소 귀신의 세계를 벗어나게 된다. 사찰에서 죽은 영혼을 천도해주는 이유는 법문을 들려주어 영혼이 스스로 깨달아 다른 몸을 받든지 아니면 일시에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마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49재(齋)를 올려 죽은 자로 하여금 공덕을 닦도록 해주는 일은 남은 자가 해야하는 필수 작업인 것이다.</p>
<p> </p>
<p>49일간의 정화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강한 집착을 가진 어리석은 영혼들은 그대로 영혼으로 남아 있게 되는데, 이러한 영혼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기 때문에 바로 아귀(餓鬼)가 된다. 그래서 귀신 중에는 아귀가 가장 많고, 대개 귀신은 아귀다. 이들은 귀신 중에서 가장 괴로운 귀신으로, 천년 만년동안 한끼도 못먹어서 항상 배고프고 목마른 고통을 받는데, 그러므로 영혼들은 아귀인 것이다. 이들은 자손의 제사에 의지하거나 버린 물건에 깃들여 살게 된다. 사찰에서는 매년 7월 15일 백중 우란분재일에 아귀들과 지옥이나 축생의 과보를 받고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위해 재(齋)를 베푼다.</p>
<p> </p>
<p>  ③ 축생계</p>
<p>  이는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여 뒤바꿔가면서 먹이가 되어 주는 사람 이외의 동물 세계이다. 인간으로 있는 동안 지헤를 닦지 않으면 태어나게 되는 곳이다.</p>
<p> </p>
<p> ④ 아수라계</p>
<p>  아수라(阿修羅)는 범어의 음역이다. 의역하면 비천(非天)이나 마신(魔神)으로서, 원래 아수라는 투쟁을 일삼는 전투 신이며, 능력은 천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화를 많이 내고 싸움을 좋아해서 천상과 같지는 않다. 본래는 천국에 있었는데, 천상의 덕성을 잃어서 천계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아수라는 아귀와 비슷한 귀신계로 전락되었다. 전투를 좋아하고 항상 마음속에 있는 불만을 조절하지 못하고 아수라장으로 뒤죽박죽 자기들끼리 싸우고 소리치는 곳인데, 자기 이익만 챙기고 남을 괴롭히는 것을 일삼는 사기꾼, 폭력배, 건달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p>
<p> </p>
<p> ⑤ 인간계</p>
<p>  이는 큰 복이 있어야 태어나는 곳이다. 사람은 마음 닦는 공부를 하여 성불에 이를 수도 있지만 자만하면 악의 구렁텅이에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참으로 묘한 선택의 자유가 있는 중생계인 것이다. </p>
<p> </p>
<p>⑥ 천상계</p>
<p>  이는 극락처럼 복을 많이 지은 중생이 나는 곳이다. 자연이며 천연(天然) 그대로여서 청정광명함이 인류세간과 비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인 신(神)을 가리키며, 천신(天神)이라고도 한다. 중국 도교의 옥황상제는 불교에서 말하는 천신에 해당된다.</p>
<p> </p>
<p>욕계의 천상에는 6천(天)이 있다. 사람이 행한 공덕의 대소에 따라 죽은 후에 높고 낮은 여러 천계에 올라가게 된다. 통상 사왕천이 인간세에 가장 가깝고, 그 다음에 도리천이 있는데, 제석천＊은 도리천의 주인으로서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자다. 천상이 육도 중에서는 최상의 단계이나 완전한 해탈을 얻은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생사윤회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천상계와 극락세계를 혼동해서는 안된다.<br /> <br />  극락은 서쪽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나서 아미타불이 게신 세계인데, 중생계에서도 가장 복이 수승한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므로 아름답고도 기이한 세계이다. 극락의 중생은 전혀 괴로움이 없고 항상 즐거운 일만 있다하여 극락이라 한다. 이와 달리 천상계의 중생은 항상 즐거움이 있되 극락세계처럼 괴로움이 완전히 끊어진 곳이 아니다. 그래서 천상계는 육도에 속하는 것이다. 천상계는 부처님이 다스리는 곳이 아니고 범천왕(梵天王)이나 제석천왕 등 각각의 천황이 다스리는 곳이다. 그렇지만 윤회하는 여섯 중생계 중에서는 가장 살만한 곳이다. </p>
<p> </p>
<p>육도(六道) 가운데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는 3악도(惡道)라 하고 아수라계, 인간계, 천상계는 3선도(善道)라 한다. 사람은 비교적 높은 단계에 있는 존재지만, 지은 과보에 따라 부단한 고해(苦海)와 윤회유전 속에서 영원을 기약할 수 없다. 오로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경건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육도의 울타리를 벗어나 생사를 벗어난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p>
<p> </p>
<p>또 선정(禪定)의 힘으로 향상되는 단계로 윤회의 세계를 나눈 것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이다. 이 삼계는 각각 ‘욕망과 집착으로 가득찬 세계’(욕계), ‘욕망은 끊었으나 육체가 남아있는 세계’(색계), ‘육체를 가지지도 않고 정신적 요소만으로 된 세계’(무색계)이다. 삼계는 또한 삼유(三有)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윤회하는 생존양식을 통칭한다. 삼계육도는 이처럼 생존의 형식구조이다.</p>
<p> </p>
<p> 이와 같이 석존은 중생의 생명이 죽음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며, 비록 일반적인 정신활동은 형체의 파괴와 함께 정지한다고 할지라도 생존의 맹목적 의지, 관념(=무명), 생시의 활동, 경험(=업) 등은 남아있어 계속 쉼이 없다고 본다. 이러한 생존의지와 관념이 작용하여 사람으로의 가능성을 형성하고 이미 지은 업력에 상응하는 색신(色身)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용하는 무명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를 두고 바로 무아(無我)라 하신 것이며, 이러한 무아의 무주재, 무실체의 의미는 결국 해탈과 맞닿는다.</p>
<p> </p>
<p><font color="#013add">* 제석천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그냥 제석이라고도 한다. 선견성에 살면서 사천왕과 32천을 통솔하면서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를 징벌하는 왕이다. </font></p>
<p> </p>
<p> (3) 멸제 (滅諦)</p>
<p>  불교에서는 인생이 걸어가는 두 가지 상반된 길을 보여주고 있는 데, 인생유전(人生流轉)의 경우이거나 인생환멸(人生還滅)의 경우로 본다. 전자는 탐진치의 악연(惡緣)이 연속되어 환경과 부조화하며 고통을 느끼면서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해결할 방법도 찾지 못하여 환경의 안배대로 윤회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즉, 탐진치의 혼탁한 탁류(濁流)에 떠밀려 고해(苦海)로 흘러들어가는 인생이다. 이런 인생은 유전연기(流轉緣起)에 의한 것이다.</p>
<p> </p>
<p> 반대로, 인생환멸(人生還滅)의 경우는 좋은 인연이 이어져서 열반이라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팔정도라는 원인으로해서 열반이라는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환멸(還滅)의 환(還)은 돌아간다는 뜻이며 멸(滅)은 탐진치를 없앤다는 의미인데, 곧 유전(流轉)의 삶을 타파하고 변혁하며 그것을 반대로 돌린다는 뜻이다. 가령 물의 흐름에 비유하면 탁류가 흘러 바다로 가는 것을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람의 마음은 수행을 하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탐진치로 흘러가게 되는데, 이것을 거슬러서 깊은 산골짜기 바위틈새에서 나오는 맑고 깨끗한 샘물같은 탐진치가 없는 자성(自性)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환멸연기(還滅緣起)를 지닌 인생이 되는 것이다. </p>
<p> </p>
<p>후자의 경우가 바로 여기서 말하려는 멸제의 내용에 해당되는 것이다. 멸제란 인생의 괴로움을 소멸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생의 궁극 목적이며 최고의 경지인 것이고, 불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나아갈 방향이며 목표인 것이다. 이런 멸제의 경지에 도달하면 바로 부처라고 한다. 석존은 고통의 원인을 아시고,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있었으며, 고통이 없는 상태를 깨달으신 분이시다.</p>
<p> </p>
<p>또한 「중(中)아함경」에서 멸제를 ‘애멸고멸성제(愛滅苦滅聖諦)’라고 했으며, 「증(增)아함경」에서는 ‘고진제(苦盡諦)’라고 했다. 애(愛)는 탐욕이며, 멸제는 탐욕을 멸진하여 고통을 제거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이치를 품고 있다. 그래서 탐욕의 멸진은 바로 고통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다. 모든 번뇌의 근원인 집제를 없애면 편안한 상태가 된다. 즉, 병이 나으면 다시금 건강해지는 이치처럼 이러한 멸제의 방법이 곧 도제(道諦)이며, 도제를 통하여 열반, 즉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p>
<p> </p>
<p>이처럼 불교에서는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모든 것이다 멸해 없어진다는 것이 당연한 진리이다. 그래서 설령 병이 들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멸한다는 이치를 안다면 불치병도 반드시 낫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드시 멸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p>
<p> </p>
<p>(4) 도제(道諦)와  팔정도(八正道)</p>
<p>  도(道)는 길, 과정, 방법을 뜻하는 말로, 모든 고통과 번뇌를 제거하여 열반을 얻기 위한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불교에서의 목적지인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부처님은 당시 유행하던 고행주의적 자기학대나 금욕은 해탈을 이루는데 무가치하며 무익하다고 보았고, 더구나 천신께 제사하고 기도한다고 해탈에 이르는 것은 아니며, 또한 심오한 우주만유의 시말(始末)에 대해 탐구하는 것도 해탈에 이르는 길로는 무용지물이라고 보았다.</p>
<p> </p>
<p> 반면에 부처님은 고통이 완전히 없어지는 상태, 곧 열반을 얻는 길이 올바로 사는 길임을 깨달으셨다.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여덟가지 올바른 길을 깨달으시고 가르쳐주셨다. 부처님은 처음 설법하실 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중도(中道)를 주장하셨는데, 이를 위한 8조목이 팔정도(八正道)이다.</p>
<p> </p>
<p>이와 같이 고집멸의 진리는 우리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슬픈 진리이지만, 부처님께서는 마치 병 있는 자에게 치료의 방법을 제시하신 것처럼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을 설하셨는데, 그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팔정도이다.</p>
<p> </p>
<p>불교가 차츰 발전되면서 여기에 4념처(念處), 4정단(正斷), 4신족(神足), 5근(根), 5력(力), 7각지(覺支) 등에 더해져 모두 7과(科) 37도품(道品)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오늘날 7과(科)의 하나에 속하는 팔정도이다. 중요도를 따져 팔정도에 관해 먼저 설명하고 나서, 나머지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p>
<p> </p>
<p> 卍. 팔정도 (八正道)</p>
<p>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뇌를 다 없애버리고 해탈에 이르는 여덟가지 바른 이치의 성불방법인 팔정도는 정견(正見 : 바르게 보라), 정사유(正思惟 : 바르게 명상하라), 정어(正語 : 바르게 말하라), 정명(正命 : 바른 생활을 하라), 정업(正業 : 바른 일을 하라), 정정진(正精進 : 바른게 정진하라), 정념(正念 : 바르게 생각하라), 정정(正定 : 바른 선정에 들어라) 등이다 이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p>
<p> </p>
<p>① 정견 (正見)</p>
<p>  있다&amp;#8228;없다, 좋다&amp;#8228;나쁘다, 옳다&amp;#8228;그르다 등 모든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일체의 분별심이 없이 올바른 견해를 내어 사물의 근본을 보려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언제나 우리의 지식(知識)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진리에 입각하지 않고 내가 알고 견해로 보는 것은 그른것임을 경고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진리의 눈으로 바로 보아야 한다. 간단히 말한다면 정견은 불교에서의 지혜다.</p>
<p> </p>
<p>② 정사유 (正思惟)</p>
<p>  정사(正思惟), 정지(正志)이다. 번뇌가 작용하여 그릇되게 얽혀 버리지 않도록 밝은 지혜로 사물의 이치를 똑바로 보라는 것이다. 즉, 삿된 도를 쫓아서 쓸데없는 수련에 몰두하거나 신비한 현상을 찾지 말고 순수한 수행을 하라는 말씀이다.</p>
<p> </p>
<p>③ 정어 (正語)</p>
<p>  곧고, 바른 진리의 말만을 고운 말, 성실한 말로 하는 것을 말한다. 바르게 말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항상 바르게 전하는 것이다. 진리를 미사여구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깨닫게 해주는 바른 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바른 말을 해라는 것이다. 말은 화자의 인격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항상 똑바르게 말하고 바른 말만 해야 한다. 거짓말은 절대 금물이다. 바르게 말한다고 해도 그른 말일 수 있는데, 거기다 거짓말까지 해서는 더욱 혼란만 초래하게 된다.</p>
<p> </p>
<p>④ 정업 (正業)</p>
<p>  올바로 행동(일)해야 한다는 것으로, 불교의 요구에 합당한 행위를 말한다. 정견(正見)이나 정사유(正思惟)에 의해 바르게 보고 생각된 일이 아니면 절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며, 신(身). 구(口).의(意) 삼업(三業)을 짓지 아니하고 공명정대한 방법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이 반<br />듯하고 절도가 있을 것을 가르친다.</p>
<p> </p>
<p>또한 구체적으로 바른 직업을 가지라는 의미도 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이나 타인에게 직간접으로 피해를 주는 직업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택하지 말고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반드시 생각해서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p>
<p> </p>
<p> ⑤ 정명 (正命)</p>
<p>  올바로 목숨을 유지해나가라는 것이다. 올바른 방법으로 살아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바른 운명, 바른 명령, 바른 복종의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정당한 생활이란 불교의 기준에 입각하여 의식주를 행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수면, 식사, 업무, 운동, 휴식 등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과 건강증진, 일의 능률향상, 경제생활과 가정생활등을 건전하게 이끄는 것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바른 인생을 사는것도 진리를 깨달으려는 구도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p>
<p> </p>
<p>⑥ 정정진 (正精進)</p>
<p>  올바로 정진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방편(正方便)을 말한다. 정확한 노력으로 악을 그치고 선을 닦아 해탈을 향해 정진하는 것이다.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아직 발생하지 않은 악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일어나지 않은 선은 일어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불교의 기준에 의거해서 선악을 구별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자각적 노력을 주장하며 태만과 어리석음을 반대한다.</p>
<p> </p>
<p>⑦ 정념 (正念)</p>
<p>  올바로 생각해서 올바로 기억하고 되풀이 생각하면서 잊지말고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허무맹랑한 사념(邪念)을 버리고 항상 보살의 거룩한 길을 향하여 수행토록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p>
<p> </p>
<p>이는 진리에 대하여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 그른 생각임을 가르쳐준다. 진리는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루 중에 무심과 무념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정념이다. 망념이 가득하여 머리가 맑지 못하면 정념이 아닌 것이다. 사리사욕없이 눈 앞에 있는 일만 보고 오직 열심히 일할 뿐이라야 바로 정념에 드는 것이다.</p>
<p> </p>
<p>⑧ 정정 (正定)</p>
<p>  올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안정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켜 깊은 선정에 들어가서, 불교의 지혜로 세상을 관(觀)하게 되는 것이다. </p>
<p> </p>
<p>이와 같이 팔정도는 불자의 여덟가지 바른 생활이므로 꼭 실천해야 하는 도(道)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정견(正見)과 정명(正命)은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의 두 주된 기둥에 해당되므로 가장 의미가 깊다.   팔정도는 교리가 발달되면서 계(戒), 정(定), 혜(慧)라는 삼학으로 묶어서 풀이된다. 삼학이란 불법(佛法)을 배우는 사람이 지켜야 할 것으로서, 계(戒)는 순결한 행위와 엄중한 수지로서 정(定)과 혜(慧)의 기초가 되고, 혜(慧)는 주체이며, 계(戒)와 정(定)은 방편인 것이다. <br /></p>
<p>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戒)에 속하고,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은 정(定)에 속하며,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은 혜(慧)에 속한다고 한다.  이처럼 삼학은 단독으로 특징지울 수 없고 내재적인 연관성을 지닌 것이어서 학설에 따라서 차dl가 있다. 삼학과 팔정도는 뒤에서 살펴볼 육바라밀과도 연관성이 깊다. </p>
<p><br /><strong>[ 팔정도 도해 ]</strong></p>
<p> </p>
<p>삼 학</p>
<p><br />팔정도</p>
<p><br />육바라밀</p>
<p> </p>
<p><br />계(戒)<br />   정어(正語)<br />지계<br />   정업(正業)<br />   정명(正命)</p>
<p> </p>
<p>정(定)<br />   정념(正念)<br />선정<br />   정정(正定)</p>
<p> </p>
<p>혜(慧)<br />   정견(正見)<br />지혜<br />   정사유(正思惟)<br />인욕<br />   정전진(正定進)<br />정진<br />보시<br />  </p>
<p>卍. 37각지 (覺支)</p>
<p>  각(覺)이란 깨달음이며 지(支)는 종류를 말한다. 그래서 각지(覺支)란 불교의 깨달음의 수단, 깨달음에 향하는 여러 덕목이라는 뜻인데, 다른 말로 37도품(道品)이라고도 한다. 이것 역시 「아함경」에서 강조된 내용으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 우리가 따라야 할 법들을 열거한 것이다. </p>
<p> </p>
<p> 37각지의 서른일곱가지는 별도로 서른일곱개가 아니고 여러 방편들이 모두 합쳐서 서른일곱가지가 된 것이다. 팔정도도 이 중의 여덟가지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팔정도 외에 깨달음을 돕는 29가지 덕목에 대해 설명한다.</p>
<p> </p>
<p>① 4념처 (念處)</p>
<p>  &amp;#8228; 신념처(身念處) : 몸은 부정(不淨)하다고 생각하라<br />  &amp;#8228; 수념처(受念處) : 감각은 고(苦)라고 생각하라<br />  &amp;#8228; 심념처(心念處) : 생각은 무상(無常)하다고 생각하라<br />  &amp;#8228; 법념처(法念處) : 모든 것이 무아(無我)하다고 생각하라<br />  이는 지혜의 힘을 통해 신(身), 감수(感受), 심(心), 법(사물 또는 현상)의 4경(境)의 무명함을 기억토록 하는 것인데, 이것은 부정(不淨)하고 고(苦)하며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한 우리의 현실을 그냥 그래도 정(淨)하며 낙(樂)하며 상(常)하고 아(我)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주는 가르침이다.</p>
<p> </p>
<p> ② 4정근 (正勤)</p>
<p>  &amp;#8228; 생기지 않은 악(惡)은 미리 방지하라 (未生惡令不生)<br />  &amp;#8228; 이미 생긴 악은 아주 끊어 버리라 (己生惡令永斷)<br />  &amp;#8228; 아직 생기지 않은 선(善)은 생기게 하라 (未生善令生)<br />  &amp;#8228;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증대시켜라 (己生善增長)<br />  이것은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의 ‘모든 악(惡)이란 악은 다 행하지 말고, 모든 선(善)은 다 받들어 행하며, 각자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br />다. 또한 이것은 팔정도의 정진하라는 말씀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p>
<p> </p>
<p> ③ 4신족 (神足)<br />  &amp;#8228; 욕신족(欲神足) : 선정을 얻고자 원하는 일<br />  &amp;#8228; 근신족(勤神足) : 더욱 더 노력하는 일<br />  &amp;#8228; 심신족(心神足) : 마음을 올바로 유지하는 일<br />  &amp;#8228; 관신족(觀神足) : 지혜에 의해서 생각하는 일<br />  이는 달리 4여의족(如意足)이라고도 한다. 신(神)이란 신통하다는 뜻이며, 족(足)은 몸이 발에 의지해서 서는 것과 같이 다른 것이 이것에 의지해서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네가지는 선정(禪定)을 체득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건들이다.</p>
<p>  ④ 5근(根)과 5력(力)</p>
<p> </p>
<p> 불교에서는 5근(根)이 중생으로 하여금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게 하는 촉진작용을 한다고 본다. 5력이란 5근의 향상으로 생겨난 다섯가지 능력으로서 해탈에 이르기 위한 힘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마음과 그로부터 발휘되는 힘이 있다.<br />  &amp;#8228; 신(信) : 참된 것(불교)을 쉽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br />  &amp;#8228; 정진(精進) : 용맹스런 수행<br />  &amp;#8228; 념(念) : 대상에 대한 기억<br />  &amp;#8228; 정(定) : 대상에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br />  &amp;#8228; 혜(慧) : 득실을 헤아리는 것<br />  부언하자면, 근(根)과 력(力)은 뿌리에 대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힘인데, 사람이 태어날 때의 타고난 성품을 말하는 근기(根機)와도 관련이 있는 말이다. 이때 근(根)은 마음가짐이요, 기(機)는 몸이나 신체적인 조건 등을 말하는데, 사람에 따라 근기를 달리 갖고 태어난다. 그래서 사람마다 신근이 굳건한 사람, 정진근이 굳건한 사람, 지혜로운 혜근이 굳건한 사람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쓸 때나 자식을 키울 때 그 사람 또는 그 아이의 근기가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p>
<p> </p>
<p>⑤ 7각지 (覺支)</p>
<p>  7각지는 지혜의 기능이 가지는 일곱단계를 가르쳐준다<br />  &amp;#8228; 택법(擇法) : 법의 진위(眞僞)를 택하는 것<br />  &amp;#8228; 정진(精進) : 진실한 법에 따라 정진하는 것.<br />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태해지지 않는 것<br />  &amp;#8228; 희(喜) : 참된 법에 대해서 기쁨을 맛보는 것<br />  &amp;#8228; 경안(經安) : 마음을 가볍고 편안하게 하는 것<br />  &amp;#8228; 사(捨) : 외계(外界)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br />  &amp;#8228; 정(定) : 마음을 한 경지로 집중시키는 것<br />  &amp;#8228; 념(念) : 마음의 안정과 지혜의 기능을 균등하게 해나가는 것<br /> </p>
<p>이상에서 보았듯이, 팔정도를 중심으로 한 도제(道諦)는 개인의 노력을 통해 인생의 이상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성제가 불교 교리의 골격을 이루는 전형(典型)이요 모든 교리의 근본사상이라면, 팔정도는 불교수행의 핵심이 되는 8가지 실천 덕목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이치를 잘 깨닫고 체득하는 것은 불교 수행자의 기본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 팔정도를 잘 닦는다면 이 세상이 그대로 극락이고 불국토가 될 것이며, 붉교에서 추구하는 절대의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p>
<p> </p>
<p>우리는 욕망 때문에 미혹의 깊은 바다에 빠져들어 쾌락이나 욕구충족에만 매달리는 천박한 생활을 하거나 함부로 자기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학대하거나 괴롭혀가며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심한 고행의 생활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방법은 버리고, 지혜로운 마음을 열어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곧 팔정도를 통한 중도(中道)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p>
<p> </p>
<p>중도(中道)는 팔정도의 길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지침이다. 마치 어떤 나무토막이 강물 위로 떠내려가는데 이쪽 언덕이나 저쪽 언덕에도 닿지 않고 가운데로만 내려가면 결과적으로 바다에 다다르게 되는 것과 같이 중도라고 하는 것은 전혀 새롭거나 놀라운 것이 아니며, 고집멸도의 원리 가운데서 해탈으로 향할 수 있는 바른길의 모습인 것이다.</p>
<p><br /><strong>2. 삼법인 (三法印)</strong></p>
<p>  삼법인이라는 말은 불교와 이교도와의 교리적 차이를 단적으로 표시한 세 종류의 진리의 도장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45년간 설법을 단 세 가지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어, 법인(法印)이라고 칭한다.</p>
<p> </p>
<p>이것의 연유는 본래 부처님께서는 무명 내지는 무지가 인생고통의 가장 궁극적인 근원이라는 것인데, 사람들의 고통은 인생이 무지하고 무아하다는 무명의 이치를 모르는데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切皆苦)를 내세워 인생무상을 증명해보이셨다. 이것을 처음에는 삼법인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이 보태져서 4법인이 되었다. 그런데 제법무아의 원리속에 일체개고가 포함되어있다고 판단하여 일체개고를 제외하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삼법인으로 정하게 되었다. 또한 5법인이라는 것도 있는데, 제법개공(諸法皆空)이 더해진 것이다.</p>
<p> </p>
<p>삼법인은 모든 현상계를 정확하게 관찰한 것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대승이나 소승을 막론하고 불교의 설법중에서 부동의 근본원칙이며, 불교사상의 근간을 구성하는 가장 주된 골격이<br />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p>
<p> </p>
<p>  (1) 제행무상 (諸行無常)</p>
<p>  행(行)이란 본래 옮겨 다니면서 바뀐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제행무상이란 모두 인연에 의해 생긴 세간의 일체 사물과 현상은 모두 변화무상해서 고요히 상주하거나 영원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연기설과 통합시켜 말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상주 불변의 것이 없이 무상하다는 뜻이다. 행(行)은 시간적인 것이며 동적인 것인데, 움직이는 것 그 자체는 이미 소멸하고 있는 이치를 품고 있는 바, 영원한 것이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p>
<p> </p>
<p>현재 드러나 있는 현상계 (감각하고 지각할 수 있도록 나타나는 세계)는 항상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쉬지 않고 변해간다. 즉 모든 존재는 생겨나고 머무르고 변화하고 없어진다는 뜻인데, 이것은 감상적이나 체념적인 방향으로 변화해가는데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변화속에서 새롭게 바꾸어 소생되고 더욱 진취적이며 더욱 희망적인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가르침이다.</p>
<p> </p>
<p>이렇게 행(行)하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이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세상을 살아가는 교훈을 준다. 본래 존재의 바탕이 원래 무상한 것임을 알아 어떤 경우에도 한 곳에 집착하여 슬퍼하거나 고뇌 등으로 얽매일 것이 없음을 깨달으면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고, 가난한 이가 부자가 될 수 있고, 병든 이가 건강해질 수 있고,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속에 있는 사람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무상의 원리를 잘 알아서 항상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p>
<p> </p>
<p>이처럼 변하는 것을 관찰하지 않는다면 도태되고 만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武所住 而生基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응당히 마음을 주하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는 의미로 이는 항상 새롭게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곳에 고정시키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단,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그것은 진리인데, 진리가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을 논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 때문이다.</p>
<p> </p>
<p> (2) 제법무아 (諸法無我) </p>
<p>  법(法)이란 사물, 물건, 존재를 의미한다. 제법이란 모든 사물과 각종 존재들을 가리킨다. 아(我)는 주재와 실체의 의미이며, 무아(無我)는 아(我)가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제법무아란 일체의 존재가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주재자가 없어서 모든 사물에 주재작용을 일으키는 내(我)가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단일하고 독립적이며 자아존재적이고 자아결정적인 영원한 사물은 없으며, 모든 사물은 모두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상대적이며 임시적인 것이다. </p>
<p> </p>
<p>  다시 말하면, 제행무상이 시간적인 변화를 강조한 것이라면 제법무아는 공간적인 차원의 것으로, 모든 것에 절대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물질도 그 어떤 주체적인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래 없었는데, 인연따라 뭉쳤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것이지, 어떤 근원적인 주체(我)가 있어서 그 주체에 의해 물질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p>
<p> </p>
<p> 이것은 현실에 나타난 현상 자체가 없다고 부정하는 말은 아니고, 모든 사물이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고정되어 변화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인연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 절대의 실체가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 때문에 현실 자체의 부정이나 무시에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실 자체를 그대로 뚜렷이 알아서 어떤 하나에 깊이 집착하지 않고 생멸에 대하여 담담하고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되기를 가르치는 것이다.</p>
<p> </p>
<p>그래서 이것은 부처님의 무아사상을 대표하는 법이다. 무아법을 알면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게 된다. 인생의 여러 문제들은 원래 내가 있다는 허망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제법무아의 진리를 배웠으니 이제는 인생을 방관자적 입장이 되어서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하며, 그리하여 삶을 사는 바른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p>
<p>  그렇다고 인생이 무아라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무아라고 해도 내 몸은 여전히 육체적이며 생리적이다. 무아는 본래 나라는 주체가 생멸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한 것이기에 나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지만, 몸이 필요한 것을 무시하고 바로 죽어라는 말은 아니다. 제법무아는 나의 본질이 무아임을 깨달아 마음에서 비롯되는 각종 번뇌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진리의 법이다. 즉, 무심으로 모든 일을 행하라는 가르침이다.</p>
<p> </p>
<p> 이 가르침은 불교 이외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불교 독자적인 교리이다. 우리가 많은 들은 불경의 명구인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에서 보다시피, 모든 물질의 속성은 공(空)이되, 현실은 물질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같다고 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알아 듣기 힘든 진리이다.</p>
<p> </p>
<p> 우리의 육안에 비춰지는 것만으로 판단하려고 하니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를 바로 알려면 혜안(慧眼)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공에도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현실 위해서 모든 일을 하되, 마음은 비우라는 것, 즉 잘났다는 생각도 원망도 갖지 말고 삶에 충실하는 것<br />이 바로 제법무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p>
<p> </p>
<p> (3) 열반적정 (涅槃寂定)</p>
<p>  열반적정은 앞의 두 법인과는 달리 긍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열반은 고요한 세계, 이상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로서, 니르바나라는 범어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의 뜻은 ‘불어서 끄다, 불어서 꺼진 상태’라는 뜻이라 한다. 적정은 곧 열반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열반적정이란 번뇌를 멀리하고 상(相)에 대한 얽매임을 끊으며 고요하게 항상 있는 것을 말한다.</p>
<p> </p>
<p>  앞에서 살핀 제행무상, 제법무아와 연관시켜 총체적으로 열반적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체의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사물은 모두 무상한 것이어서 중생은 염세의 고통을 일으키지만 다시 한걸음 나아가면 일체 사물은 무아여서 반드시 의지할 바가 없게 되고 그래서 멸에 이르게 된다. 이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사물의 무상성과 무아성을 깨달은 후에 완전한 열반적정이라는 최고 이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p>
<p> </p>
<p> 쉽게 말하자면, 제법(諸法)은 무아(無我)요,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요, 일체(一切)는 고(苦)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그저 깨닫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번뇌망상도 없어졌고, 또 바깥으로는 나를 동여매는 억압이나 속박도 없어진 상태, 바로 고요하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열반적정이며 해탈이라는 것이다. 번뇌의 불꽃을 꺼버리니 그냥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이다. 그래서 열반적정이다. 이때 고요하다는 것은 공(空)과 마찬가지이고 무(無)와도 비슷한 것이다.</p>
<p> </p>
<p>이와 같이 열반적정은 불교의 최고 이상의 경지이며, 우주만물의 실상이라고 인식되고 있고, 나아가 우주만물의 진리로 간주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진리가 언어사유로 표상될 수 없는 그 어떤 내성에 의한 직관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p>
<p> </p>
<p>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통해 평화로운 열반의 세계가 이루어짐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몸소 행하여 보여주신 바처럼,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에서 생겨나는 끊임없는 번뇌는 나를 태우는 불과 같아서 늘 고통을 가져다주는데 이것들은 한번에 불어서 다 꺼버리면 마치 고요함과 안락이 찾아들어 더없는 평화가 깃들고 적정한 속에 안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p>
<p> </p>
<p> 결국 열반적정이란 고요한 이상경계를 표현한 말이다. 그래서 진정한 열반은 죽음과도 같이 일체의 번뇌와 고뇌로부터 벗어나 고요함에 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열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열반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열반이란 고요한 만물의 본질이며, 불교는 결국 마음의 고요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p>
<p><br /><strong>3.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strong></p>
<p>  육바라밀이나 십바라밀은 대승불교에 와서 더욱 중요시된 교리이지만, 사실 그 근원은 4무량심(無量心)이나 4섭법(攝法) 등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4섭법은 십바라밀에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p>
<p> </p>
<p>(1) 4무량심 (無量心)</p>
<p>  ① 자(慈) : 우애의 마음,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br />  ② 비(悲) :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 타인의 고통을 제거해주는 것<br />  ③ 희(喜) : 기뻐하는 마음,  남이 낙(樂)을 얻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는 것<br />  ④ 사(捨) : 평안한 마음 고(苦), 낙(樂), 희(喜), 비(悲)를 초월하여 마음의 편안을 얻는 것</p>
<p> </p>
<p>이 네가지는 선정(禪定)에 의하여 수습(修習)해야 하는 이타(利他)의 마음이다. 이것은 중생에게 무량한 복을 가져다주고 범천(梵天)의 세계에 태어나게 한다고 석존은 말씀하셨다.</p>
<p> </p>
<p> 첫째, 우리는 자(慈)를 생각하면서 미륵보살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범어로 maitri(慈)와 미륵보살을 일컫는 Maitreya는 같은 어원의 말이다. 즉, 미륵이란 자(慈)가 가득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분은 잘하는 사람, 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보호해주는 보살로서 지금은 도솔천에 계신다고 하나, 우리의 인자한 마음속에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p>
<p> </p>
<p>둘째, 비(悲)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생각하고 그 고통을 없애주려는 마음인데, 여기서 우리는 대비(大悲)하신 관음보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고통에 빠져있다면 주저말고 대비관세음보살을 불러야 한다. 이 분은 잘못하는 사람을 야단치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고통을 제거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p>
<p> </p>
<p> 셋째, 희(喜)는 흰 치아가 나오도록 웃는 기쁨을 의미한다. 석굴암에 있는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의 상단이 있는 세 얼굴이 바로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을 하고 있는 희(喜)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한 순간들뿐만 아니라 타인의 기쁨까지도 나눌 수 있는 희(喜)이다. 사실 우리는 이웃의 슬픈 일은 그래도 잘 감싸주지만, 이웃의 경사에는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기가 쉽지 않다. 석존께서는 이 점을 간파하시고 잊지 않고 설하셨다. 그러므로 불자는 바른 희(喜)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p>
<p> </p>
<p> 넷째, 사(捨)의 마음은 고통과 즐거움,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것은 반야(般若)의 경지에 다다른 마음이다.</p>
<p> </p>
<p> (2) 4섭법 (攝法)</p>
<p>  섭(攝)이라는 말은 포섭한다고 할때의 섭이다. 그래서 4섭법이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서로 대립과 마찰이 없이 하나가 되자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법으로, 모든 갈등을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하나되게 하는 네가지 방법, 보시(布施)와 애어(愛語)와 이행(利行)과 동사(同事)를 가리킨다.</p>
<p>  이것은 중생을 구제할 때 갖는 기본태도인데, 그 순서도 중요해서 반드시 순서대로 해야 된다.</p>
<p> </p>
<p>① 보시 (布施)</p>
<p>  사람들에게 인자한 마음으로 접하고 재물이나 진리를 기꺼이 베푸는 일을 뜻한다.<br />  「아함경」을 보면 석존도 보시에 관해서 설명하셨다. 그러나 사성제와 삼법인의 그늘에 가려 보시행이 무시되었다가 대승경전에 와서야 다시 강조 되었다.</p>
<p> </p>
<p>보시(布施)</p>]]></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2:02:11 +0900</dc:date>
	</item>
	<item>
	<title>불교탐구 - 제2부 삼보 - 5장 불법의 계승자들</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10</link>
	<description><![CDATA[<p><font color="#000000"><strong>제 5 장 불법의 계승자들</strong></font></p>
<p> </p>
<p><strong><font color="#013add">1. 석존의 10대 제자</font></strong></p>
<p>  바라나시에서 5인의 출가수행자의 전향과 가섭(카샤파) 3형제의 출가 귀의 및 재가신도의 출현에 의해서 시작된 불교 교단이 그 후 점차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는 기초가 구축된 것은 당시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진리를 찾아 수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불법(佛法)을 듣고 부처님께 귀의하고 출가하여 부처님과 더불어 출가자의 올바른 생활을 몸소 실천하고 전도에 힘썼는데, 멀리 서인도 등지까지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출가시킴으로써 교단의 기초가 확고부동하게 된 것이다.</p>
<p> </p>
<p> 석존의 제자는 통상 1,250인으로 일컬어진다. 수많은 제자가 있겠지만 경전에 이름이 나오는 제자는 비구 886인, 비구니 103인, 우바새 128인, 우바이 43인이다. 그 가운데 뛰어난 제자 10명을 10대 제자로 구분하는데, 부처님의 뜻을 이어받은 그 분들의 특징을 살펴 오늘날 우리의 신행생활에 도움을 받도록 한다. </p>
<p> </p>
<p> (1) 사리불(사리푸드라) 존자</p>
<p>  사리불(舍利佛)이라고 하는데, 반야심경에서의 사리자(舍利子)이며, 석존의 상수제자다. 1,200명의 대아라한 가운데 특히 뛰어난 열분 제자 중에서도 분별력과 이해력이 가장 뛰어나 불교의 진리를 간접으로 한마디만 듣고도 크게 깨달을 수 있었던 사리자는 지혜가 가장 뛰어난 지혜 제일의 존자다. 그래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그의 후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p>
<p></p>
<p>남방 불교의 전승에 의하면, 사리자는 마가다국의 라자그라하에서 가까운 나라카 마을의 바라문 집안 태생이라 한다. 육사외도(六師外道) 중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던 목련과 함께 산자야를 섬기었으나 영리하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나 스승의 학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리자가 어느 날 불제자로부터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일부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친구 목력과 그들의 제자 250명을 거느리고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br /></p>
<p>부처님은 개종하여 제자가 된 이들을 모든 제자의 상좌에 두었다. 이는 하루라도 일찍 교단에 들어온 자를 상좌에 두는 전통에 어긋난 것이어서, 그로 인해 고참 비구들로부터 불평이 많이 있었지만 부처님은 불평하는 이들을 잘 달래었다고 한다.</p>
<p></p>
<p>사리부존자는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부처님 입멸 사흘 (혹은 석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목련과 부처님을 도와 불교의 신흥교단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p>
<p></p>
<p>(2) 목련(목갈라나) 존자</p>
<p>  제자 가운데서 신통이 가장 뛰어나 신통제일로 불린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한 끝에 한 달 남짓해서 모든 번뇌를 끊고 바른 도리를 깨쳐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 만년에 존자가 불법을 전도하던 도중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던 자이나 교도로부터 돌에 맞아 부처님 입멸 사흘 전에 순교하여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때 존자를 존경하던 아자타사투 국왕이 범인들을 죽이려고 하자 부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자비를 베풀라고 하여 풀어주었다.</p>
<p></p>
<p>목련 존자는 동명(同名)의 불제자가 많아서 마하＊ 목갈라나(대목련)라고 불리었다. 그가 신통제일로 불리는 까닭은 분명치는 않으나, 부처님과 같은 천안천이(天眼天耳)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죽은 모친이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을 천안(天眼)으로 보고 지옥에서 모친을 구했다는 소위 목련구모(木蓮求母)의 전설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 등지에서 거행되는 우란분 (지옥에 떨어진 이의 혹심한 괴로움을 구원하기 위한 법회)이나 시아귀회(施餓鬼會 굶주림에 고통받는 망령들을 위안하기 위하여 베풀어주는 법회)에서의 인연설화의 기원이다. 그래서 신족의 상징인 지장보살이 그의 후신이라고 한다.</p>
<p> </p>
<p> 또한 목련은 부처님과 함께 쉬라바스티 교외의 녹자모 강당에 있을 때 많은 비구들이 단정치 못한 자세로 잡담을 즐기는 광경을 보고 신통력을 써서 발가락으로 강당을 흔들었기 때문에 비구들이 놀라 도망친 일이 있다고 한다. 또 모여든 비구 중에 부정한 자가 있음을 알고 그의 팔을 잡아 축출해냈다고도 한다.  그는 아난, 사리자 등과 함께 교단 내부의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교단의 통제를 위해서도 큰 힘이 된 존자이다.</p>
<p><font color="#013add">  * 마하는 크다는 대(大)의 뜻이다.</font></p>
<p></p>
<p>(3) 가섭(카샤파) 존자</p>
<p>  대가섭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평소의 수행생활이 매우 엄격해서 두타(頭陀) 제일 또는 행법(行法) 제일이라고 한다. 두타라는 말은 옷, 음식, 집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고행하는 금욕고행을 말한다. 가섭존자는 아주 어려운 고행을 잘했으며, 소욕지족(少欲知足)의 검소한 생활을 실천한불교교단의 초조(初祖=宗祖)이다.</p>
<p> </p>
<p> 또한 영산회상에서 꽃 한송이를 들어 보이시던 부처님의 뜻을 알아차려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은 상수제자로서 삼처전심(三處傳心)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삼처전심이란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세 장소에서 마음을 전했다는 뜻으로 첫째, 영축산에서 설법하실 때 한송이 꽃을 들어보이시니 오직 가섭만이 빙그레 웃어, 바른 법, 열반의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하신 것이며, 둘째로 다자탑에서 설법하실 때 늦게 도착한 가섭에게 손수 당신의 자리 반을 내어 앉히신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 열반후 먼곳에 나간 가섭이 뒤늦게 달려와 부처님 관을 세 번 돌고 세 번 절하자 관에서 부처님이 당신의 두발을 내어보이신 것 등 세가지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세가지 징표로 가섭에게 선(禪)의 <br />등불을 전하셨다는 일화가 있다.</p>
<p></p>
<p>가섭존자는 항상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함께 했다. 그는 마가다국 태생으로 바라문계의 여자와 결혼했으나 가정생활을 싫어하여 출가하자 뒤이어 부인도 출가하였다. 라자그라하 성밖의 나무 아래에서 부처님과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언제나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누르고 간소한 생활 규율 (두타행)을 지켰으며, 부처님이 존자가 이미 늙었으니 부드러운 옷을 입고 신자의 초대를 받으면서 나의 곁에 있으라고 권해도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p>
<p> </p>
<p>  또 언젠가 그는 지난 날 함께 수행하던 동료가 환속하여 도적질을 하다가 체포당해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을 때 달려가 훈계하며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가섭 존자는 형리의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왕까지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대인들은 자비의 상징인 관음보살이 가섭존자의 후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p>
<p></p>
<p>부처님 임종 후 유해를 넣은 관이 마하 가섭이 도착할 때까지 아무리해도 불이 붙지 않아서 다비를 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석존의 상수제자인 사리자와 목련이 부처님보다 먼저 돌아가시고 없자, 부처님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에는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이어 받고 교단을 통솔해나갔다. 가섭은 고행을 많이 한 사람이기에 아주 깡말랐다. 대신에 매섭고 무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에 승단의 기강을 바로 잡으며 승단을 이끌 수 있었다. </p>
<p> </p>
<p>  이 점을 보면 승단의 지도자는 두타를 잘하는 사람에게 자격이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직후, 교단의 동요와 분열을 염려한 그는 아난과 같이 비구들을 라자그라하의 칠엽굴에 모이게 하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정리하기 위한 이른바 제 1차 결집을 거행하여 부처님 말씀을 책으로 엮어낸 공적이 있다.</p>
<p></p>
<p>(4) 아난 존자</p>
<p>  10대 제자중에서 부처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하여 다문(多聞) 제일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전수받은 후세 승려들의 교조(敎祖)가 되시는 분이다.</p>
<p> </p>
<p>  천성적으로 다정다감하여 출가 후 줄곧 부처님의 시중을 들었다. 10대 제자 중에 부처님을 가장 오랜 기간 곁에서 모시고 있어서 법문을 가장 많이 듣고 또 한번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는 총기가 있어 후일 경전을 편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p>
<p> </p>
<p> 아난의 부친과 부처님의 부친이 형제관계에 있었으므로 부처님과 아난은 같은 연배의 종형제 사이였는데 (후에 부처님에게 반역을 한 데바닷타도 같은 관계다), 아난은 부처님의 나이 55세때 부처님께 바치는 것과 동일한 보시를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시종으로 추천되었다고 한다. 25년간 아난은 그림자처럼 석존을 모시면서 신변의 모든 일을 뒷바라지 해드리고, 부처님이 병석에 누우면 계(戒)를 범하면서도 특별한 식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p>
<p> </p>
<p>또 가르침을 구하러 오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편의를 제공하고, 고민을 상담코자 하면 상담해주고, 부처님을 대신해서 설법도 했다고 전한다.</p>
<p> </p>
<p> 아난은 사리자, 목련, 마하 가섭, 아누룻다 등과 친교가 깊었으며 특히 사리자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경전에서 그는 사리자를 칭찬하는 말이 나오는데, 사리자의 죽음을 그의 동생과 함께 부처님께 보고하고, 이때 아난이 낙심하는 모습은 “고양이의 습격을 간신히 피해서 허탈감에 빠진 수탉과 같이” 매우 딱했다고 전한다.</p>
<p> </p>
<p>  또한 그는 여성 출가에 진력하여 부처님에게 세 번이나 여성출가를 간청하여 마침내 부처님이 허락했다고 한다. 그는 재가나 출가를 불문하고 여성교화에 많은 힘을 쏟은 존자였다.</p>
<p></p>
<p>아난이 아누룻다와 함께 부처님의 최후를 지켜보면서, 이어서 그때까지 개별적으로 전해지던 부처님의 가리침을 정리하고 경전으로 편집하기 위하여 마하 가섭과 함께 제 1회 결집을 열었다. 이 회의에서 아난은 부처님의 측근으로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었기 때문에 경(經)의 편집일을 주관했다.</p>
<p> </p>
<p> 그는 매우 오래 살았다고 전한다. 아난은 자신의 사후에 그 유해를 둘러싸고 마가다국의 아자타샤트루왕과 바이샬리의 릿차비족이 분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갠지스강의 한가운데서 스스로 불을 당겨 그 몸을 불태우고 유골을 2등분하여 나누어주도록 했다. 행원의 상징인 보현보살이 그의 후신이라고 한다. </p>
<p> </p>
<p> (5) 우바리 존자</p>
<p>  불교 교단의 규율에 정통했으며, 또 계(戒)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우바리 존자는 지계(持戒) 제일로 불린다. 부처님 입멸 직후 제 1회 결집에서 계율을 암송하여 체계적으로 정<br />리하는데 크게 공헌했다.</p>
<p> </p>
<p>  카필라국의 이발사로 천민 출신이었으나 부처님이 고향에 돌아와 설법하심에 곧 출가하였다. 원만한 인격과 높은 덕으로 존경받는 상수장로로 대접을 받았다. 부처님은 우바리가 왕족의 청년들이 출가하려는 것을 보고 자신도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부처님께 나아가니, 부처님은 청년들에 앞서 우바리부터 먼저 출가시켰다고 한다. 이는 하루 한시라도 먼저 출가한 사람이 상석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하는 원칙을 세운 불교 교단에서 천민을 왕족보다 상위에 올려놓으려 한 것은 교단 내부의 평등주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다.</p>
<p></p>
<p>(6) 푸루나 존자</p>
<p>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대중 연설이 가장 뛰어나 설법 제일이다. 존자는 태어나면서 질투가 심해서 그 마음을 고치기 위해 부모와 처자까지 버리고 홀로 입산하여 20년간 수행했다. 그 동안 당시 유포되고 있던 모든 책을 공부하여 스스로 지혜를 얻었다고 자부했으나 라자그라하에서 부처님을 만나 느낀 바가 있어 제자가 되었다.</p>
<p> </p>
<p> 존자는 대중 연설이 뛰어나서 항상 대중을 모아 놓고 설법하였고, 포교하는 현장의 풍습과 그곳 사람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부터 해결해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고 한다.</p>
<p> </p>
<p> 생년월일이 부처님과 같으며 불법을 믿지 않던 쉬로나국에 들어가 포교하여 오백여명을 교화하고 오백개의 사원을 세웠으나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다. 무량겁 후 부처가 될 것이며 법명(法名) 여래라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p>
<p> </p>
<p>  (7) 아누룻다 존자</p>
<p>  제자 가운데 천안(天眼)이 제일이라고 한다. 평소 잠이 많아 부처님 법문을 졸면서 듣다가 부처님의 심한 꾸중을 듣고 분발하여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다가 눈이 멀었다. 그러자 그는 천안을 얻어서 보지 않고도 마음으로 모든 일을 알 수 있게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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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아누룻다는 출가 후 부처님을 도와 교단 통솔에 전력했다. 비구들이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던 지역의 동쪽 대나무숲에서 두 동료와 사이좋게 지내는 화합의 모범을 보여 마침 이곳을 지나는 부처님을 기쁘게 한 일도 있었다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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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부처님을 따른 일이 많았으며, 특히 부처님 입멸시에 “스승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헤어질 때가 있다고 설법하셨다. 슬퍼하지 말라. 통곡하지 말라”고 하면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한편, 아난에게 일러 부처님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했다고 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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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처럼 아누룻다는 부처님이 입멸시에도 자신의 슬픔을 표현치 않고, 마음의 중심을 흩트리지 아니하면서 동료들을 추스렸으며, 교법이 분산되어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개최된 불전결집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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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 가전연 존자</p>
<p>  제자 가운데서 가장 논리적으로 법문을 했다고 하는 가전연은 논의 제일로 토론의 명수이다. 가전연은 석존을 보고 장차 깨달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아시타 선인의 외조카이다. 존자는 당시 사회구조의 불평등한 모순을 국왕 앞에 거침없이 말하고, 푸루나 존자가 대중연설에 능한데 비해서 가전연은 개별적인 설득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본래 불교는 만고불변의 진리인데 거기에 유창한 말솜씨와 열성으로 불교를 널리 펴니 한번만 그의 강연을 들으면 누구나 불법에 귀의했다고 한다. 10명의 제자 중에서 비교적 늦게 출가한 사람으로 서인도 출신답게 그 쪽 지방의 포교에 공이 크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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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 라훌라 존자</p>
<p>  부처님 제자 가운데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수행에 전념했다고 하여 밀행(密行) 제일 또는 인욕(忍辱) 제일이라고 한다. 밀행제일이란 은밀히 고행을 많이 하면서 살았다는 뜻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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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부처님의 친아들로서, 라훌라가 12세때 부처님이 그의 수제자 사리자를 보내어 이모와 함께 아들을 출가시켰다고 한다. 이때 정반왕은 아들에 이어 손자의 출가를 보면서 살이 베이고 골수까지 들어내는 듯한 슬픔과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p>
<p> </p>
<p>  출가 후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자만에 빠져 수행을 게을리하자 부처님께서 아들을 위하여 법문을 하였고 이에 뉘우치고 수행에 전념했다고 한다. 사실 부처님 아들이라서 조금만 잘못해도 주위 눈총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계(戒)를 잘 지키고 항상 독송을 부지런히 했으며, 온갖 욕된 일을 잘 참으며 겸허한 자세를 잘 지켰다고 한다. 승단 역사상 최초의 기록된 사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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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수보리(수부티) 존자</p>
<p>  수보리는 부처님을 위해서 기원정사를 기증한 수닷타 장자의 조카로서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제 1인자라고 불렸던 듯한데, 후에 해공(解空) 제일로 인정된다. 제자 가운데 대승이론의 공(空) 사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통달한 제자다. 완벽한 공삼매에 들어 우주의 모든 법이 공(空)함을 깨친 공해탈의 경지에 들었으며, 유명한 금강경의 주인공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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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십대제자가 언제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선택되었는지는 분명치않다. 부처님의 초전법륜 상대였던 교진여 등 5비구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대신 대승사상의 이해자인 수보리가 선택되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대승불교시대의 소산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p><hr /><p></p>
<p><font color="#013add"><strong>2. 달마대사</strong></font></p>
<p> 우리가 흔히 달마도라고 하는 그림 속의 주인공인 달마대사는 그의 제자 신관과 함께 중국의 선종(禪宗)을 창시한 스님이시다. 달마대사는 자기 이익만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을 비는 것은 욕심에 불과한 것이니 부처님 제자는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해주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아 항상 고요하고 평안히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신 분이다.</p>
<p> </p>
<p>  달마대사는 인도 남천축국의 향지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보장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을 믿어 출가하였다. 그는 높은 수행으로 큰 깨달음을 얻어 여러 가지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루는 양무제가 스님을 초청하여 법문을 듣는 중에 왕을 심히 모욕했다는 죄로 남몰래 자객을 시켜 대사를 죽였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죽지 않고 부활하여 징표로 자신의 관속에 짚신 한짝만을 남겨둔 채 관 밖으로 나오신 분이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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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의 험상한 얼굴에 관한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출가 후 여러 신통력을 지닌 대사는 어느 마을을 지나던 중 이무기가 썩어 냄새가 진동하기에 자신의 육신에서 영혼만 잠시 나와 이무기의 몸으로 들어가 이무기를 큰 바다로 끌고 가서 빠뜨리고 영혼만 다시 이무기의 몸에서 나와 벗어 놓았던 자기 육신을 찾아 아까 장소로 와보니 자신의 육신을 찾을 수 없고 대신 근처에 험상궂게 생긴 시체가 하나 있어 급한대로 대사의 영혼은 시체속으로 들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자기 육신을 훔쳐간 놈을 찾아 혼내주리라고 마음먹고, 일단 걸식을 하러 마을로 내려갔다. <br /></p>
<p>마을로 내려가니 대사의 모습이 너무 험상궂게 생겨 사람들이 모두 슬슬 피하자 대사는 한 노인을 붙들고 자신이 누구냐고 알아보니 곤륜산 신선이라고 한다. 그래서 순식간에 곤륜산에 도착<br />한 대사는 그 신선을 찾아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신선이 놀라 용서를 빌며 자신의 못생긴 모습 때문에 사람들에게 접근조차 못해 자신의 가르침을 줄 수가 없어 안타까워 하던 차에, 마침 잘생긴 시체가 버려져 있어 바꾸었지 다른 욕심은 없었다고 하였다. </p>
<p> </p>
<p>그러자 달마대사는 자신의 육체를 미련없이 신선에게 주고 자기는 흉악한 모습으로 중국 서촉의 승산 소림사로 가서 그곳에서 제자 신관을 만나 대사의 선법을 전수해주었고, 그로부터 중국에 선종(禪宗)이 싹텄다. 그후 달마대사가 어떻게 생애를 마쳤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달마대사는 면벽(面壁) 9년만에 소림에 머물며 크게 깨치고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달마대사는 중국 당나라에 선법(禪法)과 선불교를 몸소 행하며 동방에 유포한 공적이 크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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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r /><strong><font color="#013add">3. 우리나라 대선사</font> </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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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 원효대사 (元曉大師)</p>
<p>  우리 민중의 불교 포교에 기여한 바가 그 어느 스님보다 크신 우리나라 최고의 대선사 원효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 (617년경)에 출생하셨다. 원효의 속성(俗姓)은 설(薛)씨이며, 이름은 서당(誓幢)이며, 신라 압량군 (지금의 경산) 불지촌 사람이다. 신라 진평왕때 34세의 나이로 의상과 당나라 유학을 가다가 대오각성하고 되돌아와 대장경을 탐독하며 많은 전적을 남겼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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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총명하여 화랑으로 학문과 무예를 익혔지만 곧 황룡사로 출가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당나라 유학을 거치지 않고 국내에서 자주적으로 수행하여 교화를 폈다. 장성한 원효스님이 훗날 우리에게 의상대사로 알려져 있는 의상스님과 당나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날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여행도중 만주벌판즈음에서 한밤중에 노천에 있는 움막같은 곳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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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밤중에 원효스님이 몹시 갈증이 나서 물을 찾아 더듬거리다가 바가지에 담긴 물을 찾아 마시고 시원하게 갈증을 풀었는데,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신들이 잔 곳은 오래된 무덤이었고, 스님이 마신 물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p>
<p> </p>
<p>상황을 알게 된 스님은 구역질을 하며 마신 물을 토하다가 문득 스님은 「법화경」의 ‘심생즉종종법생’ (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 (心滅卽種種法滅)‘이라는 구절을 떠올리면서 크게 깨닫게 되었다. 내용인즉, 마음이 나니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니 가지가지 법이 멸한다는 뜻이다. 어제는 그토록 시원했던 물이 오늘 아침에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물인 것이다. 물은 어제 물과 오늘 물과 다를 바가 없는데 자기 마음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촉누불 (&amp;#39633;&amp;#39631;不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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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 것 (三界唯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즉시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입당구법을 그만두고 의상스님과 헤어져 신라로 되돌아와 귀족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불법을 전파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화엄경」을 주석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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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만년에 불교포교를 위해 표주박으로 무애박을 만들어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백성들을 교화했다. 그래서 남녀노소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할 수 있게 되었다는데, 이 노래는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切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즉,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한길로 생사를 벗어나리라‘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무애가의 내용은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찾는 염불 가락이라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그 제목과 유래만 전해질뿐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p>
<p> </p>
<p> 스님은 낮에는 여러 곳을 누비며 중생들을 만나며 다녔지만 밤에는 어김없이 경전의 주석서를 만들고 기도와 참선수행을 했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사상은 한마디로 화쟁(和諍)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과 싸우면 안되며 대립 마찰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p>
<p> </p>
<p>그저 화쟁과 평화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空)의 도리를 잘 알고 있어야 했는데, 생전에 많은 저서를 집필한 대사는 한때 분황사에 머물며 공(空)사상을 설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짓기도 했으며 (제 40권 회향품에 이르러 끝맺고 절필), 또한 「금강삼매경소」를 저술했다. 그것을 각승(角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소를 타고 두 뿔 사이에 벼루를 걸어놓고 지<br />었다고 하는데서 유래한다. </p>
<p> </p>
<p> 대사와 요석공주사이에서 얻은 아들 설총은 그가 입적(入寂)하자 대사의 모습을 소상(塑像)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했는데, 설총이 선친의 곁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홀연 고개를 돌려 아들을 돌아보았기 때문에 지금도 대사의 소상이 고개를 돌아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p>
<p> </p>
<p>대사의 유적지가 전국에 퍼져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사찰은 남해 보리암, 양산 미타암, 내원사 등이 있다. 고려 숙종은 원효에게 화정국사(和靜國師)라는 칭호를 하사했다.</p>
<p> </p>
<p>(2) 의상대사 (義湘大師)</p>
<p>  1,300여년전 신라 경주 출신인 의상대사의 속성(俗姓)은 김(金)이며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그는 초년시절에 이미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아 29세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여 의상이라는 법명을 받고 수행하던 중에 화엄학으로 유명한 중국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스님(삼장법사)를 찾아가 수학할 것을 결심한다. </p>
<p> </p>
<p>그리하여 뜻한대로 중국에서 20년을 수학한 뒤 돌아와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거기서 화엄학을 크게 일으키셨으며, 북악산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 계룡산 갑사, 금정산 범어사등 10여개의 사찰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또 법성게, 화엄경 약찬게, 백화도량 발원문 등을 지으셨으며,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고려 숙종이 원교국사(圓敎國師)라는 칭호를 하사했다.</p>
<p> </p>
<p>부석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 용바위는 의상대사를 흠모하여 곁에서 모시고자 했던 선묘 아가씨가 호법신룡이 되어 의상스님과 불법을 지켜주고 있다고 한다.</p>
<p> </p>
<p>(3) 자장율사 (慈裝律師)</p>
<p>  스님의 속성은 김이며, 신라 제일의 귀족인 진골출신이며 소판(蘇判 3급벼슬)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항상 계율을 지키며 선덕여왕이 큰 벼슬을 준다해도 사양하고 당나라에 가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왔다. </p>
<p> </p>
<p> 일찍이 자장율사는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율을 지키다 죽을망정 계율을 어기고 백년살기 원하지 않노라’하신 말씀을 통해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분이다.</p>
<p> </p>
<p>  자장율사의 부친은 늦도록 아들이 없자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 앞에 나아가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서원기도하여 4월 초파일 스님을 낳았고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짓고 부모님의 서원대로 영광사를 짓고 출가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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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신라 선덕여왕 3년(636년)에 구법(求法)의 길에 올라 당나라 종남사 운제사의 원향선사를 알현하고 원향이 말한대로 탑과 절을 건립하여 나라의 지세를 바로 세우고자 청량산 문수보살의 소상에 정성껏 예배하여 법을 깨치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처님의 금란가사 1벌과 사리 100과 그리고 부처님의 머리뼈, 손과 발가락뼈, 나뭇잎에 쓴 대장경 등을 문수보살로부터 받아 문수보살이 일러준대로 귀국한 뒤에 영축산 아래 독룡(毒龍)이 사는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에는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띤다. 이곳을 통도사라고 이름하니 곧 삼보 중에 불보(佛寶) 종찰이 탄생한 것이다.</p>
<p> </p>
<p>(4) 보조국사 (普照國師)</p>
<p>  스님의 법명은 지눌이요 법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俗姓)은 정(鄭)이다. 고려 의정 12년(1158년),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나신 스님은 8세에 입산득도, 25세에 대오각성하고 11년간 대중을 통솔하며 설법하였다. 현재 보조법어의 내용이 그 설법의 골자다.</p>
<p> </p>
<p>스님은 어릴적에 몸이 허약해서 여러번 죽을 고비가 있었는데, 한번은 앓다가 다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의 학정(學正 정9품)이신 부친과 모친은 부처님 전에 아이의 목숨을 살려주면 장차 부처님 일을 하는 사람으로 키우겠노라고 서원기도를 올렸다. 총명했던 대사가 16세 되던 해 부모님은 서원했던 대로 아이를 출가시켰고 종휘스님의 상좌가 되어 지눌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25세 되던 1182년에 나라에서 실시한 승과(僧科)에 합격했다.</p>
<p> </p>
<p>1185년에는 경북 예천 하가산(下柯산山) 보문사에 우거(寓居)하며 대장경을 열독했고, 1198년경에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올라가 선(禪)에 몰두하던 어느 날 지눌스님은 「육조단경」의 “참된 마음에서 온갖 생각이 일어나지만 그 마음 자체는 물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귀를 읽으시고 마음이 크게 열려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곧이어 길상사로 옮겨 11년동안 주석하니 전국의 스<br />님과 속인들이 몰려들어 총림을 이루었다고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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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불교가 크게 융성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고려중기 이후 승가의 계율이 세속화되어감에 따라 보조국사는 자신이 주축이 되어 정혜결사라는 일종의 불교정화운동을 일으키셨다. 정혜결사란 바른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일을 스님의 주된 임무로 하자는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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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를 위해 귀족들에게 아첨하지 말 것, 스님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불법을 전파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을 공부하는 교종이나 부처님의 마음을 깨달아 가는 선종이 서로 다르지 않고 같은 길임을 밝히는 것, 오직 부처님 법만이 따를 것이지 자신의 종단만이 최고라고 여겨 다른 종단을 배척 업신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등이 그 내용이다. 지눌스님이 작성한 「권수정혜결사무」은 정혜결사를 결성하는 취지와 방법을 담은 글로서,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명구가 들어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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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지눌스님은 지금의 송광사에 터를 잡고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실 때까지 오직 참선과 저술에만 전념하시어, 「계초심학임문(戒初心學人文)(1205년)등을 지으셨다. 이 책은 지눌스님이 출가수행자들의 수행청규를 담고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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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특히 처음 부처님 법을 배우는 마음을 낸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일을 간추려서 제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불도에 뜻을 둔 수행자들은 악한 벗을 멀리하고 착한 벗을 가까이 하며, 5계와 10계에 의지해서 잘 익혀야만 나중에 큰 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한 불교 입문서이다. 「초발심자경문」은 이 책과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 그리고 야운(野雲)스님의 「자경문」을 합본하여 만든 책이다.</p>
<p> </p>
<p>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앉은 채로 열반의 드셨는데, 7일이 지나 다비(茶毘)했는데 그때까지 얼굴빛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같았다고 하며, 다비후 사리 큰 것 30과를 비롯하여 작은 것은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이 나왔다. 이때 국왕이 불일 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칭호를 내렸다. 송광사 매산에 중국 원나라에서 스님에게 하사했다는 쇠로 만든 그릇인 능견난사(能見難思)가 있고, 흥국사와 만연사에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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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 서산대사 (西山大師)</p>
<p>  서산대사는 임진란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셨고,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 승려가 되어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 사명대사 등 많은 제자스님들을 길러낸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이시다. 일명 청허당(淸虛當)이라고도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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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서산대사는 지금의 묘향산인 서산에 들어가 제자들과 수도에만 전념하면서 쇠퇴한 불교의 중흥을 모색하시며, 앞으로 임진<br />란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닥쳐올 것도 내다보고 계셨던 분이시다. 임진란때는 선조임금으로부터 조선팔도 16종 선교도총법이라는 직위를 하사받고 왜적이 맞서 싸울 승군을 조직하여 국가에 큰 공을 세우셨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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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부처님께서는 살생하지 말라고 하셨으나 백성이 왜군에 무수히 죽어가는 것을 스님은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임진란이 끝난 후에 임금은 대사에서 큰 벼슬을 내리셨으나 이를 수락하지 않고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행을 하셨다. 우리나라는 서산대사의 구국에 힘입어 이후부터는 불교가 나라를 구한다고 믿었고, 여기서 호국불교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p>
<p> </p>
<p>한편 서산대사는 선교(禪敎) 일치사상을 강조한 「선가귀감」을 지었다. 이것은 선가에서 중요한 본보기로 삼아야 할 말씀들을 모아서 주해를 붙인 글인데, 이 책에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전한다. </p>
<p> </p>
<p>(6) 진묵대사 (震&amp;#40665;大師)</p>
<p>  극심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인해 암흑기의 절정에 놓여 있던 조선 중기 불교계와 서민들에게 무한한 희망의 표징으로 살다간 스님 가운데 진묵대사가 있다. 진묵스님(1562-1633)은 조선 중엽 17세에 전주 봉사서에 출가하여 내전을 탐독한 후 기이한 행적을 많이 남기어 부처님의 화신이라고도 한다.</p>
<p> </p>
<p>스님은 조선 개국이래 최대 국난인 임진란을 맞아 수행을 보류하고 싸움터에 나서서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극적으로 구한 사명대사와는 대조적으로 깊은 산속에 우거(寓居)하며 고고한 한 마리 학처럼 머물다간 분이시다.</p>
<p> </p>
<p>스님의 법명은 일옥(一玉)이고 법호는 진묵(震&amp;#40665;)으로, 만경(萬頃)의 불거촌(佛居村) 사람이다. 불거촌은 요즘 전북 김제군 만경면 대진리이다. 태어날 때 불거촌 초목이 3년동안 시들어서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드문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파나 마늘같은 훈채와 비린 음식은 즐기지 않았으며, 천성적으로 슬기롭고 마음이 자혜로워서 주위에서는 불거촌에 부처님이 났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p>
<p> </p>
<p>7세 되는 해, 전주 서방산 봉서사로 출가하여 내전(內典=불경)을 읽었는데 조금도 막힘이 없이 줄줄 해석했으며 한번 눈에 스치면 외우곤 하여 아무도 스승이 되어 가르쳐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가르쳐주지도 배우지도 않음에 따라 대중들은 자연히 동자의 국량(局量)을 헤아리지 못한 채 그저 작은사미(小沙彌)로만 알았다.</p>
<p> </p>
<p> 언젠가 그 절 주지가 이 동자승으로 하여금 신장단(神將壇)의 신중(神衆)들에게 향불을 올리는 소임을 맡긴 적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지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는데, 신중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우리는 부처를 호위하는 신장인데 도리어 부처로 하여금 우리에게 예경(禮敬)케 하고 봉향하니, 그 분으로 하여금 다시는 향을 사루지 못하게 하여 우리를 아침 저녁으로 편케하라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산내(山內) 대중들은 비로소 동자승의 비범함을 알고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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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스님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전주시 일출암에 거할 때 모친을 인근 왜막촌(현재의 전북 완주군 용진면 아중리)에 모셔와 머물게 하였는데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고통을 겪자 이를 안쓰럽게 여겨 스님이 그 지역의 모기를 남김없이 다른 곳으로 쫓아버리셨다. 그래서 왜막촌 일대는 지금도 모기가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없다고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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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진묵대사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하는데, 그 중 한가지만 인용한다. 하루는 진묵대사가 물을 찾기에 시자가 미지근한 쌀뜨물을 올렸더니 스님이 그것을 동쪽으로 내뿜으셨다. 그것은 스님이 해인사에 불이 난 것을 아시고 불을 끄시느라 그리한 것으로 전한다. 며칠 후 해인사에서 기이한 소식이 전해졌는데, 해인사에 불이 붙어 모조리 탈 지경이었는데 때마침 서쪽으로부터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는 덕에 불이 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빗방울 색깔이 희뿌연하여 허연자국을 곳곳에 남겼다고 한다. 절에 불이 나던 날이 바로 스님이 동쪽으로 물을 뿜으시던 바로 그날이었다.</p>
<p> </p>
<p>스님이 하루는 몸을 깨끗이 단장하신 뒤 시내를 따라 거니다가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리키며 “저게 바로 석존의 그림자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시자가 “그것은 스님 그림자입니다”하니 진묵은 탄식하며 “너는 나의 겉모습만 알뿐 석가의 참모습은 모르는 도다” 하시고 지팡이를 메고 조실(祖室)로 들어가 가부좌로 앉은 다음, 제자들을 불러 자신이 곧 떠나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물어보라고 하였다. </p>
<p> </p>
<p>제자들은 스승의 법맥이 궁금하여 재차 물으니 대사께서는 못마땅해하시며, “비록 세간의 명리(名利)에 대한 집착에서 초탈하지 못한 스님이라 할지라도 휴정(休靜) 노장의 문하(門下)로 하려무나.” 이 말씀을 마치고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으로 유유히 열반에 드시니 세속나이 72세, 법랍 52하(夏)였다.</p>
<p> </p>
<p>요컨대, 진묵스님은 조선중기에 달처럼 나타나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한소리 굉음을 남기고 떠나신 거인(巨人)이시다. 이름이 말해주듯 우레의 굉음(震)과 침묵(&amp;#40665;)을 함께 지니고 숱한 신화와 전설의 주인공으로 살면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신 분이기도 하다. 참혹한 전쟁을 전후한 암울한 시대의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살았던 만큼 당시 진묵스님의 행장(行狀)에 나타난 의미를 찾아 수행의 지표로 삼는 이들이 많다.</p>
<p> </p>
<p> 비록 선사의 말은 전해지는 것은 희귀하지만 그가 남긴 몇몇 게송에서 알 수 있듯이 대도(大道)를 달관한 인품과 지구가 좁아 춤추기가 곤란하다는 그의 외침은 지구촌의 거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스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진묵선사유적고」와 「불조원류(佛祖原流)」, 「영당중수기(影堂重修記)」등이 전한다.</p>
<p> </p>]]></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2:51:08 +0900</dc:date>
	</item>
	<item>
	<title>불교탐구 - 제2부 삼보 - 6장 교단의 성립과 변천</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9</link>
	<description><![CDATA[<p><strong>제 6 장 교단의 성립과 변천</strong></p>
<p><font color="#013add"><strong></strong></font> </p>
<p><font color="#013add"><strong>1. 교단의 구성</strong></font></p>
<p>  (1) 스님의 어원과 명칭<br />  스님이라는 말은 원래 ‘스승님’의 준말이다. 삼국시대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될 때 귀족들은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전래자로부터 배워야 했는데, 그러다보니 귀족들은 자기들을 가르치는 사람을 높은 위치의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라의 스승이라는 의미의 ‘국사’, ‘왕사’가 생겨났고, 초기에는 스승이라는 의미의 ‘사’(師)의 예우를 뜻하는 칭호였는데 불교가 본격적으로 수백년간 민중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스승님으로, 오늘날 스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p>
<p> </p>
<p>그리고 원래 인도에서는 남(男) 스님을 일컬어서 비구(比丘)라고 하는데, 이 말은 걸사(乞士)라는 뜻이다. 비구니(比丘尼)는 여스님을 의미한다.</p>
<p> </p>
<p>반면에 승려라는 말은 중국에서는 어느 종교를 불문하고 수도하는 자를 일컫는다. 천주교 신부도 승려요 수도사도 승려다. 그러므로 스님을 지칭하는 전용어는 비구(비구니) 또는 스님이라 함이 알맞다.</p>
<p> </p>
<p>(2) 사부대중</p>
<p>  보통의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수행과 복덕을 갖출 때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한다. 즉, 깨달음을 성취한 단계이다. 우리는 이러한 아라한의 경지를 얻은 스님을 큰스님(대사)이라고 부르게 된다.</p>
<p> </p>
<p>깨달음이란 중생에서 부처의 경지로 올라가는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이를 통해 중생은 진리와 합일되어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는 완전한 인격자의 상태에 이른다. 이때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부처님과 같은 인격과 자비심만 남게 된다.</p>
<p> </p>
<p>이러한 깨달음을 얻고자 정진하는 보통 수행자들은 다시 둘로 나뉘어 재가수행자와 출가수행자가 있다 여기서 승가의 구성원을 일컫는 ‘사부대중’이라는 말이 나온다.</p>
<p> </p>
<p>사부는 ① 비구 (남스님) ② 비구니 (여스님) ③ 우바새 (남신도) ④ 우바이 (여신도)를 가리킨다. 비구와 비구니는 출가수행자이고, 우바새와 우바이는 재가신도이다. 여기에 출가한 미성년수행자인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 식차마나(式叉摩那)를 더해서 칠중(七衆)이라고 부르기도 한다.</p>
<p> </p>
<p>부지런히 노력하는 자라는 뜻의 사문(沙門)은 불교 수행자를 통칭하는 말이며, 교단내에서 수행을 쌓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를 상좌(上座) 또는 장로(長老)라고 한다. 장로라는 말은 원래 불교용어인데, 기독교의 용례와는 달리 스님을 일컫는 용어다. 이러한 수행자를 대덕(大德), 존자(尊者), 구수(具壽)라고도 한다. 화상(和尙)은 제자를 기를 자격이 있는 자를 일컬으며, 아사리는 궤범사(軌範師)라고 해서 교단에서 제자를 받아들일 때 스승이 되는 사람이다. 계를 받을때는 아사리가 누구이며, 계사(戒師)가 누구인지 분명히 밝힌다. 보살계도 마찬가지로 전계화상을 밝혀 쓰여져 있을때도 있다.</p>
<p> </p>
<p> 우리는 종종 거사(居士)＊나 처사(處士) 또는 다른 말로 청신사(淸信士) 또는 신남(信男)이라는 말로 우바새를 대신하며, 우바이의 경우는 보살 또는 보사(保寺 : 절을 보호하는 신도)와 청신녀(淸信女) 또는 신녀(信女)라는 말로도 대신한다.</p>
<p> </p>
<p>우리나라에서만 여신도를 일컫어 보살이라고 하는데, 이때 보살은 상승경계에 들어가 대보살이 아니라 초심보살을 가리킨다. 뒤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사실 보살이라는 말은 스님들도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경우가 있으면 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서 볼 수 있듯이 보살이라는 명칭은 승속마저 초월하는 훌륭한 명칭이다.</p>
<p> </p>
<p>대중(大衆)이란 많은 군중이라는 뜻으로 절에 모여 수도하는 많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중(衆)이라는 말은 본래 나쁜 의미가 없이, 스님들이 자기를 가리켜 겸손하게 사용한 명칭이었는데, 조선시대 유생(儒生)들이 스님을 가리켜 비하적인 의미로 사용한 바람에 왜곡되어, 오늘날 스님을 제외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은 무례가 될 수 있다.</p>
<p> </p>
<p><font color="#013add">* 거사란 인도에서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국에서는 학덕과 재능을 겸비하고도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통 출가하지 않고 집에 있으며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하는 남자 신도를 가리킨다</font>.</p>
<p> </p>
<p> (3) 계율 (戒律)</p>
<p>  교단에 속하는 자는 삼보에 귀의하고 계를 지킬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교단에 들어옴에 있어서 계를 받는데 이를 수계(受戒)라고 한다. 수계를 받으면 법명(法名)도 함께 받는다.</p>
<p> </p>
<p> 구족계(具足戒)를 받는 경우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 등을 받는데, 그 근본은 5단계에 있다. (자세한 내용은 지계바라밀에서 다룬다)</p>
<p> </p>
<p>율(律)이란 교단의 규칙 가운데서 계(戒)와 그것을 위반했을 때 가해지는 벌칙, 그리고 교단행사에 관한 규칙을 말한다. 벌칙중에서 가장 큰 것은 교단추방으로 ‘바라이’라고 한다. 이는 오계중에서 불음주(不飮酒) 이외의 것을 파(波)했을 때 받는 벌이다.</p>
<p> </p>
<p>교단의 행사중에는 안거(安居)가 있는데 매년 우기(雨期)에 수행자가 한 장소에 모여서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출가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중의 하나로, 인도에서는 하안거(夏安居)만 한다. 우리나라는 하안거뿐만 아니라 동안거(冬安居)도 있다. 출가수행자의 소지품으로는 삼의일발(三衣一鉢)이 허용된다. 의식주에 약품을 합쳐 4의(依)라고 한다. </p>
<p>
</p><hr /><font color="#013add"><strong>2. 보살</strong></font>
<p></p>
<p>  대승(大乘)의 이상상(理想像)은 보살이다. 보살은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a)를 한자로 음사한 보리살타의 준말로, 구도자(求道者), 깨달음을 구해서 수도하는 자라는 의미인데, 원래 석존의 성도 이전의 칭호였다.</p>
<p> </p>
<p>  대승불교에서는 불(佛)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지가 바로 보살임을 강조하고, 이에 따라 보살을 만인의 이상으로 삼았다. 보살은 자기의 깨달음에 관심을 갖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희생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되었다. 그래서 보살에는 항상 두 가지 좌우명이 따르는데, 위로는 보리(=지혜)를 구하는 것이요,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과 자기가 쌓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남을 위해 돌리는 회향(廻向)은 보살에게 절대로 중요한 것이 된다. </p>
<p> </p>
<p>그리고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지원하여 이 세상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먼저 피안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공과 같은 자이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안으로 자신의 수업에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밖으로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이를 가리킨다.</p>
<p> </p>
<p>사실 보살이란 깨달음을 얻은 자를 지칭하는 아라한을 초월한 존재다. 우리가 종종 의지하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약사보살, 미륵보살 등은 바로 이러한 보살행을 잘하시는 대보살들이다. 석존도 길고 긴 생사윤회 속에서 보살로서 수행한 끝에 부처의 경지를 이루신 것이다.</p>
<p> </p>
<p>대승경전인 「유마경」에 보면 주인공 유마거사는 한사람의 중생이라도 깨닫지 못하고 중생인 채로 있으면 자신만 편안하게 부처님 경지에 들어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 육바라밀이니 십바라밀이니 하는 보살행을 계속해서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보살행에 의해 성불에 도달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다.</p>
<p> </p>
<p>우리는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 보현행의 화신 보현보살, 자비의 화신 관음보살 등등 여러 대보살님들 뿐만 아니라 넒은 의미로서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봉사행(=보살행)을 즐겨하는 사람들 모두 보살이라고 보고자 한다. 따라서 보살은 대보살, 출가보살, 재가보살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고, 경지에 따라 초발심(初發心)보살, 행도(行道)보살, 불퇴전(不退轉)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 등 4계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행도(行道)보살은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보살을 말하고 불퇴전보살은 행도가 뒷걸음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보살을 말한다. </p>
<p> </p>
<p>이 정도면 상당한 경지에 다다른 것이라고 칭송할만 하다. 초발심보살이란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이 우러나온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교리법회 등에 참석하여 부처님 말씀을 듣는 자세가 된 사람이다. 마지막 단계의 일생보처보살은 대보살이 해당된다. </p>
<p> </p>
<p>(1) 대보살</p>
<p>  대보살은 마하살＊이라고도 한다. 주로 불경 속에 나오며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상승경지를 얻은 보살이다. 상승경지란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수많은 생을 거쳐 복덕을 쌓고 급기야는 충만해진 자신의 복덕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면 상승보살이다.</p>
<p> </p>
<p>그래서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은 상승보살, 곧 대보살이라 불린다. 이 분들은 모두 일체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하면서도 그러한 행위에 대한 자만심이 없었기에 진정한 보살행의 실천자가 되신 것이다. 이 분들은 지혜를 성취하시고 많은 세월동안 보답을 바라지 않는 봉사행을 닦으셨기에 부처의 경지에 다다르신 분이므로 불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신앙의 대상이 되신 것이다.</p>
<p> </p>
<p>지혜와 복덕에 있어서 석가모니불을 능가하는 분은 없다. 석존은 처음 발심하여 3겁(40리 둘레의 정사각형 돌이 다 닳으면 1겁)을 윤회하면서 수행과 복덕을 쌓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석존의 탄생에서부터 왕족으로 태어나 출가 후 모든 것을 버리고 득도하시여 부처가 되시고 열반에 드실 때까지 45년간 많은 귀족들과 평민들이 부처님을 받들며 평탄한 성자의 길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소위 성인이라고 칭하는 여타 성인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p>
<p> <font color="#013add"> * 마하살이란 마하살타의 약칭. 마하=큰, 살(살타)=용감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즉, 보살은 큰 원(願)과 행(行)이 있어서 큰 일을 위해 물러나지 않고 크게 용감한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font></p>
<p> </p>
<p> (2) 출가보살</p>
<p>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된 사람은 출가수행자인데, 처음 발심한 스님은 초발심 보살이 된다. 점수돈오(漸修頓悟)든지, 돈오점수(頓悟漸修)든지, 점수점오(漸修漸悟)든지, 점오점수(漸悟漸修)든지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아라한의 경지에 들게 된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어야 아라한 즉, 큰스님이라 불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수많은 영겁을 중생구제와 수행에 정진하여 복덕을 충만히 쌓아야 부처가 되는 것이다.</p>
<p> </p>
<p>(3) 재가보살</p>
<p>  재가수행자는 세속생활을 하면서 계를 받고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일반 불자가 해당된다. 부처님 당시 깨달음을 얻은 대보살의 경지에 이른 재가보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머리에 화관이나 두건을 쓴 이유는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을 얻었고 보살행을 쌓아 지혜와 복덕을 베풀었다. 석존도 전생에 출가자의 모습으로 수행도 하셨지만 재가자로서 수행에 정진했던 경우도 많았다. 그러므로 불도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보살인 것이다.</p>
<p> </p>
<p>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주의할 것은 보살의 의미를 단순히 불교를 믿는 여신도라고만 생각하면 안된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일반대중이든 간에 봉사행을 즐겨 실천하는 사람<br />이면 다 보살이며, 불교를 믿는 불자도 보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여신도를 보살이라고 혼동하여 부르게 된 연유는 아마도 도울 보(保) 절사(寺)의 합성어인 ‘보사’라는 호칭으로 스<br />님들이 특별히 봉사행을 잘하는 여신도를 부른데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p>
<p> </p>
<p> 이렇게 구별을 하고 보면, 상승경지에 들어간 대수행자를 일컫는 보살이라는 명칭을 초발심 불자에게 쓰는 것이 좀 의아스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쉽지 않은 봉사행을 하며 훌륭한 보살님들을 본받아 참다운 보살이 되라는 의미에서 여신도를 부르는 명칭이라면 불가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p>
<p> </p>
<p>그런데 이 보살행이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불멸 이후 대승불교에서부터이다. 이유인즉, 부처님이 참 진리를 깨닫고 45년동안 설법하신 초창기에는 각 개인의 깨달음 자체를 급선무로 여기시고 주로 개인의 수행과 진리의 깨달음을 강조하셨다. 그러다가 중반기 이후부터는 개인의 자각과 아울러 모든 중생의 구원이 주제가 되어 일체 중생의 성불과 이상 불국토(=살기좋은 세계)를 실현해야함을 설파하여 불교는 각 개인의 깨달음은 물론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자리이타(自利利他)의 부처님 사상을 더욱 굳건히 정립시켰다.</p>
<p> </p>
<p> 이렇게 부처님의 교리가 완성되고, 부처님이 80세로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 법을 이어받은 가섭존자를 중심으로 교단을 이끌어나갈때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정법이 멀어져 혼탁해질 것을 염려하여 엄격하게 수행하는 가풍을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러던 승가의 수행이 부처님 열반 후 수 백년의 시간이 흐르니 승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불법이 왜곡되고 잘못 이해되는 부분이 생기며, 유사한 불경이 조작되는가 하면, 여러 사회문제가 빚어져 더 이상 불교가 방관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p>
<p> </p>
<p>이에 불교학자는 흩어져 있던 부처님 말씀을 모아 다시 경전을 편찬하고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시발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 말씀을 전법(傳法)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동안 등한시했던 일체 중생의 구제활동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수행자들은 자기의 수행과 더불어 재가불자의 깨침과 행복을 위한 불교 본래의 사명으로 되돌아왔다. 이에 불경에 나타나는 보살사상이 중요시되고, 대보살의 수행과 사상도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발전되게 이르러, 재가불자들에게도 육바라밀과 같은 보살행을 강조하게 되었다.</p>
<p>
</p><hr /><font color="#013add"><strong>3. 교단의 성립과 발달</strong></font>
<p></p>
<p>  (1) 교법의 전파</p>
<p>  부처님의 원만하고 위대한 인격은 당시 사회를 교화하고 감화시켰고 동시에 심오하면서도 실제적인 가르침은 인심을 만족시키기에 족했다. 그리하여 원시불교시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출가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여 제자가 되었고 또 재가불자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도 부처님의 감화가 주로 갠지스강 유역의 제국에만 미칠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부처님 입멸 300여년이 지난후에 중인도 마가다국에 아쇼카왕이 출현하여 전인도를 통일하면서부터 상황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p>
<p> </p>
<p>  본래 평등주의와 자비사상으로써 세계적 종교의 성격을 갖고 있던 불교는 인도전역에 유포되는 동시에 다시 그 영역을 넘어서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간지대와 중앙아시아의 일부지역, 남쪽으로는 스리랑카, 동쪽으로는 미얀마, 그리고 서쪽으로는 멀리 그리스, 이집트까지 퍼지게 되어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이다. </p>
<p> </p>
<p> 다시 부처님 입멸 750여년이 지난 무렵 서북 인도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점유한 대월지국 카니슈카왕의 보호로 말미암아 이미 그 이전에 동점(東漸)을 시작했던 불교는 더욱 세력을 얻어서 인도와 서역지방으로부터 활발하게 중국을 향하여 퍼져 나갔고, 한국, 일본, 티벳 등 각국으로 유포되었다. </p>
<p> </p>
<p>동시에 페르시아와 소아시아 방면으로 서점(西漸)하여 동서양 각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또한 동남 아시아쪽으로는 샴, 안남, 스마트라, 쟈바 등 남양군도에 까지 확장되었고,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일부에도 전파되었다. 근래에 와서는 구미 각국에도 전파되어 불교는 세계 4대 종교 중에서 최고의 종교로 자리하고 있다.</p>
<p> </p>
<p> (2) 승단의 파생</p>
<p>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 가르침에 대하여 제각기 자기들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 중에는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본래 계율 그대로만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과 보다 넓은 뜻으로 받아들여 수행하면서 수행장소나 그곳의 환경에 따라 변화도 적당히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제자들로 나뉘어 진다.</p>
<p> </p>
<p>그리하여 이러한 견해차이는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며 발전하게 되는데 크게 구분해 보면 원시불교시대, 부파불교시다, 소승불교, 대승불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p>
<p> </p>
<p>① 원시불교 (原始佛敎)</p>
<p>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시고 설법하신 초기부터 그 가르침에 의지하려는 제자들과 교화받은 신자들은 점차 늘어났다. 그리하여 10대 제자를 비롯한 1,200여명의 아라한과 출가하지 못한 사람들은 재가신도가 되어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공양을 드리며 공경히 받들었으며, 이들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100여년 흘러가도록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고 평화롭게 수행하였다. 이처럼 부처님 성도로부터 불멸후 약 100년까지를 원시불교라 한다. </p>
<p> </p>
<p>석존 생존 당시의 불교와 불멸후 약 100년 정도까지의 원시불교시대에는 석존이라는 한 사람의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진리의 해석, 실천, 실현이 구현되었다. 석존은 이 세상 모든 것은 그 어는 것 하나도 인연따라 생성, 변화, 소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연기(緣起)의 도리(道理)를 설하셨고, 연기법에 뒤이어 제기되는 무아(無我)의 직관을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난 무상성(無常性)을 알고 열반적정에 이른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 몸소 구현해 보이셨으므로 모든 것이 분명했다.</p>
<p> </p>
<p>그래서 원시불교시대에는 그 중심축이 되셨던 석존의 존재와 말씀으로 말미암아 의견이 분분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p>
<p> </p>
<p>② 부파불교 (部派佛敎)</p>
<p>  불멸(佛滅)후 한 동안은 부처님 재세시 이미 여러나라 왕들이 부처님을 초청하여 불법을 들었고 불교에 귀의했으므로 일반 민중에도 불교가 많이 유포되어있었다. 그래서 오직 자신의 수행에만 전념해도 되는 시기였다.</p>
<p> </p>
<p>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100여년이 지나자 점차 수행하는 방법이 달라지기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잘 지키려는 쪽과 이를 어기더라도 다소 자유롭게 수행하려는 쪽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그래서 원시불료에서 부파불교로의 이행은 특정한 성인 중심의 불교에서 율법과 교의(敎義) 중심의 불교로 이행(移行)된 것이다.</p>
<p> </p>
<p>이 부파불교시대의 불교교단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經)과 교단의 규칙(律)을 깊이 연구하고 발전시킨 웅대한 논서(論書)들을 작성하면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때의 논(論)이라는 말의 원어가 아비다르마이고, 이를 한역하여 흔히 아비달마＊라고 하였는데, 그래서 이 시대의 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고도 칭한다. 즉, 부파불교에 이르러서 전대에 없던 논장이 더해져서 삼장(三藏)이 성립되었고, 이 중에서 논장이 바로 아비달마법을 특징짓는 내용인 것이다.</p>
<p> </p>
<p>불멸후 200～300년이 경과하니, 부파불교에서는 이미 형해화(形骸化)한 율법과 교의만을 가지고 전통적 권위를 삼은 것은 석존의 가르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불교의 법도를 충실히 표현하지 못하게 되는 이때부터 서서히 대승불교운동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p>
<p> </p>
<p> 경전의 제 2결집 때 부터는 부처님의 계율을 그대로 지키려는 쪽을 ‘상좌부’ (上座部)라 하고, 다소 변화된 속에서 자유롭게 수행하려는 쪽을 ‘대중부’ (大衆部)라 하며 두 갈래로 나뉘어지면서 최초의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이 두 파를 근본이부(根本二部)라고 한다. 이것이 불멸후 약 4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상좌부에서 11갈래, 대중부에서는 9갈래, 모두 20갈래로 나뉘어지는데 이 동안을 부파불교 시대라 한다. 이를 흔히 소승 20부라고 칭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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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상좌부(上座部)의 상좌(上座)는 나이 많은 어른이나 장로이다. 이들은 대중부(大衆部)에 비하면 아무래도 좀더 보수적이고 완고한 편이다. 반면에 대중부는 젊은 혈기에 가득찬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생각에 다소 융통성이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 하나의 계율만 가지고도 의견대립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자유주의자들은 기존 교단을 나와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게 되고, 계속해서 부파로의 분열이 지속되어 모두 20여 갈래가 나게 된 것이다.</p>
<p><font color="#013add">  * 아비달마라는 말은 ‘법(다르마)에 관한’리라는 뜻으로 이는 부처님이 설한 법에 관한 연구라는 의미다.</font></p>
<p> </p>
<p>③ 소승불교 (小乘佛敎)</p>
<p>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자 각 부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학문적, 이론적 체계를 정립하여 자기 부파의 우수함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그라나 당시의 사상가들은 이타행(利他行)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자리(自利)추구에만 몰두하였고, 매우 번잡한 이론을 일삼아 교리이해와 해석은 매우 극소수 전문가의 독점물이 되어버리게 했다. 이에 따라 더욱 깊은 연구와 교리발전에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되고 자신의 수행에는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승가 외에는 가르침의 전파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잘 짜여진 사변(思辨)의 기틀은 후세 대승사상의 체계화에 있어서 불가결한 기반이 된 것도 사실이다.</p>
<p> </p>
<p>그리하여 소승(小乘)은 오직 자신의 해탈만을 위하여 수행에 전념하고 설사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하여도 구제활등을 펴지 않는 소극적인 불교라는 의미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런 수행방식과 이론은 지금의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스리랑카로 전해져 이 지역 불교의 주종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를 일명 소승불교라고 칭하기도 한다.</p>
<p> </p>
<p> ④ 대승불교 (大乘佛敎)</p>
<p>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400여년의 시간이 경과된 후, 지나친 분열을 일삼는 소승부파불교에 대한 반발, 기성세대의 교만과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이 뜻있는 많은 신도와 스님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사상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p>
<p> </p>
<p> 이것은 소승불교의 소극적인 면에 불만을 가지고 불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본래 부처님의 가르치신 뜻에 본질적으로 충실하고자 주장하는 이른바 대승불교 운동이다. 사실 불교는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그리고 대승불교도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되었다. 소승에서는 진리에 대한 해석이 아직 불완전했고 대승불교에 와서야 보완되고 완성되어가고 있는 것이다.</p>
<p> </p>
<p> 대승불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p>
<p> </p>
<p> 첫째, 자리(自利)와 이타(利他)를 겸비한다. 이전의 부파소승불교에서는 타인의 구제보다 자신의 구제에 관심을 가졌던 바에 비해서 대승불교는 타인을 위한 활동이 바로 자리(自利)를 위한 <br />수행의 완성이 된다는 교리이다.</p>
<p> </p>
<p>  둘째, 재가(在家)와 출가(出家)를 일관한다. 부파소승불교가 출가주의인데 반해 대승불교에서는 재가자를 배제하지 않고 차이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대승의 승(乘)은 실어나르는 것을 뜻하고 대승이란 이것이 크다는 의미다. 출가와 재가에 관계없이 이상적인 인간상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보살이다.</p>
<p> </p>
<p>셋째, 신심과 실천을 중시한다. 그래서 대승에서의 실천 덕목인 육바라밀이나 십바라밀은 대단히 중요시된다.</p>
<p> </p>
<p> 넷째, 부처님의 구제력을 중시하여 이의 근거가 될 초인으로서의 부처에 대한 이론이 발달했다.</p>
<p> </p>
<p> 다섯째, 모든 사람이 보살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의 보살은 부처에 대한 신앙을 기초로 하여 자기가 보살이라는 신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대승의 보살은 부처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자이므로, 이는 곧 누구라도 부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과 깨달음의 결과를 중생에게 돌리는 회향과 자비에 바탕을 둔 실천덕목인 육바라밀을 중시한다.</p>
<p>
</p><hr />
이후 많은 대승경전들이 제작됨에 따라 대승불교는 불교교리를 발전시켰는데, 이렇게 발달한 대승교의(敎義)는 다음과 같다.
<p></p>
<p> </p>
<p> 첫째,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의 본원(本願)과 정토(淨土)를 설하며 자비를 칭송한다. 또한 불신론(佛身論)은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부처님(法身)과 중생의 구제를 위해 몸을 나눈 부처님(色身)이외에도 구체적으로는 시방삼세에 온갖 부처가 존재한다고 설한다.</p>
<p> </p>
<p>  둘째, 실천의 주체가 되는 보살행으로서 육바라밀 등을 설천 덕목으로 설하며, 그 수행의 단계로 십지(十指)를 설한다. 또한 이상적인 대보살로 문수, 보현, 관음 등의 활약을 설한다.</p>
<p> </p>
<p>셋째, 실천의 기반으로서 진리관은 부처님의 성도하심을 원점으로하여 이것을 모든 현상의 연기(緣起)속에서 찾고자 하며, 이것을 진여(眞如) 또는 법계(法界)라 부른다. 또한 그의 특색을 공(空)이라 파악하고, 반야바라밀에 의해 공(空)을 체득하는 것임을 설한다.</p>
<p> </p>
<p>요컨대, 대승불교는 소승불교가 자기수행에 절대 중점을 두는 반면, 보살행을 실천하여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정신으로 근본을 삼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속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높이 찬양하기 위하여 불탑을 세우는 등 다양한 불교문화를 육성 발전시켰다. </p>
<p> </p>
<p>그런데 대승불교운동에는 세속에 있는 재가불자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그러다 보니 불경에 있는 보살사상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 불경에 나타나는 대보살들의 수행과 사상은 일반재가자의 모범이자 신앙의 대상까지 되었다. 이렇게 보살사상이 크게 연구되고 후세대 불교의 중요사상으로 발전되었다.</p>
<p> </p>
<p> 이와 같이 자신의 해탈과 중생의 구원을 겸하여 수행하는 대승불교는 인도의 용수＊, 세친＊, 무착＊ 등을 비롯해 중국의 달마대사로부터 혜능스님 등을 거쳐오며 크게 발전되었으며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이 대승불교권에 속한다. 이에 우리나라도 자신의 수행과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불교가 정착된 것이다. </p>
<p> </p>
<p>* 용수(龍樹 150～250년경)는 남인도사람으로 불교 및 타 종교에 정통하여 후대 중국에서는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까지 추앙받은 인물이다.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크게 발전시켰다.<br /> </p>
<p>* 세친(320～400년경)은 무착의 동생으로 처음에는 소승학자로 활동하여 「구사론(俱舍論)」을 지었다. 그후 무착을 따라 대승으로 전환하여 유식사상에 관한 몇가지 논서를 남겼다.<br />* 무착(310～390)년경)은 유식학파의 개조(開祖)인 미륵(270～350년경)의 제자다.</p>
<p> </p>
<p>⑤ 밀교 (密敎)</p>
<p>  대승불교의 마지막 단계로서 7세기 후반경에 밀교가 등장한다. 밀교란 흔히 대승불교의 최종단계라고 하는 것인데,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종교적 생명력을 잃게 되자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등장한 것이다. 밀교는 현교(顯敎)에 반대되는 명칭으로, 현교란 널리 대중에게 개방되어있는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그 세계관이나 종교적 이상에 도달하는 법이 명료하게 언어로써 표현된 불교이다. 이에 반해 밀교는 자신을 비공개적인 교단의 내부에 폐쇄하고, 비밀스런 교의와 의례를 사자상승(師子相承) 즉 스승과 제자사이의 은밀한 전달을 통해 간직하고자 하는 비밀불교이다. </p>
<p> </p>
<p>따라서 불교의 실제 신앙형태에 있어서는 밀교가 불교의 독자적인 한 흐름으로서 정립되기 이전부터 밀교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요소들이 대승경전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아 이론이 체계화되면서 발전정립된 것이 밀교이다.</p>
<p> </p>
<p> 밀교의 사상과 실천적 요소는 복잡하지만 그 근원은 인도 토속의 신앙형태가 바탕이다. 그 대표적 요소가 인도의 고대성전인 ‘아타르바베다’에 있는 주법과 주문 등이다. 그 특징은 주술적인 의례의 조직화와 신비주의이다.</p>
<p> </p>
<p> 불교에 있어서도 이러한 주술적, 신비적 특징은 이미 초기경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바,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차 표면화되었고, 대승경전에 이르러 더욱 부각되게 되었다. 그 예로 「반야심경」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주문, 즉 다라니＊로 끝맺고 있는데, 특히 밀교는 이런 다라니의 주술적인 힘을 중시한다.</p>
<p> </p>
<p>간혹 우리가 밀교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좌도밀교 때문이다. 서구인들이 밀교를 가리켜 탄드라불교라고 칭하는데, 이는 좌도밀교와 같은 것이다. 좌도밀교란 여성과의 성적인 의례를 근간으로 하지만 그 본질에는 여성의 기능을 우주적 요소로 파악한 인도의 관념과 성적의례를 통해 부처님이 얻었던 깨달음을 체험한다는 데에 근거한다. 이것이 처음부터 감각적인 환희 자체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는데, 실제 형태에 있어서 일반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던 것이다.</p>
<p> </p>
<p>인도에서 탄드라는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의궤를 가리키는 말로서, 탄드라를 밀교라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보통 말하는 밀교는 비로자나로 상징되는 우주와 내가 합일되는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 체험을 위해 다라니, 만다라 또는 진언(眞言)과 같은 주술을 이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밀교는 현재의 몸 그대로 성불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실재와 현상이 자기의 한 몸에서 융합하는 원리를 세운 불교이다.</p>
<p>  <font color="#013add">* 다라니란 능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이치를 받아들이고 지녀 잃지 않는다는 듯인데, 하나의 글자, 하나의 말속에 모든 종류의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지니고 악한 법을 능히 막아주는 것이 있다고 한다.<br /></font><font color="#013add"><strong>4. 우리나라의 불교</strong></font>
</p><p></p>
<p>  기원을 전후하여 중국에 전래된 인도의 불교는 처음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점차 성숙되면서 천태종, 화엄종, 선종 등 여러 학설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전통사상과도 다르고 인도의 사상과도 다른 독특한 불교를 형성하여, 특히 달마이후 생겨난 선종(禪宗)이 6조(祖) 혜능스님 이후에 5가(家) 7종(宗)을 이루며 발전하여 곧 중국 불교의 선종을 확립해가며 발전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에까지 유학승 등을 통해 많은 영향을 끼쳤다.</p>
<p> </p>
<p>중국에서 먼저 연구된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이라고 보고, 12년 뒤 384년에는 백제에, 또 신라는 572년 법흥왕 때 불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p>
<p> </p>
<p>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교는 처음에는 대부분 귀족중심의 불교였으나, 점차 대중불교화하며 나라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1,600여년을 줄기차게 이어오며 민족문화 곳곳에 그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땅에서 불교가 찬란하게 꽃피었을때는 나라 역시 번창했으며 국민 각자의 정신적 자세와 호국의 이념도 깊이 심어주었다.</p>
<p> </p>
<p>고구려에서는 17대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를 처음 받아들였으며 당시는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믿도록 함으로써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백성을 보호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백제에서는 15대 침류왕 원년(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어 온 백성이 믿고 생활토록 하였다. 그 후 26대 성왕때 이르러서는 불교는 더욱 꽃피었으며 성황 30년(522년)에는 일본에까지 불교를 전하여 일본의 문화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p>
<p> </p>
<p>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늦게 23대 법흥왕 14년(572년)에 와서야 불교를 인정했으나, 실은 오래전부터 불교를 신봉한 결과 이때에 이르러 공식화한 것임을 삼국유사 등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신라사람들은 불교를 통하여 서로의 힘을 합했으며 기존의 문화를 더욱 눈부시게 발전시켰고, 그 결과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큰 유산을 남겨주었다. 한편 화랑정신으로 무장하는 근본이 되었으며 끝내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다.</p>
<p> </p>
<p>고려시대에는 나라의 발전과 백성의 평안을 위해 불교를 숭상한 결과 갖가지 불교행사를 가졌다. 또한 몽고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웠을 때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백성의 마음을 한 곳에 뭉치게 하여 국란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p>
<p> </p>
<p>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펴왔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한글의 창제와 반포에 미치는 힘 또한 매우 컸다. 세종대왕은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에게 명하여 석존의 일대기를 편찬하여 훈민정음으로 해석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도록 했으며, 세종이 이것을 보고 감탄하여 친히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어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였다. </p>
<p> </p>
<p>이렇듯 한글이 창제되자 가장 먼저한 일이 불전(佛典)의 번역작업이었다. 수양대군은 후일에 왕이 되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더욱더 많은 불경을 우리 글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당시 번역해서 간행한 법화경, 능엄경, 금강경, 원각경, 반야심경, 아미타경, 선종영가집 등 많은 불교 경전은 국가시책으로 이루어진 큰 사업이었으므로 그 내용과 체계가 매우 훌륭하고 불경 번역의 모법이 되고 있다. </p>
<p> </p>
<p>또한 임진란때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영대사, 영규대사 등이 주축이 되었고, 병자호란때는 명조대사, 벽암대사 등 많은 스님들이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비록 국가로부터 갖가지 박해를 받더라도 난리 중에는 나라를 구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대자비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p>
<p> </p>
<p>근대에 와서도 한때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면서 일제의 우리 전통 불교 말살정책으로 존폐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광복과 더불어 다시금 우리의 전통불교를 찾게 되었다. 꾸준하게 우리의 불교를 지키려는 뛰어난 스님들의 노력에 의해 우리의 불교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br /></p>]]></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at, 15 Mar 2008 23:02:20 +0900</dc:date>
	</item>
	<item>
	<title>불교탐구 - 제 2부 삼보 - 7장 육바라밀</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8</link>
	<description><![CDATA[<p><strong>제 7 장 육 바 라 밀</strong></p>
<p></p>
<p>육바라밀(六波羅密)이란 불교의 여섯가지 실천덕목으로서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 지혜바라밀(智慧波羅密)을 말한다.  이는 원시불교시대 이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수행방법도 약간씩 변해왔는데 특히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육바라밀의 수행을 근본 덕목으로 강조해왔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에 의해 일체 중생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고 천명한 불교의 기본 수행법으로서, 누구나 실천할 수 있고 또한 불자라면 반드시 육바라밀을 알아서 이것으로 신행생활을 해야 한다.</p>
<p></p>
<p>바라밀을 범어로 하면 파라미타(Paramita)라고 하며, 모든 고통의 경계에서 벗어나 해탈자재한 대적정에 이른다는 도피안(到彼岸), 즉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을 차안(此岸)이라 하는데 이곳의 반대인 이상세계, 부처님 세계, 완성된 세계를 피안(彼岸)이라고 한다. 즉, 바라밀이라는 말에는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과 완성이라는 두 의미가 있다. </p>
<p> </p>
<p>  따라서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끊임없이 수행해가는 것이 바라밀의 참 의미이다. 이것은 곧 해탈에 이르는 길이고 ‘육바라밀’을 수행하는 사람을 바로 ‘보살’이라고 한다. 
</p><hr /><p></p>
<p><strong><font color="#013add">1. 보시(布施) 바라밀</font></strong></p>
<p>  육바라밀의 첫 번째 덕목은 보시바라밀이다. 보시는 주는 것이다. 보시란 자비한 마음으로 자기의능력에 따라 아무런 조건이나 보답을 바라지 아니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적 또는 정신적인 것을 베푸는 것이다. 보시로써 바라밀한다는 것은 보시함으로써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지름길을 닦는다는 의미다. 자연히 보시를 잘하면 능히 해탈할 수 있고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p>
<p></p>
<p>우리는 보시에 의해 탐심을 제거할 수 있다. 인간은 원래 영원의 세계에 와서 영원의 세계에서 살다가 영원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화 같이 회귀하는 순환 속에서 나누어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잊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바쁜 그릇된 인생들이 많다. 우리 불자들은 보시의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p>
<p></p>
<p>보시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베푸는 이, 받는 이, 보시물건 등 세가지가 모든 청정해야 하며 (三輪淸淨), 대가를 바래서는 안된다. 이를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라 한다. 이처럼 보시는 공(空)한 마음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며 집착이나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진실한 보시가 아닌 것이다.</p>
<p></p>
<p>보시의 종류에는 법(法)보시, 재(財)보시, 무외(無畏)보시가 있다. 이 순서도 중요하다. 갈수록 실천하기 어려운 보시다.</p>
<p></p>
<p><strong>(1) 법보시 (法布施)</strong></p>
<p>  이것은 부처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으로, 다른 보시보다 더 근본적인 보시이다. 부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한없는 법보시를 하셨음을 본받아 우리도 이웃에게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책이나 경전 등을 전하는 것은 훌륭한 법보시가 된다.</p>
<p> </p>
<p> 이러한 법보시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베풀어 정신세계를 올바로 열어주어 참으로 잘사는 법을 깨우치는 것이다. 사람이 물질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들이 산다고 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어느 부자마을 주민의 자살 건수가 세계 제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잘 먹고 잘 입고 큰 집에 산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님을 입증해주는 셈이다. 정신적인 고독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p>
<p></p>
<p>이처럼 올바로 사는 법은 다름아닌 부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 불법(佛法)을 함께 배우고 함께 깨달아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불자의 법보시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닿는대로 능력껏 불교책을 법보시하고, 법담(法談)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p>
<p></p>
<p><strong>(2) 재보시 (財布施)</strong></p>
<p>  이는 물질로써 보시하는 것이다. 보시는 육바라밀에서 가장 먼저 놓여 있다. 그만큼 보시가 쉽고도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보시한다는 것은 나에게서 어떤 가치있는 것을 떠나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비우는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버리는 것을 배우라고 하셨다. 버릴 줄 알아야 참 자유를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보시란 나를 버리고 나를 비워서 해탈을 이루도록 하는 바라밀인 것이다.</p>
<p></p>
<p>많은 재화를 쌓아놓고 마음으로 생각만 한다면 보시한 것이 못된다. 실천이 중요하다. 돈을 많이 모은 다음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 사람은 결코 조금도 남에게 베풀 기회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베풀 것이 있을때는 베푸는 것이 순리(順理)요 도(道)이다. 조금 있으면 조금 있는대로 보시할 줄 알아야 하며, 베푸는 일에 익숙해야 한다.</p>
<p></p>
<p>돈에 집착을 하면 할수록 윤회의 수레바퀴는 더욱 세차게 돌아서 나의 고통과 윤회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보시할 재물이 없다면 육체적인 봉사도 좋다. 넉넉한 마음으로 능력껏 베풀 때 인색한 마음은 사라지고 더불어 탐하는 마음이 사라지므로 마음이 맑아지고 육체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남을 살린 것이다.</p>
<p> </p>
<p><strong>(3) 무외보시(無畏布施)</strong></p>
<p>  이는 말 그대로 모든 두려움을 제거하여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보시로서,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무재칠시(無財七施)를 가리킨다.</p>
<p></p>
<p>즉, 부드러운 눈으로 대하며 (眼施), 밝은 얼굴로 대하며 (和顔施), 좋은 말로 대하며 (言施), 예의바르게 대하며 (身施), 선한 마음으로 대하며 (心施), 타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床座施), 손님을 편안히 해주는 일 (居舍施) 등이다.</p>
<p></p>
<p>특히 한마디 축원은 매우 소중한 무외보시이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의 일이 아닌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해보자. 어느덧 나의 삶도 보람되고 화평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p><hr /><p></p>
<p><strong><font color="#013add">2. 지계(持戒) 바라밀</font></strong><br />  <br />  재계라는 말은 계(=규칙 또는 질서)를 지킨다는 말로, 부처님 말씀에 계는 마음 속의 도적을 잡는 포승줄이며, 지키는 자체가 착한 업을 짓는 행위하고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 제자가 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계를 지키는 것을 생활화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곧 선업(善業)을 실천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p>
<p> </p>
<p> 불가의 계율은 사람에 따라 지켜야 하는 것이 각기 다르다. 출가스님이 지켜야 하는 청규(淸規)가 있고, 재가신도가 지켜야 하는 계(械)가 있다 또한 법회는 법회는 법회대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이러한 규칙들을 계율(戒律)이라고 한다. 비구(남스님), 비구니(여스님), 사미(20세전 동자승), 사미니(20세전 동녀승), 우바새(남신도), 우바이(여신도)의 여섯불자가 각각 적합한 것을 지키게 되어있다.</p>
<p> </p>
<p>  비구스님은 250계, 비구니스님은 348계, 사미 또는 사미니는 10계, 우바새와 우바이는 5계, 그리고 누구든지 받을 수 있는 대승보살계 48계, 계를 받지 않았어도 불자라면 지켜야 하는 10선계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계율 가운데 공통되는 것은 삼귀의계와 근본 4계가 있다.</p>
<p> </p>
<p><strong> (1) 삼귀의계와 근본 4계</strong></p>
<p>  삼귀의계(戒)는 불(부처님) 법(가르침) 승(스님) 삼보(三寶)에게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이 계는 부처님께서 초기 교화를 하실 때 제가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던 기본 계율이다. 불교는 삼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삼보가운데 하나도 소홀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계를 받은 불자라면 삼보를 보호하고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p>
<p> </p>
<p>스님의 존재가 보호받아 마땅한 것도 스님이 삼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스님네들은 더러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수가 있고, 아직 과정 중에 있는 수도 있으며, 또 한때는 개인적인 욕심으로 지탄받는 스님도 있지만 이럴 때에도 보호하고 감싸는 일을 재가불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p>
<p> </p>
<p>부모자식을 여의고 출가하여 일생을 수도하며 사는 스님들은 신도가 아니면 가족처럼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 사람은 잘못을 해보면 바로 가는 길을 터득하게 된다. 잘못을 한 스님을 그래도 보살펴주는 신도들의 정성을 대할 때 스님에게는 그것이 마음의 채찍이 되어 더욱 수행정진하는 스님이 되게 돕는 것이다. 그래서 이토록 귀한 삼귀의계를 오늘날에도 각 계를 받기 전에 반드시 먼저 받는 것이다.</p>
<p></p>
<p>그 다음으로 근본 4계가 있는 것이다. 근본 4계는 모든 계율의 맨 앞에 목록된 것으로 다음과 같다.<br /></p>
<p> ① 불살생 (살생하지 말 것)<br /> ② 불투도 (도적질하지 말 것)<br /> ③ 불사음 (사음하지 말 것)<br /> ④ 불망어 (거짓말하지 말 것)</p>
<p><u></u> </p>
<p><u>이 네가지 계는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파계(破戒)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u></p>
<p> </p>
<p>첫째, 불상생(不殺生)은 생명 존중을 의미한다. 살생을 자꾸하면 자비종자가 끊어진다고 한다. 아무리 작은 미물일지라도 자꾸 살생하다보면 마음이 포악해지는 것을 쉽게 경험한다. 우리 불자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계를 지켜 방생(放生)하여 무량복덕을 짓도록 해야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육식을 하지 말자고 하신 연유도 이 불살생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득이 육식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삼정육(三淨肉) 또는 오정육(五淨肉)등으로 정갈한 것을 가리라고 하셨다.</p>
<p></p>
<p>삼정육이란 불견육(不見肉 자신을 위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지 않은 고기), 불문육(不聞肉 남으로부터 죽이는 것에 대해 듣지 않은 고기), 불의육(不疑肉 자신을 위해 살생했을 것이라고 의심이 가지 않는 고기)등이며, 여기에 오정육이란 수명이 다해 자연사(自然死)한 고기와 맹수나 새가 먹다 남은 고기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에 해당되는 것은 육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p>
<p></p>
<p>오늘날과 같은 환경 속에서 육식을 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재가불자들은 절에 가는 날만이라도 육식을 하지 않는 생활을 하여서 가능한 살생을 줄이고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실천해야 한다.</p>
<p> </p>
<p> 둘째, 불투도(不偸盜)는 훔지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건을 줍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도둑질을 하면 복덕의 종자를 끊는 것과 같아서 점점 박복해지고 불구가 되는 죄업을 받는다. 부득이 투도의 죄업을 지었으면 대신 보시를 통해 죄업을 소멸해야 한다.</p>
<p></p>
<p>셋째, 불사음에는 세가지 의미가 있다. 미혼자가 음행하는 것, 기혼자가 외도하는 것, 수행자가 음행하는 것 등이다. 이는 모두 신의를 저버리는 삿된 것이므로 마땅히 금해야 한다.</p>
<p></p>
<p>넷째, 불망어는 입으로 짓는 네가지 구업(口業)을 말하는데, 망어(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기어(거짓말하는 것), 양설(한입으로 두말하는 것), 악구(욕설이나 험담하는 것)등이 해당된다. 입은 가벼운 만큼 몸이나 뜻으로 짓는 죄업보다 한가지가 더 많은 네가지 죄업이 있다. 「천수경」의 첫 구절인 “정구업진언”은 입으로 지은 죄를 말게 만드는 일도 하지만 진언을 읽으면서 입을 항상 무겁게 하여 신뢰를 쌓는다는 맹세이기도 한 것이다.</p>
<p></p>
<p>망어라는 것은 사람과 대화함에 있어서 불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말은 항상 단정하고 신의가 있어야 하는데 근거없는 말, 공연히 면박주는 말, 남의 가슴 아프게 하는 말 등이다. 거짓말을 하게 되면 발설지옥에 가서 혀를 꼬챙이로 뽑히는 괴로움을 받는다. 차라리 말을 안할지언정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 부득이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거나 중생의 큰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한해서 ‘열어놓는 법’이라 하여 허용한다. </p>
<p> </p>
<p>두말하는 것 역시 입으로 짓는 구업이다. 이간질하는 것, 시주 약속을 어기는 것, 물건을 산다고 했다가 아무 이유없이 안 사는 것 등등 다 죄이다. 두말하면 혀가 갈리는 과보를 받는다. 욕설이나 험담하는 것도 죄이다. 욕설은 사람이 다듬어지지 않았을 때 하게 되는 것인데, 이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 욕설을 잘 하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죄업을 쌓은 것이 되어 결국에는 꼭 박복한 한두가지가 있게 된다. </p>
<p> </p>
<p>또 간혹 남 싫은 소리 잘 하는 사람도 보게 되는데, 자신은 바른 소리라고 하여 시원하게 할지는 몰라도 듣는 이는 어쨌든 괴로울 것이므로 결국 인덕없고 박복한 씨를 심게 되는 것이다. 상대의 단점을 들지 말고 장점을 말해야 한다. 그러면 단점은 자연히 녹아 없어지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부드럽고 순한 말을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 </p>
<p></p>
<p><strong>(2) 재가 5계</strong></p>
<p>  근본 4계에 ⑤ 불음주(과음하지 말 것)를 보태면 재가불자들이 지켜야 하는 재가 5계가 된다. 술은 과음하게 되면 지혜를 감퇴시키고 실수를 하게 되어 다른 죄업까지 짓게 한다. 음주운전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흉악한 무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p>
<p> </p>
<p>계(戒)는 부처님께서 직접 설법하신 내용에 속한다. 부처님 말씀대로 우리 각자가 계를 잘 실천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터무니없는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한 차원 높게 자유로이 부처님 사상을 따라 개달음을 얻고자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p>
<p> </p>
<p>불교에 입문하고 어는 정도 기초가 잡혔으면 계 받는 것을 두려워말고 계를 받고 법명 또는 불명을 받아 불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대게 불자들이 계를 받으려고 생각하다가 계의 내용을 보고 지킬 자신이 없다고 포기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계는 앉아서 받고 서서 파하더라도 받으라는 말도 있듯이 계를 받으면 받지 않는 사람보다 죄를 덜 짓게 되며, 지키면 그만큼 복덕을 쌓는 것이 된다. </p>
<p> </p>
<p>혹시 계를 파했다 해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보리심(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내면 다시 계를 받는 것이 된다. 계를 받을 때 행하는 연비의식(燃臂儀式), 즉 밀밥 매긴 작은 실로 팔을 태우는 의식이 있는데, 이는 작은 불씨가 태산같은 섶도 다 태울 수 있듯 한번 연비하면 다겁의 죄업도 일시에 녹는 공덕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속에 관계없이 받을 수 있는 보살 48계는 여러번 자주 받아도 되는 것이다.</p>
<p> </p>
<p><strong>(3) 십선계</strong></p>
<p>  정식으로 계를 받지 않았으나 불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10선계도 있다. 이것은 5계와 10계를 우리 불자들이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십선(十善)으로 실천하도록 달리 표현한 것이다.</p>
<p align="left"> ① 불살생(不殺生)을 방생(放生)으로 하라<br /> ② 불투도(不偸盜)를 근면(勤勉)으로 하라<br /> ③ 불사음(不邪淫)을 정음(正淫)으로 하라<br /> ④ 불망어(不妄語)를 정어(正語)로 하라<br /> ⑤ 불양설(不兩舌)을 진어(眞魚)로 하라<br /> ⑥ 불악구(不惡口)를 애어(愛語)로 하라<br /> ⑦ 불기어(不綺語)를 실어(實語)로 하라<br /> ⑧ 불탐(不貪)을 보시(布施)로 하라<br /> ⑨ 불진(不瞋)을 자비(慈悲)로 하라<br /> ⑩ 불치(不痴)를 지혜(智慧)로 하라.</p>
<p> </p>
<p>불탐은 탐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배웠듯이 중생이 사는 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종류로 되어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욕계로서 욕망에 의해 살아가는 중생계를 한<br />다. 우리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진 욕심을 조절할 줄 아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도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의욕과 탐욕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탐욕은 지나친 욕심이지만 의욕은 삶을 이끌어가려는 기본적인 창조적 마음이다. 의욕을 잃으면 이는 병과 같아서 고쳐야 하는 정신병이다. 이와 같이 무의욕(無意慾)과 무욕(無欲)은 다른 것이다.</p>
<p> </p>
<p>불진(不瞋)이란 성내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노는 인간의 원시성이며 야만성이다. 화로써 일을 해결하려는 것은 지신의 지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 화를 내지 않고 일을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이 말은 또한 우리가 상대방이 화를 내어야만 알아듣는 저능아가 되지 않아야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p>
<p> </p>
<p>불치(不痴)란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인생을 괴롭고 힘들게 만든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는 마음은 다 어리석음의 소산인 것이다. 우리가 불교에 입문하게 되면 부처님 말씀을 배워 깨닫게 된다. 그러면 모든 어리석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진 또 정진하는 것이다.</p>
<p> </p>
<p>결국, 지계(持戒)는 몸과 마음의 뜻의 삼업(三業)을 잘 단속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짓는 악업을 조심해서 그릇됨을 막고 악을 멈추게 하는 섭율의계(攝律儀械), 한 단계 높여서 모든 선한 일을 남김없이 포용하여 실천할 것을 가리키는 섭선법계(攝善法戒), 그리고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포용하여 이익을 주라는 섭중생계(攝衆生戒)로 분류된다.</p>
<p> </p>
<p>섭율의계는 자기의 악행을 막고 번뇌를 끊는 자리행(自利行)으로서, 삼귀의계부터 앞에서 설명한 계들은 대부분 모두 섭율의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섭선법계는 자리(自利)와 이타(利他)를 겸한 것으로, 십선계가 섭선법계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
<p> </p>
<p>마지막 단계인 섭중생계는 나의 이익이 아닌 중생의 이익에만 관여하는 이타행(利他行)이다. 이 세가지 계율정신을 대승불교에서는 삼취정계(三娶淨戒)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 불자들이 법회때마다 암송하는 사홍서원(四弘誓願)과도 관계된다.</p>
<p> </p>
<p>즉, 섭율의계는 ‘번뇌무진서원단’ (모든 번뇌를 다 끊겠습니다), 섭선법계는 ‘법문무량서원학’ (법문이 한량없지만 기어이 다 배우겠습니다)과 ‘불도무상서원성’ (불도가 위없이 높지만 기어이 다 이루<br />겠습니다), 그리고 섭중생계는 ‘중생무변서원도’ (중생이 가없지만 기어이 다 제도하겠습니다)와 일치한다.</p>
<p> </p>
<p>이와 같이 삼취정계는 대승불교 보살정신의 결정체다. 마땅히 우리는 이에 입각해서 자리이타(自利利他)의 보살도를 실천해서 온 세계를 불국토로 바꾸도록 깨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계율은 우리를 속박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고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해탈법임을 깨달아야 한다. </p>
<p> </p>
<p>매우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공(空) 사상에 의하면, 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곧 불교의 계율사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부득이 계를 지키지 못한 경우가 있다면 파계(破戒)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존재에 불과한 나를 먼저 자각하고 부처님 전에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참회를 해야 한다. 이러한 참회를 위해서 계(戒)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비로소 바라밀이 성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이 세우신 계율의 참뜻을 되새겨 진정한 지계행자(持戒行者)가 되어 지계바라밀을 성취하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p>
<p><br />십악업</p>
<p>십무기업</p>
<p>십선업</p>
<p> </p>
<p> </p>
<p>신삼(身三)<br />살생(殺生)<br />불상생(不殺生)<br />방생(放生)<br />투도(偸盜)<br />투도(偸盜)<br />근면(勤勉)</p>
<p>사음(邪淫)<br />불사음(不邪淫)<br />정음(正淫)</p>
<p> </p>
<p><br />구사(口四)<br />망어(妄語)<br />불망어(不妄語)<br />정어(正語)<br />양설(兩舌)<br />불양설(不兩舌)<br />진어(眞語)<br />악구(惡口)</p>
<p>불악구(不惡口)<br />애어(愛語)<br />기어(綺語)<br />불기어(不綺語)</p>
<p>실어(失語)</p>
<p> </p>
<p><br />의삼(意三)<br />탐(貪)<br />불탐(不貪)<br />보시(布施)<br />진(瞋)<br />불진(不瞋)<br />자비(慈悲)<br />치(痴)</p>
<p>불치(不痴)<br />지혜(智慧)</p>
<p>
</p><hr /><strong><font color="#013add">3. 인욕(忍辱) 바라밀</font></strong>
<p></p>
<p>  인욕이란 참는 것을 말한다. 불교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를 박해와 멸시의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했다. 인도에서 ‘사바’란 잡된 것으로 뒤죽박죽 얽혀 있는 회잡(會雜)의 세계,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감인(堪忍)의 세계를 의미한다.</p>
<p>  </p>
<p>이렇게 사바세계에 태어난 이상 잡된 일로 시달리기 마련이기에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자는 이러한 것들을 참음으로써 바라밀을 행하게 된다. 인욕바라밀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심신의 어떠한 괴로움도 굳게 참고 좌절이나 원한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항상 자비심을 내는 것으로 진심(嗔心)을 없애는 바라밀이다.</p>
<p>  </p>
<p>그러나 인욕을 무조건적인 인종(忍從)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지혜로운 인욕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육바라밀에 지혜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혜로운 인욕이란 현재 처한 고통스런 상황에 대해 한순간 돌이켜 생각해보고, 그리하여 고통이 우리가 과거에 지은 잘못으로 인한 업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여, 지은 업을 기꺼이 받겠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인욕행이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의 업은 녹아내리고 행복이 찾아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만의 능력이며 복덕이다. 즉, 다른 중생들은 업을 받기만 하지만, 우리 인간은 업을 받음과 동시에 새롭게 개척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인내가 뒤따른다.</p>
<p>  </p>
<p>보시바라밀의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의 셋으로 나뉘고, 지계바라밀을 섭율의계, 섭선법계, 섭중생계의 셋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듯이 인욕바라밀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p>
<p>① 내원해인 (耐怨害忍)</p>
<p>    자신을 해롭게 하는 자들의 악행을 참고 용서하는 것이다.</p>
<p>② 안수고인 (安受苦忍)</p>
<p>    이것은 자신의 고통은 물론 다른 사람의 고통도 기꺼이 달게 받아들<br />    여 같이 해결하는 단계의 인욕행이다.</p>
<p>③ 제찰법인 (諦察法忍)</p>
<p>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든 일에 대해 기쁨과 슬픔으로 동요되지 않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의 본성 을 깊이 관찰하여 평등함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 달리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도 한다. 법이 란 본디 공한 것, 무생이라고 하는 것,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참는것의 극치이다.</p>
<p><br />  살다보면 참을 수 없는 순간들과 부딪힐 일이 생기기도 하며, 때로는 억울할 정도의 분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서 무슨 일이든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하게끔 되어있는 그 무엇에 의한 인연임을 깨닫고 조용히 받아들여 인욕해야 한다. 짜증을 내면 상대방을 불쾌하게 할뿐만 아니라 본인도 상하게 되어 온몸에 독기가 퍼져 병이 들게 마련이다.</p>
<p>  </p>
<p>업이니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참고 넘어서면 감정이 식게 되고, 그런 다음 후회없는 평온이 찾아드는 것이다. 결국 인욕이란 참을 수밖에 없는 사물의 도리를 관찰하여 마음의 동요를 없애는 것이다. 이러한 인욕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역경과 분노가 잠재워질 수 있고 거기서 새로운 바라밀의 경지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p>
<p>
</p><hr /><strong><font color="#013add">4. 정진(精進) 바라밀</font></strong>
<p>  정진이란 노력이며, 부지런히 힘쓰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정진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올바른 일을 꾸준하게 이루도록 노력하며, 밝고 바른 마음으로 중도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포기할 생각을 내지 말고 굳세게 실행하는 자세가 바로 정진이다.</p>
<p>  </p>
<p>승가에서는 용맹정진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선방의 결제기간중에 한숨잠도 자지 않고 7일 또는 3&amp;#8228;7(21)일 정진에 들어간다. 잠을 깨우기 위해 얼음을 머리에 이고 정진하며 가시덤불로 몸 주위를 단속하기도 한다.</p>
<p>  </p>
<p>그러나 정진은 단지 노력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정진을 쉬는 것도 정진이기도 하다. 이것은 석존이 수행하신 과정을 봐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전에 걸렸던 길이 고행이었다. 아사(餓死) 직전의 단식 고행을 비롯한 온갖 고행을 다 하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행을 그치고 중도(中道)의 길을 선택하셨다. 고행은 일방적이며 맹목적인 것인데 이러한 노력으로는 진실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중도를 걸었던 것이다. 따라서 육바라밀의 정진은 중도를 바탕으로 한 노력이다.</p>
<p> </p>
<p> 현대는 점점 더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어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선택한 삶에 대하여 수많은 갈등과 회의에 바질 때도 있다. 이런 방황의 원인은 나의 삶의 나아갈 바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때 일수록 우리는 더욱 삶의 중심을 다잡아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삶의 나아갈 지표를 수립하는 기본적인 결심이 필요하다. </p>
<p> </p>
<p>이것은 크든 작든 원(願)을 세우는 일이다. 이 원(願)을 불교에서는 발원(發願), 서원(誓願), 행원(行願), 원력(願力)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결심을 스스로 발하는 것이기에 발원이라고 하고, 원을 세움과 동시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는 맹세가 뒤따르기 때문에 서원이라 하며, 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행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행원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원을 이루려면 반드시 힘,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에 원(願)과 힘(力)을 한마디로 원력(願力)이라고 하는 것이다.</p>
<p> </p>
<p> 일찍이 석존은 제자들에게 원(願)을 세울 것을 당부하셨다. 그 이유는 원이 바로 삶의 중심축이 되어 정진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원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정진하다가도 여러 장애를 만나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고 권청(勸請)하며 수희(隨喜)하고 회향(廻向)해야 한다. 이는 원효대사의 말이다.</p>
<p>  </p>
<p>① 참회 (懺悔)</p>
<p>  참회할 때의 참(懺)이라는 글자는 두사람 (人人)이 진심(眞心)으로 잘못(非)을 인정하고 칼(戈)로 자른다는 뜻글자다. 즉, 두사람간의 잘못을 고백하고 서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br /> <br />  우리는 아직 무명한 인생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잘못 실수할 수가 많다.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우 결코 편치 못하다. 속으로 아무리 후회해보아도 소용없고 당사자를 만나 사죄를 구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야 업장이 줄어들고 번뇌가 사라져서 정진할 수 있게 된다.</p>
<p>  </p>
<p>② 권청 (勸請)</p>
<p>  이것은 불보살님께 나를 비롯한 모든 중생을 구제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가족만을 위한 원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4무량심(無量心)을 가져 진심으로 권청하는 일도 정진의 하나이다.</p>
<p>  </p>
<p>③ 수희 (隨喜)</p>
<p>  이 말은 함께 기뻐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일에 기쁜일이 있으면 시기하지 말고 함께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열등감을 느끼기 보다는 자신도 정진하는데 촉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p>
<p> </p>
<p>④ 회향 (廻向)</p>
<p>  회향이라는 말은 우리가 절에서 종종 듣는 용어인데, 스스로 지은 공덕을 다른 일에 돌린다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보리회향과 중생회향이 있다. 우리가 행한 보시, 지계, 인욕, 참회, 권청, 수희한 공덕을 자신의 깨달음에 밑거름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면 보리회향이고, 중생구제를 위해 쓰이도록 하는 것이라면 중생회향이다. 결국 이 둘을 합치면 나도 깨닫고 타인도 깨닫게 되는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이니, 보살도(菩薩道)는 회향과 더불어 조금씩 상승해나가는 것이다.</p>
<p>  </p>
<p>요컨대, 회향이란 내가 보시한 것이 나의 덕분이 아니라 다른 무엇의 덕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수많은 불사를 행한 중국의 양무제는 회향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에 집착하고 자랑스러워했고, 그래서 달마대사로부터 멸시를 당한 것이다. 회향이란 꼭 부처님 앞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 여신도님들도 시어른께 용돈 몇 푼 주고는 지나치게 생색을 내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p>
<p> </p>
<p> 따라서 참회, 권청, 수희, 회향을 잘하면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들이 풀려나가면서 자연히 정정진(正精進)할 수 있게되며, 이로부터 바라밀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꼭 유의해야 할 것은 정진노력의 댓가가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되며, 사회전체에 환원(=보시)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가끔 볼 수 있는 무료의료봉사라든가 법률상담 등이나 다양한 형태의 자원봉사는 정진했던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보람의 열매들일 것이다.</p>
<p>
</p><hr /><strong><font color="#013add">5. 선정(禪定) 바라밀</font></strong>
<p><strong>  (1) 선정(禪定)의 의미</strong></p>
<p>  선정의 선(禪)은 범어댜나(dhyana)를 음역하여 선나(禪那)로, 이를 다시 줄여서 선(禪)이라 한 것인데, 보일시(示)와 홑단(單)이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다. 즉, 오로지 하나를 보라는 의미이다. 그 뜻은 고요히 생각한다 해서 정려(精慮) 또는 생각으로써 닦는다 하여 사유수(思惟修), 또는 생각을 가라 앉혀 정신을 집중시킨다 해서 정(定)이라 번역하기도 하며, 음과 뜻을 합쳐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정(禪定)이란 좌선, 집중, 삼매, 몰두 등의 뜻이 있고, 한자로는 적정삼매(適定三昧)라고 한다.</p>
<p>  </p>
<p>불교에서 선(禪)이라 하면 문자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곧바로 마음을 가리키고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것’이라 한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경전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글이 미치지 못하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깨달음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체험으로써 터득되는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란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 진정한 의미는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결코 문자를 완전히 부정하는 게 아니다. </p>
<p> </p>
<p>직지인심(直旨人心)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는 의미인데, 선(禪)이란 또렷이 밝은 우리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 마음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 행위자이다. 마음이 주체가 되어야지 대상이 된다면 벌써 그 본성을 잃은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 성불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본래의 성품은 밝음과 어둠이 없으며 대소가 없고 안팎이 없고 생멸(生滅)이 없다. 이는 바로 법신의 부처님과 하나되는 것이므로 성불되었다는 것이다.</p>
<p>  </p>
<p>요컨대, 선(禪)이란 교리로써 표현될 수 없는 체험의 세계요, 문자에 한정 구속되지도 않고, 사람의 본심을 바로 가리키는 일이며 본심, 즉 본성을 보아 성불을 이루는 길인 것이다. 이러한 선(禪)의 수<br />련을 통해 자타가 불이(不二)함을 깨닫게 되고 자기만 옳다는 소아적(小我的) 생각에서 벗어나 큰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p>
<p>  </p>
<p>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부터 통일신라 말기에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오늘날 서양인들에게도 선(禪)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일본어 발음의 젠(Zen)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p>
<p> </p>
<p> 이교도의 명상법인 요가(瑤加)와 불교의 선(禪)은 엄연히 다르다. 이교도의 선(禪)이나 요가는 수행자가 선(禪)을 통해 범신(梵神)의 본성과 일체화되어 천상에 태어나기 위함이다. 반면에 불교의 선(禪)은 순수의식을 집중시켜 실상을 자각하고 반야(般若)를 얻어 해탈을 이루는데 있다. 석존은 설산에서 내려와 몸을 깨끗이 하시고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신 후에 우유죽 공양을 드시고 보리수 아래에 바른 자세로 앉아 심심삼매에 드셨다. 그리하여 우주와 생명의 실상을 깨치신 것이다. 그래서 선정은 삼매(三昧)와 같은 말인 것이다.</p>
<p><strong> </strong></p>
<p><strong> (2) 입정(入定) 수련</strong></p>
<p>  대개 선정이나 좌선이라고 하면 정신통일만을 연상하지만 정신 집중도 선정에 속한다. 즉, 정신을 한 곳으로 몰두하여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집중된 상태를 말한다. 한마음으로 정성을 모으는 일처럼 우리는 정신을 집중시키지 않고서는 무슨 일이든지 성취하기가 힘든 법이다. 일마다 번뇌망상과 잠이라는 마장이 끼여 선정에 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화두나 염불로 8만 4천가지 마장과 갖가지 유혹을 물리치고 고요한 마음에 머물게 되면 선정에 들게 된다.</p>
<p>  </p>
<p>수련 시 바로 집중되고 선정에 드는 사람은 진리대로 된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진리는 알기만 해서는 안되고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데, 중생들은 다겁의 습관이 남아있어서 혹 진리를 알더라도 실천이 쉽지 않다. 그래서 아는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선정에 드는 수련을 해야 한다. 수련할 때 번뇌망상과 잠에 휩쓸리는 사람은 아직 중생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선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기의 의지대로 오직 하나에 몰두해 있는 힘이 곧 진리를 실천하는 힘이 되는 것이므로, 불자라면 당연히 선정에 들어가는 수련을 생활화해야 된다.</p>
<p> </p>
<p> 입정(入定)을 위한 것으로는 참선삼매, 염불삼매 등이 있는데, 참선삼매는 주로 스님들이 하시는 입정법이고, 염불삼매는 일반 불자들의 입정법이다. 흔히 선정은 우리에게 네 가지의 기쁨을 준다고 「잡아함경」에 나와 있다. 즉, 초선(初禪)으로 악이 사라지고, 이선(二禪)으로 선정의 기쁨을 맛보게 되며, 삼선(三禪)으로 무소유의 경지에 스스로 머물게 되며, 사선(四禪)은 무심을 얻게 한다.</p>
<p>  </p>
<p><strong>卍. 참선삼매 (參禪三昧)</strong></p>
<p>  ① 좌선</p>
<p>  참선은 몸과 마음을 고르는 수행법으로서, 일반적으로 좌선(坐禪)을 많이 택하여 수행한다. 좌선은 먼저 자세를 잘 가다듬어야 한다. 정좌하되, 가부좌를 틀거나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밑에 완전히 놓는다. 팔목은 허벅지와 옆구리 사이에 살포시 올려 놓되,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린 다음 엄지끼리 붙힌다. 그 다음 몸을 좌우로 살짝 움직여 고정시키고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당겨 머리를 수직으로 한다. 눈은 반안반개(半眼半開)하여 시선은 자기 앞 1.5m 정도의 전방에 자연스럽게 던져놓고 물체를 보지는 말고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혀는 입천장에 갖다 붙이고 침이 입안에 고이면 모았다가 삼킨다.</p>
<p>  </p>
<p>다음으로는 호흡을 고르게 해야 한다. 호흡에는 들숨과 날숨이 있는데, 입은 다물고 코로 숨을 길게 천천히 들이 쉬어 배꼽 아래 3치(4.5cm) 지점인 단전까지 숨을 몰로 내려와 아랫배가 약간 볼록한 느낌이 들도록 들이 쉰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어 탁기를 내보낸다. 숨쉬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얼마동안 들이쉬고 내쉬고 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다. 다만 자신의 평상시 호흡보다 약간 느리게 하되, 지나치게 길게 해서 호흡이 힘들게 되어서는 역효과이니 주의한다. </p>
<p> </p>
<p>즉, 자연적인 호흡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자세가 바르면 호흡은 느려지게 되어있으니 조급해 말아야 한다. 이러한 호흡을 단전호흡이라 한다. 속가에서는 이 호흡을 발전시켜 달리 응용도 하는 모양이나 불가에서는 일단 여기까지 순조롭게 되면 된다. 그 동안 가슴까지만 내려오는 짧은 호흡으로만 살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제대로 쉽지 않다. 그러나 조금만 연습하면 단전호흡이 익숙해지고, 신경쓰지 않아도 저절로 되면 다음으로 관(觀)을 해야 한다.</p>
<p> </p>
<p> 관(觀)은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아무 생각없이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을 보는 수식관(數息觀)이 있다. 또는 들어오는 숨을 쉬며 하나... 하고 헤아리고 나가는 숨을 쉬며 둘... 하고 계속 반복하는 방법도 있다. 두 번째로 백골관(白骨觀)이라는 것인데, 사람의 외형을 벗겨내면 남는 것은 겨우 백골이므로, 이것을 보는 연습을 통해 사람의 근원을 관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재로 여시관(如是觀)이 있다. 이는 부처님의 진리를 관하는 방법으로, 공(空)이나 불성(佛性), 사상(四相) 등을 하나 정해서 명상을 한다. </p>
<p>  </p>
<p>이처럼 관법(觀法)은 부처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에서 수련해야 불법(佛法)에 어긋나지 않는 결론을 얻게 되는 법이다. 관을 잘하여 부처님의 눈과 같아지면 자연히 깨달음이 온다. 그러므로 초심자는 수식관이나 화두참구법으로 접근하는 편이 좋다.</p>
<p>  </p>
<p>② 화두참구법 (話頭參究法)</p>
<p>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취하는 수행법이다. 화두(話頭)란 ‘말머리’라는 의미로 화(話)는 ‘말’이며, 두(頭)는 ‘공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즉, 우주의 이치를 가르치는 법의 말이다. 달리 공안(公案)이라고 하는데, 이는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공문서라는 뜻이다.</p>
<p>  </p>
<p>말하자면 우리에게 던져진 풀어야 될 문제이며 삶의 의문이 바로 화두이다. 화두는 1,700여 가지가 있는데, 참선은 이 문제 가운데 하나를 취하여 좌정해서 명상속에서 푸는 것이다. 예컨대 제 1화두는 ‘이뭣고?’(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인데, 부처님이 명상하셨던 것이다. 화두는 다른 관법과는 달라서 마음을 헤아려 답을 찾는게 아니다. </p>
<p> </p>
<p>그렇다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래서 화두를 참구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혼침(婚沈)과 망상이다. 혼침은 산란하고 잠 오는 혼몽한 경계이다. 그래서 앉아있기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망상과 혼침이 일어나면 수없이 오직 화두만 잡으려고 애써야 하며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성성(聖性)하고 깨끗한 상태로 무심속에 얻은 고요의 극치인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p>
<p> </p>
<p>오직 의심 하나만 갖고 답이 절로 나올 때까지 정진해서 이미 자신속에 있는 답을 발견하는 것이다. 막연히 기다리면 안되고 계속해서 자신의 본 성품인 자성(自性)에게 질문을 던져서 본성의 문이 열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날 문이 열리게 되어있는 것이 참선이다.</p>
<p>  </p>
<p>③ 깨달음의 세 가지 조건</p>
<p>  참선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래서 선정(禪定)을 이루는 데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p>
<p>  첫째 조건은 신심(信心)이다. 역대로 신심을 저버리고 불타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없다. 나도 불성을 지닌 존재로서 깨우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진 신심(信心)을 지니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불성이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부처님을 향한 믿음이기도 하다. 부처님도 이 길을 걸어서 인생의 의문을 해결했고 역대 선사들도 이 길을 걸어서 평안을 얻은 것이다. 그 분들이 우매해서 출가하신 게 아니다. </p>
<p> </p>
<p>오직 참 진리만이 영원하다는 믿음을 굳게 갖고 계셨던 때문이다. 이러한 신심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에는 초발심이 발할 때 바로 정각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p>
<p>  </p>
<p>그런데 신심은 한동안 일어나다가도 어느 순간 수그러들기도 한다. 그러다 또 재발심이 일어난다. 일생을 수행하다보면 재발심의 순간이 있다. 마치 바람이 강하게 불수록 나무뿌리가 더욱 단단히 박히는 이치처럼, 재발심이 있어야만 다시는 후퇴되지 않는 신심을 갖게 된다. 종국에는 진리에 눈을 떠야 신심이 퇴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p>
<p>  </p>
<p>둘째 조건은 인생에 대한 의심을 가지는 것이다. 의심이 없으면 진리에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의 연을 만나기 어렵다. 우리는 이처럼 철저한 의심을 통해 우주의 실상을 보게 되며, 의심이 크면 클수록 크게 깨닫게 된다.</p>
<p>  </p>
<p>화두참구에 있어서 의심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의심에 의해 지속적인 지구력을 갖게 되고 끝내는 답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화두는 의심을 일으켜서 망상과 잠을 극복하고 고요하고 깊은 정신 세계에 들어가도록 한다. 이때에도 의심을 놓쳐서는 안되며 마침내 지혜가 발현될 것이다. 그래서 화두 그 자체를 선(禪)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화두삼매에 들어서 지금까지 밖으로만 치닫던 마음을 안으로 모으게 되고, 종국에는 실상(實相)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p>
<p>  </p>
<p>셋째 조건은 용맹심이다. 오직 정진하겠다는 대용맹심을 가지는 것이다. 용맹심은 백수의 왕인 사자처럼 돌진력과 지구력을 길러준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삶의 문제를 푸는 것은 대용맹심이 아니면 이루기 어렵다.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라면 사자와 같은 기상이 있어야 한다. 일찍이 효봉스님은 흙돌로 문을 봉하고 1년 6개월을 답답한 토굴속에서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다 용맹심에 의한 것이다. </p>
<p>  </p>
<p><strong>卍. 염불삼매 (念佛三昧)</strong></p>
<p>  염불삼매는 주로 재가불자나 기도수행하는 스님들이 행하는 선(禪) 수련법으로서, 정신을 몰두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간절히 염(念)하면서 삼매경에 들어가는 방법이 참선삼매와 다르다. 그러나 얻어지는 효과는 참선삼매와 동일하다. </p>
<p> </p>
<p> 염불이란 불보살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염불뿐만 아니라 경을 보는 간경, 불경을 읽는 독경도 포함된다.</p>
<p>  </p>
<p>염불은 참선과 달라서 언제 어디든지 자세와 관계없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염불할 시간과 대상을 정한다. 세계적으로 80%정도는 관음신행을 하니 아직 정하지 않은 사람은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간이 정해졌으면 간단한 경을 한가지 읽는 것이 좋으니,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등 짧은 경을 읽고 난 후 108염주 등을 돌리면서 염불하도록 한다. </p>
<p> </p>
<p>그런데 염불은 반드시 마음으로 불러야 된다. 그래서 염불은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가능한 작은 소리를 내어 송불(誦佛)도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염불하다가 이상하게 집중이 잘되는 시기가 오면 용맹정진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무슨 공부든지 꾸준히 해야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염불도 마찬가지다. 너무 용을 써서 기운이 빠져 건강을 해치는 수도 생기니 조심하되, 일상중에 참선이든 염불이든 수행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p>
<p> </p>
<p>  요컨대, 우리는 육바라밀의 하나인 선정(禪定)을 통해서 삿되고망령된 마음이나 분별에서 나온 모든 번뇌를 쉬어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킴으로써, 마음이 번뇌 망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또렷하게 안정된 가운데서 비로소 지혜(智慧)가 생겨나게 됨이니 오랜 수행과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번 선정(禪定)에 들면 한번 부처님 나라에 드는 것이요, 하루 선정에 들면 하루 부처님 나라에 드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가 염불기도하는 마음으로,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주와 합일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br /></p><hr /><strong><font color="#013add">6. 지혜(智慧) 바라밀</font></strong>
<p>  육바라밀의 지혜(智慧)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통상 반야(般若)라고도 하는 것인데, 반야는 인도어의 프라즈냐아(prajna)의 음사(音寫)이며, 그 의미는 지혜(智慧)이다. 지(智) 또는 혜(慧)만으로도 번역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을 보고 그 성품이 공(空)함을 비추어 아는 능력이다. 즉, 일을 잘 살피어 잘못되어지는 일이 없이 실천하도록 하는 작용이다.</p>
<p>  </p>
<p>우리는 지혜가 있음으로써 올바르게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등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지혜롭지 못한 보시는 그릇되는 수가 있고, 지혜롭지 못한 지계는 하나를 지키려다 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우(愚)를 범할 수 있으며 지혜로운 인욕이랴말로 자연스럽고 지혜롭지 못한 정진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며, 지혜로운 선정만이 항마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혜(智慧)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주는 요소이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자만이 다른 바라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p>
<p>  </p>
<p>부처님은 인간이 보이지 않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지하기만 하여 나약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우리 스스로 갖추고 있는 위한 능력을 개발하고 창조하는 지혜를 얻어서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p>
<p>  </p>
<p>그런데 이러한 지혜를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45년동안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사실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기 위한 것이므로, 우리는 부처님께서 몸소 깨달으신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지혜(智慧)를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이보다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남겨주시어, 불교에 입문한자가 대각(大覺)을 성취할 때까지 일생을 수행하며 공부하도록 하셨다.</p>
<p>  </p>
<p>육바라밀을 삼학에 견주어본다면, 사실 우리는 지계(持戒) 바라밀에서 계(戒)에 관한 내용을, 선정(禪定) 바라밀에서 정(定)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배운 것이다. 세 번째 혜(慧)는 육바라밀의 지혜(智慧)와 비슷한 성질의 것으로서, 계(戒)와 정(定)이 잘 이루어지면 혜(慧)는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p>
<p> </p>
<p>그래서 육바라밀의 지계(持戒)와 선정(禪定)을 통해 지혜(智慧)를 얻는데 도움받을 수 있다. 즉, 육바라밀의 구성요소들은 서로 보완관계를 가지면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바라밀도 다른 바라밀들을 끊임없이 실천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智慧)는 결코 이기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은 불교의 이타(利他)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비이며 수승한 지혜인 것이다.</p>
<p>  </p>
<p>그리고 우리가 이미 앞에서 배운 팔정도(八正道)도 바로 지혜를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戒)에 속하고, 정념(正念), 정정(正定)은 정(定)에 속하며,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은 혜(慧)에 속한다. 또한 혜(慧)는 계(戒)와 정(定)을 올바로 행하는데 필요한 것이니, 결국 혜(慧)가 팔정도를 총괄하는 격이 되어 혜(慧)와 도(道)는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혜(智慧)를 얻는 길이요 방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삼학 또는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반야(般若)를 얻게 된다.</p>
<p>  </p>
<p>반야(般若)는 마음을 비움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무분별의 지혜이며, 공(空)한 지혜이고, 나아가서는 공(空)에 대한 집착마저도 초월한 반야일심(般若一心)의 진여(眞如)함에 이르는 궁극의 지혜이다. 그래서 삼학과 육바라밀의 궁극적인 목표도 다름 아닌 반야(般若)를 얻기 위한 실천인 것이다.</p>
<p>  </p>
<p>그런데 지혜를 터득하여 모든 것이 무상이요 공(空)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자문해 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진정한 해탈을 얻은 것이라고말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산다는 것은 인연 맺는 것이다. </p>
<p> </p>
<p>좋은 인연이 맺어지면 다행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참고 정진해서 이를 잘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지혜롭지 못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되는 법이다. 반야선(般若船)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지혜(智慧)의 배이다. 우리도 지혜(智慧)를 잘 쓰다보면 저도 모르게 반야선을 타고 고통의 바다를 훌쩍 건너게 될 것이다.<br /></p>]]></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un, 16 Mar 2008 12:28:29 +0900</dc:date>
	</item>
	<item>
	<title>불교탐구 - 제3부 경전연구- 8장 불전의 성립과 체계</title>
	<link>https://bujeok.or.kr/bbs/board.php?bo_table=appendix&amp;wr_id=7</link>
	<description><![CDATA[<p>제 3 부 경전연구(經典硏究)</p>
<p><br /><font color="#013add"><strong>제 8 장 불전의 성립과 체계</strong></font></p>
<p>  석존이  득도하시어 45년간 교법을 설파하신 것을 후대에 엮어 세상에 내놓은 불교의 경전들은 그 종류와 분량면에 있어 사뭇 방대하다. 그래서 초심자이건 상당한 수준에 있는 불자이건 불경의 종류나 구성, 내용에 대한 대강의 지식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불교 경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8장과 9장을 마련했다.</p>
<p> </p>
<p><strong>1. 성전 (聖典)</strong></p>
<p>  (1) 성전과 경전</p>
<p>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말 중에는 그 뜻이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뜻으로 혼동해서 사용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불교성전(佛敎聖典)과 불교경전(佛敎經典)의 경우도 그 중의 한 예라고 할 수가 있으니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양자가 같은 뜻으로 무심히 사용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p>
<p>  </p>
<p>불교의 성전과 경전을 엄밀하게 구별하자면, 경전은 성전의 일부분으로써 교조(敎祖)인 석존(釋尊)의 교설(敎說)을 문자화한 것으로 경문(經文)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전은 경전 이외에도 후대 불교도의 저술, 불교의 역사.전기(傳記), 기타 불교에 관계있는 일체의 저술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것이어서, 성전은 곧 불교연구에 관한 자료 문헌의 전부를 망라한 것이다.</p>
<p>  </p>
<p>따라서 성전은 인도, 중국, 한국 등 불교가 전파된 여러 나라에 걸쳐서 2,600여년의 역사를 통하여 점차 증가되어 그 수량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경전은 바로 이러한 성전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며 불교사상의 원류(源流)는 바로 이 경전에 있는 것이다. </p>
<p>  </p>
<p>(2) 삼장 (三藏)</p>
<p>  삼장이라는 것은 인도에서 만든 불교 성전의 전부를 개괄한 명칭이다. 범어의 pitaka 라는 것은 군(群), 부류 또는 포함의 뜻으로 장(藏)이라고 번역했는데, 불교도들이 그 성전을 편찬하여 이것을 세 종류로 분류했기 때문에, 삼장(Tri-pitaka)이라 하는 것이며, 삼장은 주로 인도에서 불교성전을 개괄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p>
<p>  이러한 삼장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br />  ① 경장(經藏) : 부처님의 교설을 문장화한 것.<br />  ② 율장(律藏) :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불제자들이 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 및 작법 등.<br />  ③ 논장(論藏) : 경이나 론에 대한 주석서의 종류.</p>
<p>  </p>
<p>경장이란 석존의 교설을 기술한 문장의 전부를 포함한 것으로 법화경, 화엄경 등과 같이 경(經)이 붙는 것은 전부 이에 해당된다. 이 책의 중심은 바로 이 경장이 되는데, 그 분량은 한역(漢<br />譯) 현존본으로 약 1,500부(部)에 달한다. 경(經)을 가리키는 범어 sutra는 본래 고대 인도에 있어서 종교, 학술, 문학, 법률 등 각 부문에서 권위 있는 책이란 뜻이었는데, 제자들이 석존의 교설을 편찬한 후 불교의 가장 권위있는 책이란 뜻에서 sutra라 했고, 중국에서 한역할 때에 이를 경(經)이라고 번역한 것이다.</p>
<p>  </p>
<p>율장은 불교도들이 지켜야 할 실제 생활상의 규정과 작법(作法), 그리고 교단의 규약 등을 집성한 것으로 소위 5계, 10계, 250계 등의 계법(戒法) 또는 계율(戒律)을 말한다. 이것은 석존 생존시에 5계니 10계니 또는 250계니 하여 계법으로 정리된 것은 아니고, 다만 어떠한 사례(事例)가 생기면 그때 그때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런 것은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왜 안 되는가, 어떤 이유로 지켜야 하는가를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것을 후세에 승가의 본분을 지킬 수 있게끔, 그리고 교단의 기강을 세우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끔 정리하여 집성한 것이다. </p>
<p> </p>
<p>그러나 이 율장은 어디까지나 석존이 친히 정했다는 형식에 의해 기술되었고, 내용은 조문(條文)과 그 조문의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량은 한역에 있어서 경장의 5분의 2정도이다. 삼장에서 경(經)과 율(律), 두장은 석존의 교설을 기술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저술의 체제상과 전통적 신념에 의한 것이어서 석존의 교설을 근본으로 후세의 개인 또는 단체가 계획적 또는 비계획적으로 석존의 교설을 기술하는 형식으로 편집한 문서가 경전이요 율전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p>
<p>  </p>
<p>삼장 외에 인도에는 잡장(雜藏)과 주장(呪藏), 다라니류를 모은 것으로 이것도 경장에 포함시킬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인도의 불교성전은 경, 율, 논의 삼장에 개괄할 수 있다고 보아도 좋을 뿐만 아니라 삼장은 모두 성전에 속하므로 성전으로 통용할 수도 있다.</p>
<p> </p>
<p> (3) 기타 성전</p>
<p>  인도 이외의 여러나라에서 저작된 성전은 이를 삼장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분량은 삼장의 몇 배나 되고, 성전으로서의 형식상 지위는 삼장에 뒤지지만 각 나라와 시대에 따른 불교사상이 발달, 종파의 교의(敎義) 또는 불교의 역사 등을 연구하는데는 삼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삼장 외의 성전을 대략 다음과 같이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p>
<p>  ① 삼장의 주소류 (註疏類)</p>
<p>  경이나 율 또는 논에 대한 주석서로서 예컨대 천태대사가 지은 「법화경의소」가 법화경에 대한 주소서(註疏書)이고, 원효대사가 지은 「대승기신론소」가 대승기신론에 대한 주소서(註疏書)인 것이다.</p>
<p>  </p>
<p>② 논술해명서류 (論述解明書類)</p>
<p>  불교에 관한 어떤 견해를 논술하거나 어떤 종파의 교의 등을 해명하는 종류로서, 예컨대 원효대사의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과 같이 그의 통불교(通佛敎) 사상을 논술한 것이라던가, 고려 체관법사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義)」와 같이 천태종의 교의를 천명한 것 등이 이에 해당된다.</p>
<p> </p>
<p>③ 수필어록류 (隨筆語錄類)<br />  고승이나 불교학자들의 불교를 소재로 한 수필이나 어록으로서, 예컨대 고려 태고국사(太古國師)의 「태고집」이라던가, 중국 송나라 원오(圓悟) 극근(克勤)의 「벽암록(碧岩錄)」등이 이에 해당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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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④ 사전기록류 (史傳記錄類)</p>
<p>  불교의 역사, 고승들의 전기 또는 대장경 목록 등의 책으로서, 예컨대 고려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당 현장의 「대상서역기」 또는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과 같은 대장경 목록 등이 이에 해당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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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 대장경 (大藏經)</p>
<p>  인도의 불교도들은 그들의 성전인 삼장에 대하여는 조금도 서지학적(書誌學的)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목록과 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그러한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는바,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br />  ① 번역의 순서와 차례를 밝히기 위한 역경목록(譯經目錄)<br />  ② 번역된 삼장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위한 중경목록(衆經目錄)</p>
<p>  </p>
<p>이중에서 후자인 중경목록(衆經目錄)은 이를 삼장목록, 내전목록(內典目錄) 또는 석교목록(釋敎目錄)이라고도 한다. 당말 이후에 번역된 삼장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위한 중경목록(衆經目錄)이라고 부르던 것을 석교목록(釋敎目錄) 또는 대장경목록(大藏經目錄)이라고 하여 이로부터 대장경이란 명칭이 불교성전총서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팔만대장경도 이 중의 하나이다.</p>
<p>  </p>
<p>우리가 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번역된 삼장이 주가 되지만, 그것만을 편집하여 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번역된 삼장과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중국이나 우리나라, 또는 일본등의 불교국가에서 저술된 성전도 포함해서 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오늘날 대장경을 원어로 표기할 때에 삼장을 가리키는 Tri-pitaka라고 표기하고 이것이 동시에 세계적인 공통어가 되어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경우 Tri-pitaka는 인도의 삼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p>
<p>  </p>
<p>처음 중국에서 대장경 목록을 만들게 된 취지는 많은 종류와 분량의 성전을 결집하고자 한 것뿐만 아니라, 소재가 불분명한 불교성전도 정리하고 편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목록의 제작은 지역간의 교통이 불편하고 정보교환의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인쇄술도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개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대사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목록의 제작은 대부분 칙명에 의하여 국가의 뒷받침을 얻어 이루어졌다.</p>
<p>  </p>
<p>인도에서 전래되어 번역된 삼장과 더불어 대장경 목록안에 편입시키기 위해 중국에서 저술된 불서(佛書)는 내용이 지극히 훌륭한 것이어야 선택되었다. 대장경은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사본(寫本)으로 전하여 갖거나 또는 석벽(石壁)에 조각하여 후세에 전하기도 했으나, 당나라 말기로부터 대장경판의 인가의 대사업이 시작되어 그로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15～16회, 우리나라에서 3회, 일본에서 6회의 대장경 출판이 있었다. </p>
<p> </p>
<p>이러한 여러 대장경 중에서 교정이 정밀하고, 판목(板木)과 문자가 가장 호화로운 것은 고려대장경이니, 그래서 고려대장경은 모든 대장경의 기본이 되고 있다. 현재 국보 32호,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 팔만대장경의 판수는 모두 81,258장이다. 이것을 책으로 엮으면 6,815권이나 되며, 경의 종류도 1,521종에 이르며, 첫 번째 경의 첫장에는 「대반야경」이 수록되어 있다. </p>
<p>
</p><hr /><strong><font color="#000000">2. 불교경전의 성립</font></strong>
<p>  (1) 불설편찬의 의의</p>
<p>  석존께서 쿠시나가라 숲속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시고 입멸(入滅)하시려 할때 아난이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이렇게도 빨리 열반에 드시려 합니까. 지금까지 세존만을 의지해서 살아 왔는데, 앞으로 누구를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울먹이자, 석존께서는 “나의 입멸을 슬퍼하지 말라. 무릇 육신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니라. 그러나 내 비록 육신은 멸한다고 하더라도 내 법신(法身)은 멸하지 않으니, 법신이란 내가 일대간(一代間)에 설한 법(法)과 율(律)중에 빛나고 있는 무상의 정각(正覺) 바로 그것이니라. </p>
<p> </p>
<p>그러므로 내가 입멸한 후에 너희들은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아 살아가도록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석존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한결같이 세존과 같이 위대한 인격은 결코 그대로 멸하는 것이 아니고, 법신이 인생의 무명을 밝혀 주는 진리의 등불이라고 믿고, 설하신 법과 율을 잘 받들어 그 속에서 불타의 불멸의 빛을 우러러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다.</p>
<p>  </p>
<p>그런데 쿠시나가라에서 제자들이 비탄에 빠져 있을 때, 교단 제일의 장로 가섭이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른 지방을 교화하면서 순회중이던 어느 날 석존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쿠시나가라로 급히 돌아가던 중, 길에서 만난 바라문으로부터 석존께서 일주일전에 입멸하셨다는 말을 듣자, 가섭을 비롯하여 제자들 전원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비탄에 빠졌는데, 수발타라는 늦게 출가한 제자가 앞에 나오더니 석존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이래서는 안 된다, 저래서도 안된다고 우리들을 속박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을 터이니 얼마나 좋으냐고 비통해하지 말라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p>
<p> </p>
<p>이런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한 가섭은 교단이 건전하게 통일된줄로만 알았는데 저런 자를 보니 그대로 두었다가는 머지않아 정법(正法), 정율(正律)은 자취를 감추고 점차 사곡(邪曲)의 옆길로 떨어져 비법(非法), 비율(非律)이 유행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정법, 정율을 제정하여 확고한 불설(佛說)의 통일을 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가섭이 쿠시나가라에 도착하자마자 비구들을 지휘하여 다비(茶毘)를 끝내고는 중의(衆議)를 물어 불설(佛說)의 편찬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임을 주장하였고, 석존의 입멸을 지켜보았던 다른 제자들도 그것을 공감하고 있던 터라서 이 작업은 급속히 진행되었다.</p>
<p>  </p>
<p>석존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성도후 입멸하실 때까지의 45년간을 줄곧 설교를 통한 교화생활로 일관하셨다. 그런데 석존의 설법내용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하여 설법을 듣는 자의 근기(根機)에 따라 약간 다른 경우가 있고, 또한 혼자 말씀하신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듣는 자와 문답을 주고받는 설법 형식을 취하셨기 때문에 때에 따라 다른 경우도 있었다. 또한 설법을 누군가가 문자화했거나 정리해 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듣는 이에 따라서 이견(異見)이 있을 수도 있었다. 석존의 설법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일정한 조직을 세우고, 순서에 다라 설한 것이 아니며 서책(書冊)의 형태로 제자들 앞에 제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의존할 법과 율을 정리하고 편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다.</p>
<p>  </p>
<p>그리하여 불멸(佛滅) 직후 제자들이 제일 먼저 착수했던 것이 불설(佛說)의 편찬작업이었던 것이니 이것을 ‘결집(結集)’이라고 하며 불교의 경전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결집이 몇차례 행해졌으므로 불멸직후의 결집을 제 1회 결집이라고 한다.</p>
<p> </p>
<p> (2) 제 1회 결집</p>
<p>  제 1회 결집은 불멸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거행되었다. 교단 제일의 장로인 마하가섭을 상수(上首)로 하고 500명의 장로비구가 모여 편찬회의를 했는데, 먼저 우바리가 율을 송(誦)하고 다음에 아난이 법을 송(誦)함에 회중(會衆)이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협의하여 불설(佛說)이라고 승인한 것이다.</p>
<p>  </p>
<p>이 제 1회 결집은 달리 「왕사성결집」 또는 「오백집법(五百集法)」이라고도 하는데, 7개월이 소요된 이 제1회 결집에서 회중은 석존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누구의 앞에서, 어떠한 설법<br />을 하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어떠한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 사정을 상의하여 이것을 석존이 설법한 형식으로 전송했기 때문에 경전에는 “이와 같이 나는 듣사오니, 어느 때, 부처님이 어느 곳에서, 누구와 몇 사람 앞에서” 운운하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되고, 다음에는 석존의 설법 말씀을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환희(歡喜), 예배(禮拜)하고 돌아갔다고 하는 문구로서 마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p>
<p>  </p>
<p>이렇게 해서 성립된 불교경전은 제1회는 물론이고 다음에 소개할 제2회 결집때에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회의에 모인 제자들이 그들이 석존의 재세(在世)중에 직접 들었던 것을 기억나는 대로 암송하여 이것을 일정한 공인의 형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곧 편찬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경전을 그들은 각각 암송했다가 제자에서 그 다음 제자로 구전(口傳)하는 이야기 경전이었던 것이다.</p>
<p>  </p>
<p>(3) 제 2회 결집</p>
<p>  제 2회 결집은 불멸 후 약 100년경에 행하여졌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당시 불교가 성행하던 베살리성내의 비구들이 계율에 대한 관념이 매우 관용적이었으므로 그것을 목도한 계율엄격주의자인 야사(Yasa)가 그 폐해를 교정코자 각처에 사람을 보내어 여러 장로비구들에게 불타의 유계(遺戒)를 바로 잡기 위한 회합을 해달라고 청한 데에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베살리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700여명의 비구가 결집을 하게된다.</p>
<p>  </p>
<p>이 제 2회 결집은 「베살리성 결집」,「칠백집법(七百集法)」이라고도 하는데 8개월이 소요되었다. 결집의 결과는 야사의 견해가 옳다는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진보적인 비구들은 그들 나름대로 별도로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수의 비구들을 불러모아 따로 결집을 행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제 2회 결집은 교단내의 보수적인 그룹과 진보적인 그룹의 대립이 처음 표면화되었으니. 이것이 인도불교의 이른바 근본분열(根本分裂)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p>
<p>  </p>
<p>(4) 제 3회 결집</p>
<p>  제 3회 결집은 제 2회 결집 후 다시 100여년이 지난 아쇼카왕때에 행하여졌다. 불교를 독신하게된 아쇼카왕은 사탑(寺塔)을 많이 세우고, 매우 많은 수의 승려들을 공양함으로 승려의 수가 증가하여 수도 화씨성(華氏城, 현재의 Patna)의 계원사(鷄園寺)에는 6만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한다.</p>
<p>  </p>
<p>그런데 외도(外道)들이 승려로 가장하고 승려들 사이에 끼어 들어 교단의 화합을 깨뜨리므로, 왕은 그들을 정리하기 위하여 당시 고승인 못갈리풋타, 티싸에게 교설(敎說)의 확정과 승중(僧衆)의 화합을 도모하도록 위촉했다. 티싸는 왕명을 받들어 중승(衆僧)중 1000명을 선출하고 스스로 상수가 되어 결집을 행했는데, 아쇼카왕 즉위 18년에 시작하여 9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제 3회 결집은 「화씨성결집」 또는 「일천집법(一千集法)」이라고도 한다.</p>
<p>  </p>
<p>그런데 그때까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약 200년 동안 구전(口傳)되어 오던 경전은 제 3회 결집 후에 비로소 문자화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1회와 2회 결집때에는 경, 율 2장(藏)만 결집되었지만 제 3회 결집에서는 경, 율 외에는 논장(論藏)도 결집되었다.</p>
<p> </p>
<p>(5) 제 4회 결집</p>
<p>  제 4회 결집은 서력 2세기 전반 대월지국 카니슈카왕의 뒷받침으로 이루어졌다. 역시 불교를 독신하던 왕은 매일 스님을 한 사람씩을 초청하여 청법(聽法)하기도 하고 스스로 경론(經論)을 열람하기도 했는데, 그 논설이 같지 아니함을 의아하게 생각하여 협존자(脇尊者)에게 문의한 결과, 불교 교단내에 여러 부파가 있고 각 부파의 교의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p>
<p>  </p>
<p>그리하여 각 부파의 이설(異說)을 통일시키고자 협존자와 상의하여 삼장에 능통한 학승(學僧)을 소집하여 그 중에서 학식이 뛰어난 500명을 선출하여 회중(會衆)으로 하고 카슈미르의 환림사(環林寺)에서 결집을 시작했다.</p>
<p>  </p>
<p>이 결집에서는 세우(世友)를 상수로 하고 법구(法救), 묘음(妙音), 각천(覺天) 및 현존자 등의 대아라한이 먼저 경장의 주석인 우파데샤 경전 10만송을 결집한 후, 계속하여 율장의 주석 10만송과 논장의 주석 10만송 등 전(全) 30만송(頌) 600만언(萬言)의 대주석을 만들어 결집을 완료했다.</p>
<p>  </p>
<p>왕은 동판으로 각판(刻版)하여 석함(石函)에 넣고 큰 보탑(寶塔)을 건립하여 그 속에 안치했는데, 이 중 오늘날에는 논장의 주석인 아비다르마비바사만 남아있다. 제 4회 결집은 삼장에 관한 결집이 아니라 그러한 삼장의 주석에 관한 결집이었기에 학자에 따라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불설(佛說)편찬의 범주에서 제외하기도 한다.</p>
<p>  </p>
<p>불멸 직후에 행하여졌던 제 1회 결집에서 성립된 경전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자로써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암송했다가 제자에서 그 다음 제자로 구전하는 이야기 경전이었다. 따라서 그 동안에 고의 또는 무의식적으로 경전의 문구와 형식이 변화했고 불멸 후 200～300년 사이에 두 번의 결집을 행하여 각자가 개별적으로 전하여 오던 불설(佛說)을 일정한 형식으로 정리하긴 했으나, 벌써 존의 말씀 그대로를 전하는 사람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p>
<p> </p>
<p>이때에 구전이 불확실함을 알고 비로소 문자로 쓴 것이니 여기에 처음으로 문자의 경전 즉 서책으로서의 경문(經文)이 되었으나 이것도 사제(師弟)가 서로 사전(寫傳)하는 사이에 혹은 주석을 가하고, 혹은 요약을 하고, 혹은 윤색(潤色)하여 시대가 지남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게 되어 경전은 점점 원형과 멀어지게 되었으니,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존한 경문의 문장을 석존의 말씀 그대로라고 보기는 곤란하다고 하겠다.</p>
<p>  </p>
<p>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불설(佛說)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당초의 소박했던 원형이 복잡한 형색으로 윤색(潤色)되고 부가되었다는 것뿐이다. 즉 당초의 경(經)과 현존하는 경(經)과는 형식상의 상위(相違)는 있을지언정 그 내용이나 정신의 배반은 없는 것이다.</p>
<p>  </p>
<p>요컨대 경전은 석존의 말씀을 전할 목적으로 성립된 것이지만 연대에 따라서 전연 정반대의 결과를 보게 되고 시대가 지남에 따라 경전은 항상 신형(新形)으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온 것이니 마치 하나의 씨앗에서 싹튼 움이 점점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는 것과 같이 불교 경전은 항상 새로운 발전을 하는 것이다.</p>
<p>  </p>
<p>이런 점에서 볼 때, 불전(佛典)의 성립은 앞에서 언급한 제 1회 결집이나 또는 제 2회, 제 3회 결집시에 있었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불교가 유전(流轉)하여 온 기간 (입멸후～서력 10세기)동안 점진적인 성립의 과정을 밟아 왔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전인 범어경문의 현존한 것을 비교하여 볼 때 동일 경(經)이 시대에 따라서 형식이 다르다는 점이나 또는 원전과 타국어(他國語)로 번역된 경전과를 비교하여 볼 때 양자간의 차이를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증명된다. </p>
<p>
</p><hr /><strong>3. 불교경전의 구성과 조직</strong>
<p>  (1) 12 분교 (分敎)</p>
<p>  불교 경전의 문체와 문장 및 기술의 형식과 내용 등을 다음과같이 12가지로 분류한 것을 12분교라고 하는데 이 12분교는 달리 12부경, 12분성교 또는 12분경이라고도 한다.</p>
<p>  ① 경(經) : 사상적으로 독립된 경문이다. 단순비유가 아니라 불교사상을 표현한다.<br />  ② 고기송(孤起頌) : 게(偈)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운문체의 경문이다.<br />  ③ 중송(重頌) : 운(韻)이 없는 것으로 앞의 산문의 본문을 설명한 부분이다.<br />  ④ 무문자설(舞文字設) : 부처님의 종교적 체험을 감격한 그대로 말하는 부분인데, 질문없이 부처님 스스로 설하시는내용도 이에 포함된다.<br />  ⑤ 미증유법(未曾有法) : 이것은 경(經)가운데 불가사의한 일을말한 부분이다. 즉, 범부(凡夫)는 경험하지 못하는 성자특유한 심경(心境)이나 정신적 기적같은 것을 설한 부<br />분이다.<br /> </p>
<p> ⑥ 여시어(如是語) : 거의 대부분의 경전 첫머리에 보면 부처님 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는 대목라는 말이 기록되어있는데, 이러한 식의 표현은 경문을 석존의 말씀으로 그대로믿고 의심치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br />  ⑦ 인연(因緣) : 경전을 설하게 된 사정과 동기를 서술한 부분이다.<br />  ⑧ 비유(譬喩) : 비유나 우언(寓言)으로 교리를 설명 해석한 부분이다.<br />  ⑨ 본생(本生) :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말한 부분.<br />  ⑩ 수기(受記) : 이는 석존께서 제자들에게 다음 세상에서 성불하리라는 것을 낱낱이 예언하는 경문 부분인데, 보통 문답식으로 의론을 전개하다가 최후에 부처님이 인가(認可)를 주는 형식을 취한다.<br />  ⑪ 논의(論議) : 이는 해석, 논술로써 연구논문 형식의 경문인데부처님이 논의하고 문답하여 온갖법의 내용을 말한 부분이다.<br />  ⑫ 방광(方廣) : 부처님의 설교를 문답형식으로한 논리적, 철학적 깊이를 한층 심화시킨 내용의 성격을 띤 경문이다. </p>
<p>이상, 12분교는 불멸직후 제 1회 결집후 곧바로 분류된 것으로 우리는 이것에 의해 당시 경전의 내용을 아는데 많은 도움을 받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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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 삼분구조 (三分構造)</p>
<p>  중국에서 경전을 서지학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불교학자인 동진(東晋)의 도안(道安)으로부터 한 경전의 조직이 3분(分)으로 되었다는 주장에 많은 학자들이 이의 타당성을 인정하므로 채택된 분류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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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서분(序分)은 경문의 첫머리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하 그 경을 설한 때와 장소, 그리고 대상 등 일체의 서정을 서술한 부분이고, 정종분(正宗分)은 석존의 설법을 서술한 경의 본체이며, 유통분(流通分)은 경문의 마지막에 그 설법을 들은 대중의 감격이라던가 계발의 정도, 그리고 장래에 이 경을 읽는 사람의 이익이나 공덕, 또는 그 경의 이름들을 기록한 부분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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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와 같은 삼분(三分)을 염두에 두고 경전들을 살펴보면 단편의 경전은 정종분(正宗分)만 있는 것도 있고 또 서분과 유통분이 극히 간단한 것도 있다. 그러나 장편의 경전은 반드시 이 삼분을 구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후의 이분이 분명하게 서술되어있음을 알수가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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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서분과 유통분은 석존이 설법한 언사(言辭)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석존의 설법을 들은 사람의 말 또는 쓴 사람의 기술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경전이라는 것은 석존의 설법만을 문자화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중국의 불교학자들은 서분의 기술여하에 의해서 그 경전의 사상이라던가 내용의 심천(深淺)등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여 매우 중요시 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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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정종분도 오로지 석존의 설법만이 아니고 제자들의 문답과 제천(諸天)의 말, 시방세계 보살들의 말 등이 석존의 말씀보다 더 많이 기록된 경전도 적지 않다. 유명한 「화엄경」과 같은 80권이나 되는 장편의 경전도 석존의 말씀은 겨우 2,3장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석존 이외의 사람의 말이 기록되어있고, 그것도 설명이 아니라 시가(詩歌), 운문, 비유, 노설 등 이른바 십이분교의 제형식(諸形式)으로 되어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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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상과 같이 현존의 경전이 석존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고 후세 사람들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성전으로서의 권위에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제자들과 불교도들이 석존의 말씀을 빌어 경전을 지은 동기는 대게 석존의 교리를 실천하여 체득한 종교적인 감격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 있어서는 자기의 말이 아니고 불타의 소리이며,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나타나는 불타의 말씀이라고 하는 신념에 의해서 표현된 것이므로 굳이 변조 날조된 창작이라고 보기 어렵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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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또한 창작의 사정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이 일시에 작성한 것이 아니라 사제(師弟)가 사전(寫傳)하는 사이에 계승적으로 다수(多數)의 사람에 의한 체험과 감격이 집적되어서 차례로 완성되며서 부단히 수정된 것이러서, 그 작품은 곧 다수인이 인정하는 타당성 즉, 여러 사람의 종교적인 영감(靈感)에 접촉된 공통적인 생명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한 불교교리로 인정되는 근본 원리인 사성제와 삼법인 등의 원리는 몇가지 부동의 철칙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작품일지라도 이러한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 그의 근본사상을 불설이라고 하여 신봉하는 것이며, 불어(佛語)라고 하여 제청(諦聽)하는 것이므로 경전의 존엄성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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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와 같은 이유로 경전의 권위는 그대로 지켜져 왔다고 본다. 한편 불전(佛典)은 문학적인 작품이므로 경문의 기사가 객관적인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닌 경우가 있다는 점, 경전중에 지옥, 극락, 기타 오늘날의 자연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는 내용들도 있지만, 이것은 그러한 사실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경전의 종교적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경전은 그 해석여하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이지 결코 시대착오의 미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거기서 경전의 진리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br /></p>]]></description>
	<dc:creator>무진스님 </dc:creator>
		<dc:date>Sun, 16 Mar 2008 14:54:0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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