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탐구 - 제2부 삼보 - 4장 부처님 교설
제 4 장 부처님의 교설
법(法)이라는 말은 의지하는 것, 지탱하는 것 등의 어원적 의미가 있는 말인데, 그 적용범위에 따라 보편진리, 종교적 교리, 법률이나 관습을 일컫는 사회적 규범, 행위, 윤리, 도덕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말이다. 불교에서도 진리나 교리 그밖에 어떤 현상을 성립시키는 이치, 이러한 이치를 지닌 현상 하나하나를 일컬어 법(法)이라고 통칭하는데, 사실 이것들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불교의 창시자인 석존의 45년간의 설법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 내용은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시대의 기본이론을 구성하고 있다. 그 중에는 사성제설, 12연기설, 업력설, 무상론, 무아론 등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특히 인생의 현상과 그 본질에 대한 불교의 총체적인 입장을 밝힌 것으로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따라서 제각기 따로 설명하기보다는 크게 사성제와 삼법인을 줄기로 삼고 다른 것을 연관지어 설명하면 훨씬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사성제와 삼법인 등 여러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함경」의 법(法)에 의거하여 설명하되,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논의된 것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1. 사성제 (四聖諦)
제(諦)라는 것은 진리의 도리, 깨달음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사성제라고 하는 것은 인생에 관한 모든 문제와 그 해결방법에 관한 온전한 네가지 깨달음이다. 즉, 인생의 고통이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며,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치유의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살핀 것으로,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말한다.
이것은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녹야원으로 가셔서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 최초로 설법하신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서, 부처님이 주로 초창기에 설하신 것이다.
사람을 향하여 설법한 내용인 사성제는 자연의 법이 아니라 인생의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어떠하고 또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계신 중요한 법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고제 (苦諦)
卍. 4고 (苦)
인간사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의미다. 본래부터 근본적인 괴로움을 이루고 있는 내용으로서 만물이면 무엇이나 겪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4고(苦)가 있다.
① 생(生)은 태어나는 것인데,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기는 아기대로 고통을 겪는 사실을 설하신 것이다.
② 노(老)는 늙는 것인데, 인간이 늙어 가는 고통도 큰 고통의 하나이다. 늙어서 힘을 못 쓰고 뒷전에 물러나야만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닐수 없다.
③ 병(病)은 지구상의 인간에게 찾아오는 가장 고통스런 대상 중의 하나이며 예고없는 병으로 죽음이 앞당겨 지기도 한다.
④ 죽음(死)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죽음 그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보고싶은 사람이나 애착을 갖고 있는 그 무엇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고통이다. 이러한 생로병사의 고통 외에도 인간에게는 네가지 고통이 더해진다고 설하셨다. 즉, 8고(苦)는 4고(苦)에다 다음 네가지가 더해진다.
卍. 8고 (苦)
⑤ 애별리고 (愛別離苦) : 사랑하는 것과의 이별의 고통
⑥ 원증회고 (怨憎會苦) : 미워하는 것과의 만남의 고통
⑦ 구부득고 (求不得苦) : 구하려는 것을 얻지 못하는 소유욕으로부터의 고통
⑧ 오취온고 (五取蘊苦) :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등의 오온(五蘊)*에서 오는 괴로움, 즉 인간의 제 조건을 취함으로 인한 고통 등이다.
부언하면, 부처님의 고통의 모습을 이렇게 여덟가지로 규정하고, 어떤 인생이든지 이런 고통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첫 번째 깨달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8고(苦)가 있고 이 8고로 인하여 108고가 있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8만 4천 가지의 고뇌가 있다.
이렇듯 삶은 무한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108고와 8만 4천 고뇌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라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염주알이 108개인 것도 우리의 고통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인도인들은 가장 큰 수를 8만이라고 한다. 여기에 4천이 추가된 것은 인간의 고뇌가 그만큼 무한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인생이 고통이라는 자각, 이것만해도 깨달음의 제일보(第一步)를 내딛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았다고 부처가 되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된다.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깨달아가는 길인 것이다. 그 무한한 고통도 그것의 근원을 제거하면 순식간에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이미 정해져있다는 예정론 따위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전생의 업보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열심히 수행하면 업보를 제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순수 우리의 의지에 의하여 지혜롭게 얼마든지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지혜로움이 있어야 한다. 진리를 알면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진리는 물질 그 자체가 이미 공(空)이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면 된다. 우리는 부지런히 일해서 얻은 양식에 감사하고 주어진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운명의 신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 오온이란 다섯가지가 모여 쌓인 것이라는 뜻인데, 물질계와 정신
계 양면에 걸쳐 작용하는 일체의 변함이 있는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을 말한다.
(2) 집제 (集諦) 와 연기법 (緣起法)
부처님은 우리에게 인간세가 본래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고, 이어서 고통의 원인에 대하여 가르쳐주신다. 부처님은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貪瞋癡)라는 세가지 독소(삼독)가 있어서, 이것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잘못되어 여러 가지 고통을 스스로 만들게 된다고 한다. 즉, 모든 고통의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집(集)은 모인다는 뜻으로, 모든 것은 모이고 합해져서 존재를 이루고 있음을 보신 것이다. 이는 곧 불교의 무아(無我)사상이 되는데, 모든 것은 인광에 의하여 흩어지고 모여지고 또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고정된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자연과 더불어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고(苦)가 생기게 된다. 모든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 때문에 항상 집착하고 이것들이 번갈아 닥쳐오므로 고(苦)의 원인이 된다.
집제설은 주로 12연기설로 전개되는데, 12연기설은 번뇌로부터 고(苦)로의 전개과정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슬로우비디오로 현상을 설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연기설은 윤회설과도 관련이 깊은데, 해탈의 경지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보여준다.
卍. 존재의 법칙 12연기
부처님께서 삼천년전에 보리수 아래서 사색과 분석을 통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존재 원리에 대해서 구명(究命)하고 정각(正覺)을 이루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12연기법으로서, 번뇌로부터 고(苦)에 이르는 인과관계를 깨달으신 것이다.
사람의 고통은 어디에서 오며, 생명은 어디에서 오며, 궁극적인 귀착지는 어디가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석존은 일체 사물은 모든 인연이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모두 인과관계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고 인생의 고통, 생명, 운명 등은 모두 자신이 인(因)을 짓고 자신이 과(果)를 받는다고 주장하신 것이다. 따라서 12연기설은 일체의 존재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며,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이론으로서, 근본 因(종자)이 있고 이에 부합하는 緣(조건)이 합해질 때 마침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인연의 만남이 끝나면 결국 일체의 존재는 독립적으로 남아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12연기법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 인연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비롯된다)의 준말이다. 일체의 존재는 명백한 관계성에 의해 생겨나며 없어진다는 불교의 연기론은 부처님이 깨달은 정각인 동시에 불교 교리의 근원인 것이다.
「잡아함경」의 <설법의설>(說法義說 2-296)이라는 원시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연기법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比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나고 (比起故 彼起)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比無故 彼無),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한다 (比滅故 彼滅). 곧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행(行)이 일어나고 행(行)으로 식(識)이 일어나고 식(識)으로 명색(名色)이, 명색(名色)으로 육처(六處)가, 육처(六處)가 촉(觸)이, 촉(觸)이 수(受)로, 수(受)가 애(愛), 애(愛)가 취(取), 취(取)가 유(有), 유(有)가 생(生)이되고 생(生)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와 우비고뇌가 된다. 그리하여 괴로움이 모이는 것이요, 이것이 연기의 법이다.”
이는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고뇌가 왜 생기며 그 근원을 규명하고 그것을 끊어 고뇌를 없애는 12단계의 과정을 설한 것이다. 이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상관해서 생하고 멸하는 이치의 가리킴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 연기의 법 위에서 모든 사상과 실천(수행)체계가 구축된다. 이것을 12연기라고도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명 (無明)
무명은 무지(無知)의 뜻으로,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일어나는 생존욕, 본능적 생명력, 생활의 의지 등을 말한다.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며, 안과 밖을 알지 못하며, 업보를 알지 못하며 삼보를 알지 못하고 사성제와 연기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불교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통달하지 못한 상태로서, 참 지혜가 없어 어둡고 어리석어 밝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② 행 (行)
무명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모든 욕망의 움직이는 상태를 말하며 몸과 마음으로 짓는다고 본다. 이는 신행(身行), 언행(言行), 의행(意行)의 삼행 즉, 삼업을 말한다. 행은 곧 업이다. 삼업에는 신삼(身三 : 살생, 도둑질, 음행)과 구사(口四 : 망언, 도리에 맞지 않는 꾸민 말, 험담, 양설)와 의삼(意三 :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바르지 않은 생각)이 있고, 보(報)는 지은 업에 대한 응분의 댓가이다. 이것이 인과응보이다. 다시 말해서 무지무명을 연함으로써 그릇된 삼업을 만드는 것이 행이다.
③ 식 (識)
행을 하다보면 무엇인가 인식하는 작용이 생겨나며 이는 행위의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행에서 얻어지는 분별심 (선, 악)이기도 하다. 식은 6식이 있어, 눈의 식, 귀의 식, 코의 식, 혀의 식, 몸의 식, 뜻의 식이 있다.이것은 모태 안에서부터 최초로 발생하는 한 찰나*의 오온(五蘊)이다.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이 생긴다.
* 시간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찰나’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시간 단위이다. 「대비바사론」에는 두 남자가 몇 가닥의 비단실을 잡아당기고 다른 한 남자가 날카로운 칼로 단숨에 이 실을 절단할 때 64찰나가 경과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④ 명색 (名色)
인식(識)의 대상, 즉 객관을 표시한다. 명(名)이라 하는 것은 마음이요 색(色)은 물질, 온(蘊)이 아직 완벽하게 조화되지 못한 상태를 이른다. 즉, 마음이란 형상이 없는 4온 (受, 想 行, 識)이요, 물질이란 4원소 (地, 水, 化, 風)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명색으로 말미암아 육처가 생긴다.
⑤ 육처 (六處)
이는 명색을 받아들이는 곳이다. 우리 몸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 6근(根)이 구비되어진 상태로, 감각과 지각 능력에 해당한다.
⑥ 촉(觸)
이러한 여섯 가지 기관을 통해 바깥 경계의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등을 의식한다. 쉽게 말하자면, 촉은 6근을 통해 6식을 작용하게끔 하는 자극 곧 원인이다. 이것만으로는 선악과 무관한 인식론이지만, 식(識)이 무명(無明)에 기초한 잘못된 인식이기 때문에 미혹을 야기하게 된다.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생긴다.
⑦ 수 (受)
감각 기관이 바깥 경계를 접촉한 다음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단계로써 좋고 나쁨을 느끼는 감정, rhl롭다는 느낌, 즐겁다는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세 가지가 있다. 우리가 동일물을 인식해도 느낌의 차이가 있는 것은 수에서 기인한다. 수에서 애가 생긴다.
⑧ 애 (愛)
苦와 樂을 분별해서 좋은 것을 보면 애착심을 내어 열망하고 강한 욕구를 내는 것이다. 욕망에는 삼애(三愛)가 있는 바, 욕계의 모든 것을 탐내는 마음 (욕애에는 식욕, 수면욕, 음욕의 육체인 욕구와 명예욕, 재물욕의 정신적 욕구가 있어 이를 5욕이라 한다), 색계의 모든 것을 탐하는 욕망, 무색계의 모든 것을 탐하는 욕망 등이다. 애로 말미암아 취가 있게 된다.
⑨ 취 (取)
애착심이 증장되어서 이를 자기의 소유로 하고자 하는 생각이며 나쁜 것을 버리려는 행동이다. 취란 집착으로, 4취가 있다. 즉, 욕망, 견해, 계(戒), 나(我)에 대한 집착이다. 취는 유를 말미암는다.
⑩ 유 (有)
소유욕이 따라 선, 악의 업을 지어 앞의 愛와 取의 인연에 의해 과보가 있게 되는 윤회생존을 말한다. 유(有)는 존재라는 뜻이니 존재에는 삼유(三有)가 있다. 즉, 욕계에 있는 존재, 색계에 있는 존재, 무색계에 있는 존재이다. 이렇듯, 애역과 취착의 선악업이 습이 되어 미래의 과(果)를 발생시키게 된다.
⑪ 생 (生)
생이란 중생 (생명이 있는 것)이 태어나서 오온과 삶의 바탕과 육처와 명근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유(有)의 지은 업연으로 미래의 생을 받게 됨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는 일상생활의 경험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의 의미도 있다. 즉, 미래의 과(果)를 만드는 위치가 바로 생인 것이다.
⑫ 노사 (老死)
생겨남을 원인으로 하여 생애에서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오온(五蘊)을 벗어난다. 12연기 가운데 중심고리는 무명(無明)과 식(識)과 유(有)이며, 특히 무명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12인연의 순서는 순서대로도 할 수 있고 역순으로도 할 수 있는데, 원인에서 결과로 이르는 순관(順觀)의 경우는 무명이 중생 유전의 기점이 되며, 역관(逆觀)으로 볼때도 무명은 모든 생사를 일으키는 근본원인이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명(無明)이 없어야 된다. 무명이 없으면 명(明)만 남아서 전혀 다른 인과를 형성했을 것이고, 명(明)에 의한 12연기법은 좋은 생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식(識)이 중요한 이유는 식이 명색이 생기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즉, 식은 생명체의 정신과 형체를 이루는 직접 원인이자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有)는 사상행위 즉 업(業)을 의미하는 것인데, 업은 내세의 과보를 일으켜서 내세 윤회의 원인임과 동시에 조건이기에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12연기론이 우리 중생의 삶과 죽음에 대한 원인과 결과의 구체적 관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因果)로 정리하여, 무명과 행은 과거세의 두가지 인연이며, 식, 명색, 육처, 촉, 수의 고(苦)는 현세의 다섯가지 과(果)이고, 애, 취, 유는 현세의 세가지 인(因)에 해당되며, 생노사는 미래세의 2과(果)로서 고(苦)에 해당되는 것이다. 과거세의인(因 무명과 행)이 현세의 과(果 식, 명색, 육처, 촉, 수)와 연(緣)을 지어 하나의 인과가 결정되고, 현세의 인(애, 취, 유)이 미래세의 과(생노사)와 연(緣)을 맺어 또 다른 하나의 인과를 만들게 된다. 이 두 가지 인과를 통합해 보면 삼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가 성립된다. 이화같이 12연기법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복합다단한 현상이므로 해석에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 삼세양중인과 (三世兩重因果) ]
順
觀
① 무명
感(연분)
과거세의 二因
重因果
② 행
業(因)
③ 식
苦(果)
④ 명색
⑤ 육처
현재세의 五果
⑥ 촉
⑦ 수
⑧ 애
感(연분)
현재세의 二因
重因果
⑨ 취
逆
觀
⑩ 유
業(因)
⑪ 생
果(果)
미래세의 二果
⑫ 노사
卍. 업보윤회설과 육도 (六道)
윤회(輪廻)란 하나의 생으로부터 다음의 생으로 재생(再生)을 거듭하는 것으로 생사(生死)와 비슷한 말이다. 윤회를 생존의 형식으로 보면 유(有)가 된다.
우리는 흔히 수레바퀴가 돌아서 정지하지 않는 것에 비유하여, 윤회(輪廻)를 단순히 중생의 생사가 유전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석존께서 설법하신 윤회사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고, 12연기설과 윤회업력의 사상을 통일시켜 업보윤회설을 제시하며 중생의 운명이 각각 다른 이유를 설명하셨다.
석존은 업력이 중생의 과보 원인이라 하셨고, 또 중생의 생사유전되는 원동력이라고 하셨다. 업력으로 중생의 행위와 행위를 지배하는 의지가 생기고, 맨 처음 하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심리활동, 즉 의업(意業)이 있고, 다음이 구업(口業)이며 신체상으로 행위가 드러나는 신업(身業)이 있게 된다. 부처님은 이러한 중생의 3업이 종종 무명, 즉 무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셨다. 인생은 무아이며 무상이며 궁극적으로는 소멸하게 되는데도 자신에게 내(我)가 남아있기를 바라므로 이러한 중생의 행위는 종종 무지의 표현이며, 이로 인한 행위가 괴로움의 총체적 근원이라는 것이다.
업(業)은 역량과 작용, 공덕과 과실을 나타낸다. 석가모니는 업력의 영향을 없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 중생이 지은 선업과 악업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일으킨다고 한다. 그런데 업의 성질이 각각 같지 않기 때문에 얻게 되는 과보 역시 다르며, 내세에 이르게 되는 윤회의 상태도 동일하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중생이 지은 선악의 업보에 따라 6도(道)윤회를 겪는다고 한다. 중생은 육도 (=여섯 세상)를 윤회한다. 이것은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아수라계, 사람계, 천상계이 그곳이다.
① 지옥계
지옥(地獄)은 너무나 잘 알려진 곳으로 인간의 죄를 벌하는 곳이다. 살아서는 요행이 국법의 심판을 면했다 할지라도 죽어서는 죄과의 몇십배나 되는 고통으로 심판하는 곳이 지옥이다. 죽은 후의 일이라고 대비하지 않는 이도 많을 것이다. 죽음의 세계에도 이 세계와 똑
같은 감각과 환경이 있으므로 지옥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일의 일이 되는 것이다.
삶을 매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금생이 바로 전생의 업보로 인한 지옥 속의 삶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은 윤회하는 세상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곳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함부로 인과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다가는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법이다.
지옥은 8만 4천개가 있다. 그 중에서도 8열(熱)지옥과 8한(寒)지옥이 있는 근본지옥, 8열지옥 중의 제 8아비지옥은 가장 고통스런 무간(無間)지옥으로 유명하며, 근변(近邊)지옥, 고독(孤獨)지옥 등이 있다.
② 아귀계
이는 글자 그대로 배고픈 귀신(餓鬼)들의 세계를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49일만에 다른 몸을 받게 되는데, 이 동안은 누구든지 중음(中陰)에서 귀신의 형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49일이 지나도 아직 귀신 상태로 남아있는 중생이 있을 수 있는데, 이들은 통상 집착이 많아 다른 세계로 가지 못하고 살아있을 때처럼 돌아다니는 영혼이다. 귀은 자기 존재가 진정 있다는 어리석은 집착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들 영혼은 귀신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스스로의 존재가 허상임을 받아들이고 집착을 놓게 될 때 비로소 다른 몸을 받아나게 된다.
이와 같이 영혼은 비물질로서, 본래 없는 것이다. 죽은 영혼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승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질 때에만 비로소 귀신의 세계를 벗어나게 된다. 사찰에서 죽은 영혼을 천도해주는 이유는 법문을 들려주어 영혼이 스스로 깨달아 다른 몸을 받든지 아니면 일시에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마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49재(齋)를 올려 죽은 자로 하여금 공덕을 닦도록 해주는 일은 남은 자가 해야하는 필수 작업인 것이다.
49일간의 정화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강한 집착을 가진 어리석은 영혼들은 그대로 영혼으로 남아 있게 되는데, 이러한 영혼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기 때문에 바로 아귀(餓鬼)가 된다. 그래서 귀신 중에는 아귀가 가장 많고, 대개 귀신은 아귀다. 이들은 귀신 중에서 가장 괴로운 귀신으로, 천년 만년동안 한끼도 못먹어서 항상 배고프고 목마른 고통을 받는데, 그러므로 영혼들은 아귀인 것이다. 이들은 자손의 제사에 의지하거나 버린 물건에 깃들여 살게 된다. 사찰에서는 매년 7월 15일 백중 우란분재일에 아귀들과 지옥이나 축생의 과보를 받고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위해 재(齋)를 베푼다.
③ 축생계
이는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여 뒤바꿔가면서 먹이가 되어 주는 사람 이외의 동물 세계이다. 인간으로 있는 동안 지헤를 닦지 않으면 태어나게 되는 곳이다.
④ 아수라계
아수라(阿修羅)는 범어의 음역이다. 의역하면 비천(非天)이나 마신(魔神)으로서, 원래 아수라는 투쟁을 일삼는 전투 신이며, 능력은 천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화를 많이 내고 싸움을 좋아해서 천상과 같지는 않다. 본래는 천국에 있었는데, 천상의 덕성을 잃어서 천계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아수라는 아귀와 비슷한 귀신계로 전락되었다. 전투를 좋아하고 항상 마음속에 있는 불만을 조절하지 못하고 아수라장으로 뒤죽박죽 자기들끼리 싸우고 소리치는 곳인데, 자기 이익만 챙기고 남을 괴롭히는 것을 일삼는 사기꾼, 폭력배, 건달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⑤ 인간계
이는 큰 복이 있어야 태어나는 곳이다. 사람은 마음 닦는 공부를 하여 성불에 이를 수도 있지만 자만하면 악의 구렁텅이에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참으로 묘한 선택의 자유가 있는 중생계인 것이다.
⑥ 천상계
이는 극락처럼 복을 많이 지은 중생이 나는 곳이다. 자연이며 천연(天然) 그대로여서 청정광명함이 인류세간과 비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인 신(神)을 가리키며, 천신(天神)이라고도 한다. 중국 도교의 옥황상제는 불교에서 말하는 천신에 해당된다.
욕계의 천상에는 6천(天)이 있다. 사람이 행한 공덕의 대소에 따라 죽은 후에 높고 낮은 여러 천계에 올라가게 된다. 통상 사왕천이 인간세에 가장 가깝고, 그 다음에 도리천이 있는데, 제석천*은 도리천의 주인으로서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자다. 천상이 육도 중에서는 최상의 단계이나 완전한 해탈을 얻은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생사윤회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천상계와 극락세계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극락은 서쪽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나서 아미타불이 게신 세계인데, 중생계에서도 가장 복이 수승한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므로 아름답고도 기이한 세계이다. 극락의 중생은 전혀 괴로움이 없고 항상 즐거운 일만 있다하여 극락이라 한다. 이와 달리 천상계의 중생은 항상 즐거움이 있되 극락세계처럼 괴로움이 완전히 끊어진 곳이 아니다. 그래서 천상계는 육도에 속하는 것이다. 천상계는 부처님이 다스리는 곳이 아니고 범천왕(梵天王)이나 제석천왕 등 각각의 천황이 다스리는 곳이다. 그렇지만 윤회하는 여섯 중생계 중에서는 가장 살만한 곳이다.
육도(六道) 가운데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는 3악도(惡道)라 하고 아수라계, 인간계, 천상계는 3선도(善道)라 한다. 사람은 비교적 높은 단계에 있는 존재지만, 지은 과보에 따라 부단한 고해(苦海)와 윤회유전 속에서 영원을 기약할 수 없다. 오로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경건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육도의 울타리를 벗어나 생사를 벗어난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또 선정(禪定)의 힘으로 향상되는 단계로 윤회의 세계를 나눈 것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이다. 이 삼계는 각각 ‘욕망과 집착으로 가득찬 세계’(욕계), ‘욕망은 끊었으나 육체가 남아있는 세계’(색계), ‘육체를 가지지도 않고 정신적 요소만으로 된 세계’(무색계)이다. 삼계는 또한 삼유(三有)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윤회하는 생존양식을 통칭한다. 삼계육도는 이처럼 생존의 형식구조이다.
이와 같이 석존은 중생의 생명이 죽음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며, 비록 일반적인 정신활동은 형체의 파괴와 함께 정지한다고 할지라도 생존의 맹목적 의지, 관념(=무명), 생시의 활동, 경험(=업) 등은 남아있어 계속 쉼이 없다고 본다. 이러한 생존의지와 관념이 작용하여 사람으로의 가능성을 형성하고 이미 지은 업력에 상응하는 색신(色身)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용하는 무명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를 두고 바로 무아(無我)라 하신 것이며, 이러한 무아의 무주재, 무실체의 의미는 결국 해탈과 맞닿는다.
* 제석천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그냥 제석이라고도 한다. 선견성에 살면서 사천왕과 32천을 통솔하면서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를 징벌하는 왕이다.
(3) 멸제 (滅諦)
불교에서는 인생이 걸어가는 두 가지 상반된 길을 보여주고 있는 데, 인생유전(人生流轉)의 경우이거나 인생환멸(人生還滅)의 경우로 본다. 전자는 탐진치의 악연(惡緣)이 연속되어 환경과 부조화하며 고통을 느끼면서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해결할 방법도 찾지 못하여 환경의 안배대로 윤회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즉, 탐진치의 혼탁한 탁류(濁流)에 떠밀려 고해(苦海)로 흘러들어가는 인생이다. 이런 인생은 유전연기(流轉緣起)에 의한 것이다.
반대로, 인생환멸(人生還滅)의 경우는 좋은 인연이 이어져서 열반이라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팔정도라는 원인으로해서 열반이라는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환멸(還滅)의 환(還)은 돌아간다는 뜻이며 멸(滅)은 탐진치를 없앤다는 의미인데, 곧 유전(流轉)의 삶을 타파하고 변혁하며 그것을 반대로 돌린다는 뜻이다. 가령 물의 흐름에 비유하면 탁류가 흘러 바다로 가는 것을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람의 마음은 수행을 하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탐진치로 흘러가게 되는데, 이것을 거슬러서 깊은 산골짜기 바위틈새에서 나오는 맑고 깨끗한 샘물같은 탐진치가 없는 자성(自性)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환멸연기(還滅緣起)를 지닌 인생이 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가 바로 여기서 말하려는 멸제의 내용에 해당되는 것이다. 멸제란 인생의 괴로움을 소멸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생의 궁극 목적이며 최고의 경지인 것이고, 불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나아갈 방향이며 목표인 것이다. 이런 멸제의 경지에 도달하면 바로 부처라고 한다. 석존은 고통의 원인을 아시고,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있었으며, 고통이 없는 상태를 깨달으신 분이시다.
또한 「중(中)아함경」에서 멸제를 ‘애멸고멸성제(愛滅苦滅聖諦)’라고 했으며, 「증(增)아함경」에서는 ‘고진제(苦盡諦)’라고 했다. 애(愛)는 탐욕이며, 멸제는 탐욕을 멸진하여 고통을 제거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이치를 품고 있다. 그래서 탐욕의 멸진은 바로 고통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다. 모든 번뇌의 근원인 집제를 없애면 편안한 상태가 된다. 즉, 병이 나으면 다시금 건강해지는 이치처럼 이러한 멸제의 방법이 곧 도제(道諦)이며, 도제를 통하여 열반, 즉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모든 것이다 멸해 없어진다는 것이 당연한 진리이다. 그래서 설령 병이 들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멸한다는 이치를 안다면 불치병도 반드시 낫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드시 멸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4) 도제(道諦)와 팔정도(八正道)
도(道)는 길, 과정, 방법을 뜻하는 말로, 모든 고통과 번뇌를 제거하여 열반을 얻기 위한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불교에서의 목적지인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부처님은 당시 유행하던 고행주의적 자기학대나 금욕은 해탈을 이루는데 무가치하며 무익하다고 보았고, 더구나 천신께 제사하고 기도한다고 해탈에 이르는 것은 아니며, 또한 심오한 우주만유의 시말(始末)에 대해 탐구하는 것도 해탈에 이르는 길로는 무용지물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부처님은 고통이 완전히 없어지는 상태, 곧 열반을 얻는 길이 올바로 사는 길임을 깨달으셨다.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여덟가지 올바른 길을 깨달으시고 가르쳐주셨다. 부처님은 처음 설법하실 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중도(中道)를 주장하셨는데, 이를 위한 8조목이 팔정도(八正道)이다.
이와 같이 고집멸의 진리는 우리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슬픈 진리이지만, 부처님께서는 마치 병 있는 자에게 치료의 방법을 제시하신 것처럼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을 설하셨는데, 그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팔정도이다.
불교가 차츰 발전되면서 여기에 4념처(念處), 4정단(正斷), 4신족(神足), 5근(根), 5력(力), 7각지(覺支) 등에 더해져 모두 7과(科) 37도품(道品)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오늘날 7과(科)의 하나에 속하는 팔정도이다. 중요도를 따져 팔정도에 관해 먼저 설명하고 나서, 나머지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卍. 팔정도 (八正道)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뇌를 다 없애버리고 해탈에 이르는 여덟가지 바른 이치의 성불방법인 팔정도는 정견(正見 : 바르게 보라), 정사유(正思惟 : 바르게 명상하라), 정어(正語 : 바르게 말하라), 정명(正命 : 바른 생활을 하라), 정업(正業 : 바른 일을 하라), 정정진(正精進 : 바른게 정진하라), 정념(正念 : 바르게 생각하라), 정정(正定 : 바른 선정에 들어라) 등이다 이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정견 (正見)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 등 모든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일체의 분별심이 없이 올바른 견해를 내어 사물의 근본을 보려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언제나 우리의 지식(知識)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진리에 입각하지 않고 내가 알고 견해로 보는 것은 그른것임을 경고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진리의 눈으로 바로 보아야 한다. 간단히 말한다면 정견은 불교에서의 지혜다.
② 정사유 (正思惟)
정사(正思惟), 정지(正志)이다. 번뇌가 작용하여 그릇되게 얽혀 버리지 않도록 밝은 지혜로 사물의 이치를 똑바로 보라는 것이다. 즉, 삿된 도를 쫓아서 쓸데없는 수련에 몰두하거나 신비한 현상을 찾지 말고 순수한 수행을 하라는 말씀이다.
③ 정어 (正語)
곧고, 바른 진리의 말만을 고운 말, 성실한 말로 하는 것을 말한다. 바르게 말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항상 바르게 전하는 것이다. 진리를 미사여구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깨닫게 해주는 바른 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바른 말을 해라는 것이다. 말은 화자의 인격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항상 똑바르게 말하고 바른 말만 해야 한다. 거짓말은 절대 금물이다. 바르게 말한다고 해도 그른 말일 수 있는데, 거기다 거짓말까지 해서는 더욱 혼란만 초래하게 된다.
④ 정업 (正業)
올바로 행동(일)해야 한다는 것으로, 불교의 요구에 합당한 행위를 말한다. 정견(正見)이나 정사유(正思惟)에 의해 바르게 보고 생각된 일이 아니면 절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며, 신(身). 구(口).의(意) 삼업(三業)을 짓지 아니하고 공명정대한 방법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이 반
듯하고 절도가 있을 것을 가르친다.
또한 구체적으로 바른 직업을 가지라는 의미도 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이나 타인에게 직간접으로 피해를 주는 직업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택하지 말고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반드시 생각해서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⑤ 정명 (正命)
올바로 목숨을 유지해나가라는 것이다. 올바른 방법으로 살아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바른 운명, 바른 명령, 바른 복종의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정당한 생활이란 불교의 기준에 입각하여 의식주를 행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수면, 식사, 업무, 운동, 휴식 등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과 건강증진, 일의 능률향상, 경제생활과 가정생활등을 건전하게 이끄는 것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바른 인생을 사는것도 진리를 깨달으려는 구도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⑥ 정정진 (正精進)
올바로 정진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방편(正方便)을 말한다. 정확한 노력으로 악을 그치고 선을 닦아 해탈을 향해 정진하는 것이다.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아직 발생하지 않은 악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일어나지 않은 선은 일어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불교의 기준에 의거해서 선악을 구별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자각적 노력을 주장하며 태만과 어리석음을 반대한다.
⑦ 정념 (正念)
올바로 생각해서 올바로 기억하고 되풀이 생각하면서 잊지말고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허무맹랑한 사념(邪念)을 버리고 항상 보살의 거룩한 길을 향하여 수행토록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에 대하여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 그른 생각임을 가르쳐준다. 진리는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루 중에 무심과 무념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정념이다. 망념이 가득하여 머리가 맑지 못하면 정념이 아닌 것이다. 사리사욕없이 눈 앞에 있는 일만 보고 오직 열심히 일할 뿐이라야 바로 정념에 드는 것이다.
⑧ 정정 (正定)
올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안정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켜 깊은 선정에 들어가서, 불교의 지혜로 세상을 관(觀)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팔정도는 불자의 여덟가지 바른 생활이므로 꼭 실천해야 하는 도(道)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정견(正見)과 정명(正命)은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의 두 주된 기둥에 해당되므로 가장 의미가 깊다. 팔정도는 교리가 발달되면서 계(戒), 정(定), 혜(慧)라는 삼학으로 묶어서 풀이된다. 삼학이란 불법(佛法)을 배우는 사람이 지켜야 할 것으로서, 계(戒)는 순결한 행위와 엄중한 수지로서 정(定)과 혜(慧)의 기초가 되고, 혜(慧)는 주체이며, 계(戒)와 정(定)은 방편인 것이다.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戒)에 속하고,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은 정(定)에 속하며,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은 혜(慧)에 속한다고 한다. 이처럼 삼학은 단독으로 특징지울 수 없고 내재적인 연관성을 지닌 것이어서 학설에 따라서 차dl가 있다. 삼학과 팔정도는 뒤에서 살펴볼 육바라밀과도 연관성이 깊다.
[ 팔정도 도해 ]
삼 학
팔정도
육바라밀
계(戒)
정어(正語)
지계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定)
정념(正念)
선정
정정(正定)
혜(慧)
정견(正見)
지혜
정사유(正思惟)
인욕
정전진(正定進)
정진
보시
卍. 37각지 (覺支)
각(覺)이란 깨달음이며 지(支)는 종류를 말한다. 그래서 각지(覺支)란 불교의 깨달음의 수단, 깨달음에 향하는 여러 덕목이라는 뜻인데, 다른 말로 37도품(道品)이라고도 한다. 이것 역시 「아함경」에서 강조된 내용으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 우리가 따라야 할 법들을 열거한 것이다.
37각지의 서른일곱가지는 별도로 서른일곱개가 아니고 여러 방편들이 모두 합쳐서 서른일곱가지가 된 것이다. 팔정도도 이 중의 여덟가지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팔정도 외에 깨달음을 돕는 29가지 덕목에 대해 설명한다.
① 4념처 (念處)
․ 신념처(身念處) : 몸은 부정(不淨)하다고 생각하라
․ 수념처(受念處) : 감각은 고(苦)라고 생각하라
․ 심념처(心念處) : 생각은 무상(無常)하다고 생각하라
․ 법념처(法念處) : 모든 것이 무아(無我)하다고 생각하라
이는 지혜의 힘을 통해 신(身), 감수(感受), 심(心), 법(사물 또는 현상)의 4경(境)의 무명함을 기억토록 하는 것인데, 이것은 부정(不淨)하고 고(苦)하며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한 우리의 현실을 그냥 그래도 정(淨)하며 낙(樂)하며 상(常)하고 아(我)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주는 가르침이다.
② 4정근 (正勤)
․ 생기지 않은 악(惡)은 미리 방지하라 (未生惡令不生)
․ 이미 생긴 악은 아주 끊어 버리라 (己生惡令永斷)
․ 아직 생기지 않은 선(善)은 생기게 하라 (未生善令生)
․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증대시켜라 (己生善增長)
이것은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의 ‘모든 악(惡)이란 악은 다 행하지 말고, 모든 선(善)은 다 받들어 행하며, 각자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
다. 또한 이것은 팔정도의 정진하라는 말씀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③ 4신족 (神足)
․ 욕신족(欲神足) : 선정을 얻고자 원하는 일
․ 근신족(勤神足) : 더욱 더 노력하는 일
․ 심신족(心神足) : 마음을 올바로 유지하는 일
․ 관신족(觀神足) : 지혜에 의해서 생각하는 일
이는 달리 4여의족(如意足)이라고도 한다. 신(神)이란 신통하다는 뜻이며, 족(足)은 몸이 발에 의지해서 서는 것과 같이 다른 것이 이것에 의지해서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네가지는 선정(禪定)을 체득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건들이다.
④ 5근(根)과 5력(力)
불교에서는 5근(根)이 중생으로 하여금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게 하는 촉진작용을 한다고 본다. 5력이란 5근의 향상으로 생겨난 다섯가지 능력으로서 해탈에 이르기 위한 힘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마음과 그로부터 발휘되는 힘이 있다.
․ 신(信) : 참된 것(불교)을 쉽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 정진(精進) : 용맹스런 수행
․ 념(念) : 대상에 대한 기억
․ 정(定) : 대상에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
․ 혜(慧) : 득실을 헤아리는 것
부언하자면, 근(根)과 력(力)은 뿌리에 대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힘인데, 사람이 태어날 때의 타고난 성품을 말하는 근기(根機)와도 관련이 있는 말이다. 이때 근(根)은 마음가짐이요, 기(機)는 몸이나 신체적인 조건 등을 말하는데, 사람에 따라 근기를 달리 갖고 태어난다. 그래서 사람마다 신근이 굳건한 사람, 정진근이 굳건한 사람, 지혜로운 혜근이 굳건한 사람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쓸 때나 자식을 키울 때 그 사람 또는 그 아이의 근기가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⑤ 7각지 (覺支)
7각지는 지혜의 기능이 가지는 일곱단계를 가르쳐준다
․ 택법(擇法) : 법의 진위(眞僞)를 택하는 것
․ 정진(精進) : 진실한 법에 따라 정진하는 것.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태해지지 않는 것
․ 희(喜) : 참된 법에 대해서 기쁨을 맛보는 것
․ 경안(經安) : 마음을 가볍고 편안하게 하는 것
․ 사(捨) : 외계(外界)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
․ 정(定) : 마음을 한 경지로 집중시키는 것
․ 념(念) : 마음의 안정과 지혜의 기능을 균등하게 해나가는 것
이상에서 보았듯이, 팔정도를 중심으로 한 도제(道諦)는 개인의 노력을 통해 인생의 이상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성제가 불교 교리의 골격을 이루는 전형(典型)이요 모든 교리의 근본사상이라면, 팔정도는 불교수행의 핵심이 되는 8가지 실천 덕목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이치를 잘 깨닫고 체득하는 것은 불교 수행자의 기본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 팔정도를 잘 닦는다면 이 세상이 그대로 극락이고 불국토가 될 것이며, 붉교에서 추구하는 절대의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욕망 때문에 미혹의 깊은 바다에 빠져들어 쾌락이나 욕구충족에만 매달리는 천박한 생활을 하거나 함부로 자기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학대하거나 괴롭혀가며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심한 고행의 생활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방법은 버리고, 지혜로운 마음을 열어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곧 팔정도를 통한 중도(中道)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중도(中道)는 팔정도의 길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지침이다. 마치 어떤 나무토막이 강물 위로 떠내려가는데 이쪽 언덕이나 저쪽 언덕에도 닿지 않고 가운데로만 내려가면 결과적으로 바다에 다다르게 되는 것과 같이 중도라고 하는 것은 전혀 새롭거나 놀라운 것이 아니며, 고집멸도의 원리 가운데서 해탈으로 향할 수 있는 바른길의 모습인 것이다.
2. 삼법인 (三法印)
삼법인이라는 말은 불교와 이교도와의 교리적 차이를 단적으로 표시한 세 종류의 진리의 도장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45년간 설법을 단 세 가지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어, 법인(法印)이라고 칭한다.
이것의 연유는 본래 부처님께서는 무명 내지는 무지가 인생고통의 가장 궁극적인 근원이라는 것인데, 사람들의 고통은 인생이 무지하고 무아하다는 무명의 이치를 모르는데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내세워 인생무상을 증명해보이셨다. 이것을 처음에는 삼법인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이 보태져서 4법인이 되었다. 그런데 제법무아의 원리속에 일체개고가 포함되어있다고 판단하여 일체개고를 제외하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삼법인으로 정하게 되었다. 또한 5법인이라는 것도 있는데, 제법개공(諸法皆空)이 더해진 것이다.
삼법인은 모든 현상계를 정확하게 관찰한 것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대승이나 소승을 막론하고 불교의 설법중에서 부동의 근본원칙이며, 불교사상의 근간을 구성하는 가장 주된 골격이
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1) 제행무상 (諸行無常)
행(行)이란 본래 옮겨 다니면서 바뀐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제행무상이란 모두 인연에 의해 생긴 세간의 일체 사물과 현상은 모두 변화무상해서 고요히 상주하거나 영원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연기설과 통합시켜 말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상주 불변의 것이 없이 무상하다는 뜻이다. 행(行)은 시간적인 것이며 동적인 것인데, 움직이는 것 그 자체는 이미 소멸하고 있는 이치를 품고 있는 바, 영원한 것이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현재 드러나 있는 현상계 (감각하고 지각할 수 있도록 나타나는 세계)는 항상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쉬지 않고 변해간다. 즉 모든 존재는 생겨나고 머무르고 변화하고 없어진다는 뜻인데, 이것은 감상적이나 체념적인 방향으로 변화해가는데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변화속에서 새롭게 바꾸어 소생되고 더욱 진취적이며 더욱 희망적인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행(行)하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이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세상을 살아가는 교훈을 준다. 본래 존재의 바탕이 원래 무상한 것임을 알아 어떤 경우에도 한 곳에 집착하여 슬퍼하거나 고뇌 등으로 얽매일 것이 없음을 깨달으면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고, 가난한 이가 부자가 될 수 있고, 병든 이가 건강해질 수 있고,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속에 있는 사람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무상의 원리를 잘 알아서 항상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변하는 것을 관찰하지 않는다면 도태되고 만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武所住 而生基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응당히 마음을 주하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는 의미로 이는 항상 새롭게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곳에 고정시키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단,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그것은 진리인데, 진리가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을 논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 때문이다.
(2) 제법무아 (諸法無我)
법(法)이란 사물, 물건, 존재를 의미한다. 제법이란 모든 사물과 각종 존재들을 가리킨다. 아(我)는 주재와 실체의 의미이며, 무아(無我)는 아(我)가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제법무아란 일체의 존재가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주재자가 없어서 모든 사물에 주재작용을 일으키는 내(我)가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단일하고 독립적이며 자아존재적이고 자아결정적인 영원한 사물은 없으며, 모든 사물은 모두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상대적이며 임시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행무상이 시간적인 변화를 강조한 것이라면 제법무아는 공간적인 차원의 것으로, 모든 것에 절대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물질도 그 어떤 주체적인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래 없었는데, 인연따라 뭉쳤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것이지, 어떤 근원적인 주체(我)가 있어서 그 주체에 의해 물질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현실에 나타난 현상 자체가 없다고 부정하는 말은 아니고, 모든 사물이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고정되어 변화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인연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 절대의 실체가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 때문에 현실 자체의 부정이나 무시에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실 자체를 그대로 뚜렷이 알아서 어떤 하나에 깊이 집착하지 않고 생멸에 대하여 담담하고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되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부처님의 무아사상을 대표하는 법이다. 무아법을 알면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게 된다. 인생의 여러 문제들은 원래 내가 있다는 허망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제법무아의 진리를 배웠으니 이제는 인생을 방관자적 입장이 되어서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하며, 그리하여 삶을 사는 바른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인생이 무아라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무아라고 해도 내 몸은 여전히 육체적이며 생리적이다. 무아는 본래 나라는 주체가 생멸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한 것이기에 나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지만, 몸이 필요한 것을 무시하고 바로 죽어라는 말은 아니다. 제법무아는 나의 본질이 무아임을 깨달아 마음에서 비롯되는 각종 번뇌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진리의 법이다. 즉, 무심으로 모든 일을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불교 이외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불교 독자적인 교리이다. 우리가 많은 들은 불경의 명구인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에서 보다시피, 모든 물질의 속성은 공(空)이되, 현실은 물질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같다고 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알아 듣기 힘든 진리이다.
우리의 육안에 비춰지는 것만으로 판단하려고 하니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를 바로 알려면 혜안(慧眼)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공에도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현실 위해서 모든 일을 하되, 마음은 비우라는 것, 즉 잘났다는 생각도 원망도 갖지 말고 삶에 충실하는 것
이 바로 제법무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3) 열반적정 (涅槃寂定)
열반적정은 앞의 두 법인과는 달리 긍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열반은 고요한 세계, 이상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로서, 니르바나라는 범어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의 뜻은 ‘불어서 끄다, 불어서 꺼진 상태’라는 뜻이라 한다. 적정은 곧 열반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열반적정이란 번뇌를 멀리하고 상(相)에 대한 얽매임을 끊으며 고요하게 항상 있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살핀 제행무상, 제법무아와 연관시켜 총체적으로 열반적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체의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사물은 모두 무상한 것이어서 중생은 염세의 고통을 일으키지만 다시 한걸음 나아가면 일체 사물은 무아여서 반드시 의지할 바가 없게 되고 그래서 멸에 이르게 된다. 이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사물의 무상성과 무아성을 깨달은 후에 완전한 열반적정이라는 최고 이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제법(諸法)은 무아(無我)요,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요, 일체(一切)는 고(苦)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그저 깨닫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번뇌망상도 없어졌고, 또 바깥으로는 나를 동여매는 억압이나 속박도 없어진 상태, 바로 고요하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열반적정이며 해탈이라는 것이다. 번뇌의 불꽃을 꺼버리니 그냥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이다. 그래서 열반적정이다. 이때 고요하다는 것은 공(空)과 마찬가지이고 무(無)와도 비슷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열반적정은 불교의 최고 이상의 경지이며, 우주만물의 실상이라고 인식되고 있고, 나아가 우주만물의 진리로 간주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진리가 언어사유로 표상될 수 없는 그 어떤 내성에 의한 직관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통해 평화로운 열반의 세계가 이루어짐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몸소 행하여 보여주신 바처럼,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에서 생겨나는 끊임없는 번뇌는 나를 태우는 불과 같아서 늘 고통을 가져다주는데 이것들은 한번에 불어서 다 꺼버리면 마치 고요함과 안락이 찾아들어 더없는 평화가 깃들고 적정한 속에 안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열반적정이란 고요한 이상경계를 표현한 말이다. 그래서 진정한 열반은 죽음과도 같이 일체의 번뇌와 고뇌로부터 벗어나 고요함에 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열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열반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열반이란 고요한 만물의 본질이며, 불교는 결국 마음의 고요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
육바라밀이나 십바라밀은 대승불교에 와서 더욱 중요시된 교리이지만, 사실 그 근원은 4무량심(無量心)이나 4섭법(攝法) 등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4섭법은 십바라밀에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
(1) 4무량심 (無量心)
① 자(慈) : 우애의 마음,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
② 비(悲) :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 타인의 고통을 제거해주는 것
③ 희(喜) : 기뻐하는 마음, 남이 낙(樂)을 얻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는 것
④ 사(捨) : 평안한 마음 고(苦), 낙(樂), 희(喜), 비(悲)를 초월하여 마음의 편안을 얻는 것
이 네가지는 선정(禪定)에 의하여 수습(修習)해야 하는 이타(利他)의 마음이다. 이것은 중생에게 무량한 복을 가져다주고 범천(梵天)의 세계에 태어나게 한다고 석존은 말씀하셨다.
첫째, 우리는 자(慈)를 생각하면서 미륵보살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범어로 maitri(慈)와 미륵보살을 일컫는 Maitreya는 같은 어원의 말이다. 즉, 미륵이란 자(慈)가 가득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분은 잘하는 사람, 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보호해주는 보살로서 지금은 도솔천에 계신다고 하나, 우리의 인자한 마음속에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둘째, 비(悲)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생각하고 그 고통을 없애주려는 마음인데, 여기서 우리는 대비(大悲)하신 관음보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고통에 빠져있다면 주저말고 대비관세음보살을 불러야 한다. 이 분은 잘못하는 사람을 야단치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고통을 제거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셋째, 희(喜)는 흰 치아가 나오도록 웃는 기쁨을 의미한다. 석굴암에 있는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의 상단이 있는 세 얼굴이 바로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을 하고 있는 희(喜)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한 순간들뿐만 아니라 타인의 기쁨까지도 나눌 수 있는 희(喜)이다. 사실 우리는 이웃의 슬픈 일은 그래도 잘 감싸주지만, 이웃의 경사에는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기가 쉽지 않다. 석존께서는 이 점을 간파하시고 잊지 않고 설하셨다. 그러므로 불자는 바른 희(喜)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넷째, 사(捨)의 마음은 고통과 즐거움,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것은 반야(般若)의 경지에 다다른 마음이다.
(2) 4섭법 (攝法)
섭(攝)이라는 말은 포섭한다고 할때의 섭이다. 그래서 4섭법이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서로 대립과 마찰이 없이 하나가 되자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법으로, 모든 갈등을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하나되게 하는 네가지 방법, 보시(布施)와 애어(愛語)와 이행(利行)과 동사(同事)를 가리킨다.
이것은 중생을 구제할 때 갖는 기본태도인데, 그 순서도 중요해서 반드시 순서대로 해야 된다.
① 보시 (布施)
사람들에게 인자한 마음으로 접하고 재물이나 진리를 기꺼이 베푸는 일을 뜻한다.
「아함경」을 보면 석존도 보시에 관해서 설명하셨다. 그러나 사성제와 삼법인의 그늘에 가려 보시행이 무시되었다가 대승경전에 와서야 다시 강조 되었다.
보시(布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