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神心銘) 강설 (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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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神心銘) 강설 (41-50)

무진스님 0 2620
41)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어 스스로 애착하여. 法無異法이어늘 妄自愛着하야.
                                                                                 (법무이법)          (망자애착)
법은 다른 법이 없어서 중생이 생각하고 집착할 특별한 법이 없는데 공연히 스스로 애착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세법을 버리고 불교를 해야겠다. 교학을 버리고 참선을 해야겠다. 반대로 참선하면 무슨 소용 있나, 교(敎)나 하자 하는 것 등이 모두 애착입니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선이니, 교니, 중생이니, 부처니. 마구니니 하는 분별들은 모두 망견인 변견으로서 애착심입니다. 그러니 그 모두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42)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라. 將心用身하니 豈非大錯가.
                                                                                         (장심용신)      (기비대착)
‘쓸데없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고 있으니 어찌 크게 잘못됨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알고 보면 우리가 성불하려고 애를 쓰고, 참선하려고 애를 쓰고, 경을 배우려고 애를 쓰는 것 전부가 마치 머리 위에 머리 하나를 더 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도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서 그 진여광명이 일체에 현성(現成)해 있으므로,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고 숨을래야 숨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으로 잡으려 하고 성취하려고 하면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잘못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만, 그러나 깨쳤다는 생각도 병입니다. 더구나 깨치지 않았다면 참으로 집착심을 떠날 수 없는 것이므로, 깨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고서는 광명을 볼 수 없듯이 깨치지 못하면 밤낮으로 현전한 이 진여광명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43)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迷生寂亂이요 悟無好惡어니                                                                            (미생적란)       (오무호오)
미혹할 때는 고요함과 혼란함이 생기나 깨치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좋다ㆍ나쁘다 하는 감정은 취사심이므로 미혹할 때는 집착심이 있지만 깨치면 취사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44)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一切二邊은 良由斟酌이로다.
                                                                                     (일체이변)   (양유짐작)
모든 치우친 두 가지 견해, 즉 양변을 다 버려야만 무상대도인 일승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우리가 쓸데없는 생각과 계교심을 일으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진다는 것입니다. 본래 법에는 양변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마음으로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분별을 내는 것을 짐작(斟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짐작인 취사심만 버리면 전체가 현전하여 대도(大道)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45) 꿈속의 허깨비와 헛 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夢幻空華를 何勞把捉가.
                                                                                   (몽환공화)   (하로파착)
‘꿈속의 허깨비와 헛 꽃’은 일체의 변견을 말합니다.성불하려는 것도 꿈속의 불사(佛事)이니, 성불한다는 것도 중생 제도한다든지 하는 것도 모두 꿈, 이미 헛 꽃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니 부처님 하는 생각과 불법이니 세법이니 하는 것도 다 놓아 버려야 하는데, 왜 이를 잡으려고 애를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46)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라. 得失是非를 一時放却하라.
                                                                          (득실시비)   (일시방각)
잘 잘못과 옳고 그름 모두가 변견이니, 이러한 양변을 완전히 버리면 중도가 현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47) 눈에 마음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眼若不睡면 諸夢自除요.
                                                                                   (안약불수)   (제몽자제)
누구든지 잠을 자지 아니하면 꿈은 없는 것입니다. 꿈은 누구든지 잠을 자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48)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느니라. 心若不異면 萬法一如니라.
                                                                         (심약불이)    (만법일여)
마음에 다른 생각인 차별심ㆍ분별심을 내지 않으면 만법이 여여(如如)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만법이 본래 여여한데 우리가 여여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은 바로 마음에 분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여여한 것을 우리가 억지로 여여치 않게 할 수도 없는 것이며, 여여치 않은 것을 여여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만법이 본래 한결 같아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한데도 그것을 보지 못함은 중생의 마음 속에 분별심이 있기 때문이므로 마음 가운데서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전혀 분별심이 없으면 ‘만법이 한결 같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9) 한결 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一如體玄하야 兀爾忘緣하야.
                                                                                     (일여체현)      (올이망연)
‘일체 만법이 여여하다’는 것은 그 본체가 현묘하기 때문입니다. 현묘한 본체는 석가가 아무리 알았다 해도 실지로 알 수는 없으며, 달마가 전했다 해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석가도 알지 못하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을 건가(釋迦猶未會이니 迦葉 能傳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알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그럼 석가가 깨치고 가섭에서 전했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알고, 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전하는 것이 불교의 묘법이니, 이것이 참으로 현묘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올연히 일체 인연을 다 잊었다.”고 하는 그 인연이란 생멸인연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멸인연이든 불생멸인연이든 세간법이든 출세간법이든 모든 인연을 다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50) 만법이 다 현저함에 돌아감이 자연이니라. 萬法이 齊觀에 歸復自然이니라.
                                                                     (만법)  (제관)    (귀복자연)
“만법제관(萬法齊觀)”이란 일체만법을 환히 다 본다는 뜻으로 흔히 해석하지만 일체만법이 모두 다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돌아감이 자연하다”고 해서 그냥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니, 그렇게 되면 천연외도(天然外道)가 되고 맙니다.
 
귀복(歸復)이란 반본환원(返本還源)의 뜻으로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실제 분별심만 다 버린다면 이 자성청정심에 돌아가는데, 그 돌아감이 아무런 조작이 없으며 힘들지 아니하여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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