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神心銘) 강설 (11-20)
무진스님
0
2480
2008.03.15 21:09
11)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止動歸止하면 止更彌動하나니. (지동귀지) (지갱미동)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돌아가려 하면, 고요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제일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고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 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 되는 모양입니다.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된다는 뜻입니다.
12)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가지임을 알 건가. 唯滯兩邊이라 寧知一種가
(유체양변) (영지일종)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動)이는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3) 한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一種不通하면 兩處失功이니
(일종불통) (양처실공)
‘일종(一種), 즉 자성청정심ㆍ진여자성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14)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 (견유몰유) (종공배공)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말씀입니다.
현상(有)이 싫다고 해서 현상을 버리려 하면 버리려는 생각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현상에 빠지고, 본체(空)가 좋다하여 공을 좇아가면 본체를 더욱 등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공이란 본래 좇아가거나 좇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공을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공과는 더욱 등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현상을 버리고서 공을 따르려고도 하지 말며, 반대로 본체를 버리고서 현상을 따라 갈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두 가지 모두가 양변이며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취사심을 버려야만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15)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多言多慮하면 轉不相應이요
(다언다려) (전불상응)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설명하고 거듭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래 대도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 心行慮滅)‘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도(大道)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점점 대도에서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16)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絶言絶慮하면 無處不通이라
(절언절려) (무처불통)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곳에서는 자연히 대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과 생각이 끊어진’ 여기에 집착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곳’이 아니라, 정말로 통하지 않아 아주 모르게 됩니다. 이 ‘말과 생각이 끊긴 것’은 그 자취마저 없는데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경지에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면 전체가 막히고 맙니다. 여기서도 근본은 취사심을 버려야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17)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
(귀근득지) (수조실종)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ㆍ업식을 망정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18)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 보다 뛰어남이라. 須有返照하면 勝却前空이라
(수유반조) (승각전공)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했으니 공하지 않느니’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19)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前空이 轉變은 皆由妄見이니
(전공) (전변) (개유망견)
앞에서의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18공(十八空)ㆍ이십공(二十空)등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뜻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 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 참됨을 구하려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라.
(불용구진) (유수식견)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견이란 무엇일까요?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돌아가려 하면, 고요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제일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고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 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 되는 모양입니다.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된다는 뜻입니다.
12)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가지임을 알 건가. 唯滯兩邊이라 寧知一種가
(유체양변) (영지일종)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動)이는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3) 한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一種不通하면 兩處失功이니
(일종불통) (양처실공)
‘일종(一種), 즉 자성청정심ㆍ진여자성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14)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 (견유몰유) (종공배공)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말씀입니다.
현상(有)이 싫다고 해서 현상을 버리려 하면 버리려는 생각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현상에 빠지고, 본체(空)가 좋다하여 공을 좇아가면 본체를 더욱 등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공이란 본래 좇아가거나 좇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공을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공과는 더욱 등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현상을 버리고서 공을 따르려고도 하지 말며, 반대로 본체를 버리고서 현상을 따라 갈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두 가지 모두가 양변이며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취사심을 버려야만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15)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多言多慮하면 轉不相應이요
(다언다려) (전불상응)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설명하고 거듭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래 대도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 心行慮滅)‘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도(大道)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점점 대도에서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16)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絶言絶慮하면 無處不通이라
(절언절려) (무처불통)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곳에서는 자연히 대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과 생각이 끊어진’ 여기에 집착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곳’이 아니라, 정말로 통하지 않아 아주 모르게 됩니다. 이 ‘말과 생각이 끊긴 것’은 그 자취마저 없는데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경지에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면 전체가 막히고 맙니다. 여기서도 근본은 취사심을 버려야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17)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
(귀근득지) (수조실종)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ㆍ업식을 망정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18)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 보다 뛰어남이라. 須有返照하면 勝却前空이라
(수유반조) (승각전공)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했으니 공하지 않느니’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19)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前空이 轉變은 皆由妄見이니
(전공) (전변) (개유망견)
앞에서의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18공(十八空)ㆍ이십공(二十空)등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뜻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 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 참됨을 구하려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라.
(불용구진) (유수식견)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견이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