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탐구 - 제3부 경전연구- 8장 불전의 성립과 체계
제 3 부 경전연구(經典硏究)
제 8 장 불전의 성립과 체계
석존이 득도하시어 45년간 교법을 설파하신 것을 후대에 엮어 세상에 내놓은 불교의 경전들은 그 종류와 분량면에 있어 사뭇 방대하다. 그래서 초심자이건 상당한 수준에 있는 불자이건 불경의 종류나 구성, 내용에 대한 대강의 지식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불교 경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8장과 9장을 마련했다.
1. 성전 (聖典)
(1) 성전과 경전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말 중에는 그 뜻이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뜻으로 혼동해서 사용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불교성전(佛敎聖典)과 불교경전(佛敎經典)의 경우도 그 중의 한 예라고 할 수가 있으니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양자가 같은 뜻으로 무심히 사용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성전과 경전을 엄밀하게 구별하자면, 경전은 성전의 일부분으로써 교조(敎祖)인 석존(釋尊)의 교설(敎說)을 문자화한 것으로 경문(經文)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전은 경전 이외에도 후대 불교도의 저술, 불교의 역사.전기(傳記), 기타 불교에 관계있는 일체의 저술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것이어서, 성전은 곧 불교연구에 관한 자료 문헌의 전부를 망라한 것이다.
따라서 성전은 인도, 중국, 한국 등 불교가 전파된 여러 나라에 걸쳐서 2,600여년의 역사를 통하여 점차 증가되어 그 수량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경전은 바로 이러한 성전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며 불교사상의 원류(源流)는 바로 이 경전에 있는 것이다.
(2) 삼장 (三藏)
삼장이라는 것은 인도에서 만든 불교 성전의 전부를 개괄한 명칭이다. 범어의 pitaka 라는 것은 군(群), 부류 또는 포함의 뜻으로 장(藏)이라고 번역했는데, 불교도들이 그 성전을 편찬하여 이것을 세 종류로 분류했기 때문에, 삼장(Tri-pitaka)이라 하는 것이며, 삼장은 주로 인도에서 불교성전을 개괄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삼장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① 경장(經藏) : 부처님의 교설을 문장화한 것.
② 율장(律藏) :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불제자들이 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 및 작법 등.
③ 논장(論藏) : 경이나 론에 대한 주석서의 종류.
경장이란 석존의 교설을 기술한 문장의 전부를 포함한 것으로 법화경, 화엄경 등과 같이 경(經)이 붙는 것은 전부 이에 해당된다. 이 책의 중심은 바로 이 경장이 되는데, 그 분량은 한역(漢
譯) 현존본으로 약 1,500부(部)에 달한다. 경(經)을 가리키는 범어 sutra는 본래 고대 인도에 있어서 종교, 학술, 문학, 법률 등 각 부문에서 권위 있는 책이란 뜻이었는데, 제자들이 석존의 교설을 편찬한 후 불교의 가장 권위있는 책이란 뜻에서 sutra라 했고, 중국에서 한역할 때에 이를 경(經)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율장은 불교도들이 지켜야 할 실제 생활상의 규정과 작법(作法), 그리고 교단의 규약 등을 집성한 것으로 소위 5계, 10계, 250계 등의 계법(戒法) 또는 계율(戒律)을 말한다. 이것은 석존 생존시에 5계니 10계니 또는 250계니 하여 계법으로 정리된 것은 아니고, 다만 어떠한 사례(事例)가 생기면 그때 그때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런 것은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왜 안 되는가, 어떤 이유로 지켜야 하는가를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것을 후세에 승가의 본분을 지킬 수 있게끔, 그리고 교단의 기강을 세우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끔 정리하여 집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율장은 어디까지나 석존이 친히 정했다는 형식에 의해 기술되었고, 내용은 조문(條文)과 그 조문의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량은 한역에 있어서 경장의 5분의 2정도이다. 삼장에서 경(經)과 율(律), 두장은 석존의 교설을 기술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저술의 체제상과 전통적 신념에 의한 것이어서 석존의 교설을 근본으로 후세의 개인 또는 단체가 계획적 또는 비계획적으로 석존의 교설을 기술하는 형식으로 편집한 문서가 경전이요 율전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삼장 외에 인도에는 잡장(雜藏)과 주장(呪藏), 다라니류를 모은 것으로 이것도 경장에 포함시킬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인도의 불교성전은 경, 율, 논의 삼장에 개괄할 수 있다고 보아도 좋을 뿐만 아니라 삼장은 모두 성전에 속하므로 성전으로 통용할 수도 있다.
(3) 기타 성전
인도 이외의 여러나라에서 저작된 성전은 이를 삼장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분량은 삼장의 몇 배나 되고, 성전으로서의 형식상 지위는 삼장에 뒤지지만 각 나라와 시대에 따른 불교사상이 발달, 종파의 교의(敎義) 또는 불교의 역사 등을 연구하는데는 삼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삼장 외의 성전을 대략 다음과 같이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삼장의 주소류 (註疏類)
경이나 율 또는 논에 대한 주석서로서 예컨대 천태대사가 지은 「법화경의소」가 법화경에 대한 주소서(註疏書)이고, 원효대사가 지은 「대승기신론소」가 대승기신론에 대한 주소서(註疏書)인 것이다.
② 논술해명서류 (論述解明書類)
불교에 관한 어떤 견해를 논술하거나 어떤 종파의 교의 등을 해명하는 종류로서, 예컨대 원효대사의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과 같이 그의 통불교(通佛敎) 사상을 논술한 것이라던가, 고려 체관법사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義)」와 같이 천태종의 교의를 천명한 것 등이 이에 해당된다.
③ 수필어록류 (隨筆語錄類)
고승이나 불교학자들의 불교를 소재로 한 수필이나 어록으로서, 예컨대 고려 태고국사(太古國師)의 「태고집」이라던가, 중국 송나라 원오(圓悟) 극근(克勤)의 「벽암록(碧岩錄)」등이 이에 해당된다.
④ 사전기록류 (史傳記錄類)
불교의 역사, 고승들의 전기 또는 대장경 목록 등의 책으로서, 예컨대 고려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당 현장의 「대상서역기」 또는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과 같은 대장경 목록 등이 이에 해당된다.
(4) 대장경 (大藏經)
인도의 불교도들은 그들의 성전인 삼장에 대하여는 조금도 서지학적(書誌學的)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목록과 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그러한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는바,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
① 번역의 순서와 차례를 밝히기 위한 역경목록(譯經目錄)
② 번역된 삼장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위한 중경목록(衆經目錄)
이중에서 후자인 중경목록(衆經目錄)은 이를 삼장목록, 내전목록(內典目錄) 또는 석교목록(釋敎目錄)이라고도 한다. 당말 이후에 번역된 삼장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위한 중경목록(衆經目錄)이라고 부르던 것을 석교목록(釋敎目錄) 또는 대장경목록(大藏經目錄)이라고 하여 이로부터 대장경이란 명칭이 불교성전총서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팔만대장경도 이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번역된 삼장이 주가 되지만, 그것만을 편집하여 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번역된 삼장과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중국이나 우리나라, 또는 일본등의 불교국가에서 저술된 성전도 포함해서 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오늘날 대장경을 원어로 표기할 때에 삼장을 가리키는 Tri-pitaka라고 표기하고 이것이 동시에 세계적인 공통어가 되어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경우 Tri-pitaka는 인도의 삼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처음 중국에서 대장경 목록을 만들게 된 취지는 많은 종류와 분량의 성전을 결집하고자 한 것뿐만 아니라, 소재가 불분명한 불교성전도 정리하고 편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목록의 제작은 지역간의 교통이 불편하고 정보교환의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인쇄술도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개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대사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목록의 제작은 대부분 칙명에 의하여 국가의 뒷받침을 얻어 이루어졌다.
인도에서 전래되어 번역된 삼장과 더불어 대장경 목록안에 편입시키기 위해 중국에서 저술된 불서(佛書)는 내용이 지극히 훌륭한 것이어야 선택되었다. 대장경은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사본(寫本)으로 전하여 갖거나 또는 석벽(石壁)에 조각하여 후세에 전하기도 했으나, 당나라 말기로부터 대장경판의 인가의 대사업이 시작되어 그로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15~16회, 우리나라에서 3회, 일본에서 6회의 대장경 출판이 있었다.
이러한 여러 대장경 중에서 교정이 정밀하고, 판목(板木)과 문자가 가장 호화로운 것은 고려대장경이니, 그래서 고려대장경은 모든 대장경의 기본이 되고 있다. 현재 국보 32호,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 팔만대장경의 판수는 모두 81,258장이다. 이것을 책으로 엮으면 6,815권이나 되며, 경의 종류도 1,521종에 이르며, 첫 번째 경의 첫장에는 「대반야경」이 수록되어 있다.
2. 불교경전의 성립
(1) 불설편찬의 의의
석존께서 쿠시나가라 숲속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시고 입멸(入滅)하시려 할때 아난이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이렇게도 빨리 열반에 드시려 합니까. 지금까지 세존만을 의지해서 살아 왔는데, 앞으로 누구를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울먹이자, 석존께서는 “나의 입멸을 슬퍼하지 말라. 무릇 육신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니라. 그러나 내 비록 육신은 멸한다고 하더라도 내 법신(法身)은 멸하지 않으니, 법신이란 내가 일대간(一代間)에 설한 법(法)과 율(律)중에 빛나고 있는 무상의 정각(正覺) 바로 그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입멸한 후에 너희들은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아 살아가도록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석존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한결같이 세존과 같이 위대한 인격은 결코 그대로 멸하는 것이 아니고, 법신이 인생의 무명을 밝혀 주는 진리의 등불이라고 믿고, 설하신 법과 율을 잘 받들어 그 속에서 불타의 불멸의 빛을 우러러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런데 쿠시나가라에서 제자들이 비탄에 빠져 있을 때, 교단 제일의 장로 가섭이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른 지방을 교화하면서 순회중이던 어느 날 석존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쿠시나가라로 급히 돌아가던 중, 길에서 만난 바라문으로부터 석존께서 일주일전에 입멸하셨다는 말을 듣자, 가섭을 비롯하여 제자들 전원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비탄에 빠졌는데, 수발타라는 늦게 출가한 제자가 앞에 나오더니 석존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이래서는 안 된다, 저래서도 안된다고 우리들을 속박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을 터이니 얼마나 좋으냐고 비통해하지 말라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이런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한 가섭은 교단이 건전하게 통일된줄로만 알았는데 저런 자를 보니 그대로 두었다가는 머지않아 정법(正法), 정율(正律)은 자취를 감추고 점차 사곡(邪曲)의 옆길로 떨어져 비법(非法), 비율(非律)이 유행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정법, 정율을 제정하여 확고한 불설(佛說)의 통일을 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가섭이 쿠시나가라에 도착하자마자 비구들을 지휘하여 다비(茶毘)를 끝내고는 중의(衆議)를 물어 불설(佛說)의 편찬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임을 주장하였고, 석존의 입멸을 지켜보았던 다른 제자들도 그것을 공감하고 있던 터라서 이 작업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석존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성도후 입멸하실 때까지의 45년간을 줄곧 설교를 통한 교화생활로 일관하셨다. 그런데 석존의 설법내용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하여 설법을 듣는 자의 근기(根機)에 따라 약간 다른 경우가 있고, 또한 혼자 말씀하신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듣는 자와 문답을 주고받는 설법 형식을 취하셨기 때문에 때에 따라 다른 경우도 있었다. 또한 설법을 누군가가 문자화했거나 정리해 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듣는 이에 따라서 이견(異見)이 있을 수도 있었다. 석존의 설법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일정한 조직을 세우고, 순서에 다라 설한 것이 아니며 서책(書冊)의 형태로 제자들 앞에 제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의존할 법과 율을 정리하고 편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불멸(佛滅) 직후 제자들이 제일 먼저 착수했던 것이 불설(佛說)의 편찬작업이었던 것이니 이것을 ‘결집(結集)’이라고 하며 불교의 경전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결집이 몇차례 행해졌으므로 불멸직후의 결집을 제 1회 결집이라고 한다.
(2) 제 1회 결집
제 1회 결집은 불멸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거행되었다. 교단 제일의 장로인 마하가섭을 상수(上首)로 하고 500명의 장로비구가 모여 편찬회의를 했는데, 먼저 우바리가 율을 송(誦)하고 다음에 아난이 법을 송(誦)함에 회중(會衆)이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협의하여 불설(佛說)이라고 승인한 것이다.
이 제 1회 결집은 달리 「왕사성결집」 또는 「오백집법(五百集法)」이라고도 하는데, 7개월이 소요된 이 제1회 결집에서 회중은 석존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누구의 앞에서, 어떠한 설법
을 하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어떠한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 사정을 상의하여 이것을 석존이 설법한 형식으로 전송했기 때문에 경전에는 “이와 같이 나는 듣사오니, 어느 때, 부처님이 어느 곳에서, 누구와 몇 사람 앞에서” 운운하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되고, 다음에는 석존의 설법 말씀을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환희(歡喜), 예배(禮拜)하고 돌아갔다고 하는 문구로서 마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불교경전은 제1회는 물론이고 다음에 소개할 제2회 결집때에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회의에 모인 제자들이 그들이 석존의 재세(在世)중에 직접 들었던 것을 기억나는 대로 암송하여 이것을 일정한 공인의 형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곧 편찬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경전을 그들은 각각 암송했다가 제자에서 그 다음 제자로 구전(口傳)하는 이야기 경전이었던 것이다.
(3) 제 2회 결집
제 2회 결집은 불멸 후 약 100년경에 행하여졌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당시 불교가 성행하던 베살리성내의 비구들이 계율에 대한 관념이 매우 관용적이었으므로 그것을 목도한 계율엄격주의자인 야사(Yasa)가 그 폐해를 교정코자 각처에 사람을 보내어 여러 장로비구들에게 불타의 유계(遺戒)를 바로 잡기 위한 회합을 해달라고 청한 데에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베살리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700여명의 비구가 결집을 하게된다.
이 제 2회 결집은 「베살리성 결집」,「칠백집법(七百集法)」이라고도 하는데 8개월이 소요되었다. 결집의 결과는 야사의 견해가 옳다는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진보적인 비구들은 그들 나름대로 별도로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수의 비구들을 불러모아 따로 결집을 행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제 2회 결집은 교단내의 보수적인 그룹과 진보적인 그룹의 대립이 처음 표면화되었으니. 이것이 인도불교의 이른바 근본분열(根本分裂)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4) 제 3회 결집
제 3회 결집은 제 2회 결집 후 다시 100여년이 지난 아쇼카왕때에 행하여졌다. 불교를 독신하게된 아쇼카왕은 사탑(寺塔)을 많이 세우고, 매우 많은 수의 승려들을 공양함으로 승려의 수가 증가하여 수도 화씨성(華氏城, 현재의 Patna)의 계원사(鷄園寺)에는 6만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외도(外道)들이 승려로 가장하고 승려들 사이에 끼어 들어 교단의 화합을 깨뜨리므로, 왕은 그들을 정리하기 위하여 당시 고승인 못갈리풋타, 티싸에게 교설(敎說)의 확정과 승중(僧衆)의 화합을 도모하도록 위촉했다. 티싸는 왕명을 받들어 중승(衆僧)중 1000명을 선출하고 스스로 상수가 되어 결집을 행했는데, 아쇼카왕 즉위 18년에 시작하여 9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제 3회 결집은 「화씨성결집」 또는 「일천집법(一千集法)」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때까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약 200년 동안 구전(口傳)되어 오던 경전은 제 3회 결집 후에 비로소 문자화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1회와 2회 결집때에는 경, 율 2장(藏)만 결집되었지만 제 3회 결집에서는 경, 율 외에는 논장(論藏)도 결집되었다.
(5) 제 4회 결집
제 4회 결집은 서력 2세기 전반 대월지국 카니슈카왕의 뒷받침으로 이루어졌다. 역시 불교를 독신하던 왕은 매일 스님을 한 사람씩을 초청하여 청법(聽法)하기도 하고 스스로 경론(經論)을 열람하기도 했는데, 그 논설이 같지 아니함을 의아하게 생각하여 협존자(脇尊者)에게 문의한 결과, 불교 교단내에 여러 부파가 있고 각 부파의 교의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부파의 이설(異說)을 통일시키고자 협존자와 상의하여 삼장에 능통한 학승(學僧)을 소집하여 그 중에서 학식이 뛰어난 500명을 선출하여 회중(會衆)으로 하고 카슈미르의 환림사(環林寺)에서 결집을 시작했다.
이 결집에서는 세우(世友)를 상수로 하고 법구(法救), 묘음(妙音), 각천(覺天) 및 현존자 등의 대아라한이 먼저 경장의 주석인 우파데샤 경전 10만송을 결집한 후, 계속하여 율장의 주석 10만송과 논장의 주석 10만송 등 전(全) 30만송(頌) 600만언(萬言)의 대주석을 만들어 결집을 완료했다.
왕은 동판으로 각판(刻版)하여 석함(石函)에 넣고 큰 보탑(寶塔)을 건립하여 그 속에 안치했는데, 이 중 오늘날에는 논장의 주석인 아비다르마비바사만 남아있다. 제 4회 결집은 삼장에 관한 결집이 아니라 그러한 삼장의 주석에 관한 결집이었기에 학자에 따라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불설(佛說)편찬의 범주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불멸 직후에 행하여졌던 제 1회 결집에서 성립된 경전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자로써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암송했다가 제자에서 그 다음 제자로 구전하는 이야기 경전이었다. 따라서 그 동안에 고의 또는 무의식적으로 경전의 문구와 형식이 변화했고 불멸 후 200~300년 사이에 두 번의 결집을 행하여 각자가 개별적으로 전하여 오던 불설(佛說)을 일정한 형식으로 정리하긴 했으나, 벌써 존의 말씀 그대로를 전하는 사람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에 구전이 불확실함을 알고 비로소 문자로 쓴 것이니 여기에 처음으로 문자의 경전 즉 서책으로서의 경문(經文)이 되었으나 이것도 사제(師弟)가 서로 사전(寫傳)하는 사이에 혹은 주석을 가하고, 혹은 요약을 하고, 혹은 윤색(潤色)하여 시대가 지남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게 되어 경전은 점점 원형과 멀어지게 되었으니,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존한 경문의 문장을 석존의 말씀 그대로라고 보기는 곤란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불설(佛說)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당초의 소박했던 원형이 복잡한 형색으로 윤색(潤色)되고 부가되었다는 것뿐이다. 즉 당초의 경(經)과 현존하는 경(經)과는 형식상의 상위(相違)는 있을지언정 그 내용이나 정신의 배반은 없는 것이다.
요컨대 경전은 석존의 말씀을 전할 목적으로 성립된 것이지만 연대에 따라서 전연 정반대의 결과를 보게 되고 시대가 지남에 따라 경전은 항상 신형(新形)으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온 것이니 마치 하나의 씨앗에서 싹튼 움이 점점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는 것과 같이 불교 경전은 항상 새로운 발전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불전(佛典)의 성립은 앞에서 언급한 제 1회 결집이나 또는 제 2회, 제 3회 결집시에 있었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불교가 유전(流轉)하여 온 기간 (입멸후~서력 10세기)동안 점진적인 성립의 과정을 밟아 왔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전인 범어경문의 현존한 것을 비교하여 볼 때 동일 경(經)이 시대에 따라서 형식이 다르다는 점이나 또는 원전과 타국어(他國語)로 번역된 경전과를 비교하여 볼 때 양자간의 차이를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증명된다.
3. 불교경전의 구성과 조직
(1) 12 분교 (分敎)
불교 경전의 문체와 문장 및 기술의 형식과 내용 등을 다음과같이 12가지로 분류한 것을 12분교라고 하는데 이 12분교는 달리 12부경, 12분성교 또는 12분경이라고도 한다.
① 경(經) : 사상적으로 독립된 경문이다. 단순비유가 아니라 불교사상을 표현한다.
② 고기송(孤起頌) : 게(偈)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운문체의 경문이다.
③ 중송(重頌) : 운(韻)이 없는 것으로 앞의 산문의 본문을 설명한 부분이다.
④ 무문자설(舞文字設) : 부처님의 종교적 체험을 감격한 그대로 말하는 부분인데, 질문없이 부처님 스스로 설하시는내용도 이에 포함된다.
⑤ 미증유법(未曾有法) : 이것은 경(經)가운데 불가사의한 일을말한 부분이다. 즉, 범부(凡夫)는 경험하지 못하는 성자특유한 심경(心境)이나 정신적 기적같은 것을 설한 부
분이다.
⑥ 여시어(如是語) : 거의 대부분의 경전 첫머리에 보면 부처님 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는 대목라는 말이 기록되어있는데, 이러한 식의 표현은 경문을 석존의 말씀으로 그대로믿고 의심치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⑦ 인연(因緣) : 경전을 설하게 된 사정과 동기를 서술한 부분이다.
⑧ 비유(譬喩) : 비유나 우언(寓言)으로 교리를 설명 해석한 부분이다.
⑨ 본생(本生) :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말한 부분.
⑩ 수기(受記) : 이는 석존께서 제자들에게 다음 세상에서 성불하리라는 것을 낱낱이 예언하는 경문 부분인데, 보통 문답식으로 의론을 전개하다가 최후에 부처님이 인가(認可)를 주는 형식을 취한다.
⑪ 논의(論議) : 이는 해석, 논술로써 연구논문 형식의 경문인데부처님이 논의하고 문답하여 온갖법의 내용을 말한 부분이다.
⑫ 방광(方廣) : 부처님의 설교를 문답형식으로한 논리적, 철학적 깊이를 한층 심화시킨 내용의 성격을 띤 경문이다.
이상, 12분교는 불멸직후 제 1회 결집후 곧바로 분류된 것으로 우리는 이것에 의해 당시 경전의 내용을 아는데 많은 도움을 받는다.
(2) 삼분구조 (三分構造)
중국에서 경전을 서지학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불교학자인 동진(東晋)의 도안(道安)으로부터 한 경전의 조직이 3분(分)으로 되었다는 주장에 많은 학자들이 이의 타당성을 인정하므로 채택된 분류이다.
서분(序分)은 경문의 첫머리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하 그 경을 설한 때와 장소, 그리고 대상 등 일체의 서정을 서술한 부분이고, 정종분(正宗分)은 석존의 설법을 서술한 경의 본체이며, 유통분(流通分)은 경문의 마지막에 그 설법을 들은 대중의 감격이라던가 계발의 정도, 그리고 장래에 이 경을 읽는 사람의 이익이나 공덕, 또는 그 경의 이름들을 기록한 부분이다.
이와 같은 삼분(三分)을 염두에 두고 경전들을 살펴보면 단편의 경전은 정종분(正宗分)만 있는 것도 있고 또 서분과 유통분이 극히 간단한 것도 있다. 그러나 장편의 경전은 반드시 이 삼분을 구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후의 이분이 분명하게 서술되어있음을 알수가 있다.
서분과 유통분은 석존이 설법한 언사(言辭)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석존의 설법을 들은 사람의 말 또는 쓴 사람의 기술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경전이라는 것은 석존의 설법만을 문자화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중국의 불교학자들은 서분의 기술여하에 의해서 그 경전의 사상이라던가 내용의 심천(深淺)등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여 매우 중요시 했었다.
정종분도 오로지 석존의 설법만이 아니고 제자들의 문답과 제천(諸天)의 말, 시방세계 보살들의 말 등이 석존의 말씀보다 더 많이 기록된 경전도 적지 않다. 유명한 「화엄경」과 같은 80권이나 되는 장편의 경전도 석존의 말씀은 겨우 2,3장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석존 이외의 사람의 말이 기록되어있고, 그것도 설명이 아니라 시가(詩歌), 운문, 비유, 노설 등 이른바 십이분교의 제형식(諸形式)으로 되어있다.
이상과 같이 현존의 경전이 석존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고 후세 사람들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성전으로서의 권위에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제자들과 불교도들이 석존의 말씀을 빌어 경전을 지은 동기는 대게 석존의 교리를 실천하여 체득한 종교적인 감격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 있어서는 자기의 말이 아니고 불타의 소리이며,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나타나는 불타의 말씀이라고 하는 신념에 의해서 표현된 것이므로 굳이 변조 날조된 창작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창작의 사정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이 일시에 작성한 것이 아니라 사제(師弟)가 사전(寫傳)하는 사이에 계승적으로 다수(多數)의 사람에 의한 체험과 감격이 집적되어서 차례로 완성되며서 부단히 수정된 것이러서, 그 작품은 곧 다수인이 인정하는 타당성 즉, 여러 사람의 종교적인 영감(靈感)에 접촉된 공통적인 생명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한 불교교리로 인정되는 근본 원리인 사성제와 삼법인 등의 원리는 몇가지 부동의 철칙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작품일지라도 이러한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 그의 근본사상을 불설이라고 하여 신봉하는 것이며, 불어(佛語)라고 하여 제청(諦聽)하는 것이므로 경전의 존엄성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경전의 권위는 그대로 지켜져 왔다고 본다. 한편 불전(佛典)은 문학적인 작품이므로 경문의 기사가 객관적인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닌 경우가 있다는 점, 경전중에 지옥, 극락, 기타 오늘날의 자연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는 내용들도 있지만, 이것은 그러한 사실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경전의 종교적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경전은 그 해석여하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이지 결코 시대착오의 미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거기서 경전의 진리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